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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72화 (72/133)

72화

12장. 밝혀지는 진실(5)

그곳에서 기억이 끊겼다.

레온은 빠르게 멀어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타는 냄새가 났어.’

그들의 기억은 분명 그랬다. 함선이 접근하는 것조차 보이지 않던 시야도 수상했다.

검은 사냥개 놈들이 인어를 잡아들이기 위해 자연까지 조종할 수는 없을 터.

‘대체 무슨 연기였지?’

놈들이 인위적으로 피워낸 무언가에 의해 인어들은 판단력이 흐려지고, 시야마저 빼앗겼다.

바다를 얼어붙게 만들어 단 한순간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그게 그들의 사냥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도 있다. 그 거대한 함선을 이끌고 언제 물 밖으로 나올지 모르는 인어들을 오래도록 기다릴 수는 없었을 텐데.

‘설마, 우리들 중 누군가가 인간들을 도운 건가?’

믿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레온의 고민이 깊어진 순간이었다.

잠시간 끊어진 라피스의 기운이 다시 레온에게 흘러들었다.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레온은 빠르게 흔들린 시야에 이곳이 어딘지 한참이나 생각해야 했다.

‘…소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얼음 요새가 생기기 이전의 북부 땅이었다.

‘지금 어디서 뭘 보고 있는 거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이전은 라피스가 흐르는 인어의 몸속이라 그랬을까.

직접 타티아나가 되어 바라본 시선이었다면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레온은 마치 공기 중에 떠 있는 무언가인 듯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껏 용의 심장을 찾아왔더니만… 이미 죽어버렸군.”

얼음 땅 위에 낯선 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레온이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드, 드래곤?!’

그 긴 시간을 살았어도 드래곤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알 수 없는 늙은이가 얇은 손을 뻗어 거대한 드래곤의 날개를 쓰다듬었다.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연기가 피어올랐다.

살기와 열기, 두 가지의 독한 기운이 그대로 늙은이의 손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군.”

그가 이 땅보다 더욱 거대한 것 같은 드래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 앞에 짙은 피를 흘리고 쓰러져버린 거구의 남성을 향해서였다.

“밀라쿠.”

한평생 뛰어난 전사라 일컬어졌지만, 결국 드래곤의 저주는 이겨내지 못했다.

같은 동족의 생명을 탈하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늙은이는 피가 철철 흐르는 밀라쿠의 심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녀석을 이 땅에 잠재우기 위해 온 심장을 바쳐버렸어.”

아쉬운 일이다.

“내 것이 될 수 있었는데.”

드래곤의 심장은 한낱 인간이 취할 수 없는 영물이었다.

다만 인간의 모습을 한 드래곤, 즉 용의 혈족의 심장만큼은 인간 역시 얻어낼 수 있었다.

용의 혈족은 드래곤의 심장과 그 몸에 흐르는 강력한 피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도구였다.

오래도록 늙은이가 탐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흠, 용의 검인가?”

밀라쿠의 곁, 주인을 잃은 짙은 색의 검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나뒹굴었다.

드래곤의 피를 흠뻑 뒤집어써 저주로 곧 소멸할지도 모르는 검이었다.

“물론 내가 그리 두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야.”

늙은이가 금세 회복한 손으로 곧장 검을 집어 들었다.

또다시 강한 기운에 손이 괴사할 듯 무너져 내렸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강한 힘으로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리고 밀라쿠의 피를 불러들였다.

얼음 위에 고여 있던 용의 피가 천천히 검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늙은이가 중얼거렸다.

“타는 듯한 뜨거움을 지닌 피로써 얼음을 녹일지니… 그 피를 이어받은 자만이 이 검을 누린다.”

온몸의 기운이 손을 타고 검으로 흘러들었다.

그건 제 몸에 고인 썩은 피를 끊임없이 밀어내고 영혼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고통이 요동쳤다. 하나 고통을 즐기는 늙은이의 표정만은 기괴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피로써 약속했으니 용의 피를 가진 이가 이 검을 쥔다면 반드시 알게 되겠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모든 드래곤의 아버지를 이곳에 잠재웠다.

용은 결국 그 저주받은 피의 부름을 받고 이곳을 찾을 것이다.

“저런… 눈도 감지 못했군. 불쌍한 나의 밀라쿠.”

늙은이가 상한 제 손을 망토 안에 감추고 밀라쿠에게 다가갔다.

하늘을 바라보고 주검이 된 밀라쿠는 눈도 감지 못한 상태였다.

‘저건… 타티아나잖아!’

쓰러져 있는 건 의식 전 마주한 거구의 노인이었다.

타티아나의 정체가 밀라쿠였다니. 혼란스러움에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용놈들이란 그런 게지. 나고 자란 하늘을 눈에 담아야만 결국 죽을 수 있는 게야.”

푸른 눈동자가 그대로 머무르는 밀라쿠를 보며 늙은이가 다시 한번 입맛을 다셨다.

“죽은 네 육신을 다시 되살릴 것이다, 밀라쿠.”

이 선택으로 결국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검은 투구 놈들이 방법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될 테지만, 전부를 얻기 위해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겠지.”

검은 투구?

상황을 바라보는 레온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알 수 없는 늙은이가 칭하는 이들이 검은 사냥개라는 건 의심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저놈도, 그들과 같은 무리인 건가?

“자, 의식을 거행하지.”

늙은이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죽은 밀라쿠의 육신을 바라봤다.

아직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용의 심장은 육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나마 다시 생명을 누리거라, 밀라쿠.”

늙은이가 몸 안에서 오묘한 빛깔의 라피스를 꺼내 들었다.

크기도, 상태도 온전한 인어의 영혼 그 자체인 라피스였다.

“이 정도는 되어야 용의 피를 감당할 수 있겠지.”

온전한 상태의 라피스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어를 생포에 아직 숨이 끊이지 않았을 때 그대로 심장을 도려내야만 했다.

아주 어렵게 구한 라피스였지만 이걸 포기하면 살아 있는 용의 심장 하나를 도로 얻을 수 있게 된다.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내게 용의 심장을 전해다오.”

늙은이가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라피스를 꿈틀거리는 용의 심장에 집어넣었다.

그 순간 밀라쿠의 푸른 눈동자의 색이 뒤바뀌었다. 저주받은 붉은 눈동자가 새로운 핏빛 하늘을 눈에 담았다.

‘모두 그런 거였어.’

밀라쿠의 몸에 들어앉은 건, 바로 타티아나의 라피스였다.

***

그 뒤의 시간은 마치 영겁 같았다. 바닷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것보다도 기나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다시 눈을 뜬 라피스는 밀라쿠의 몸속에서 타티아나의 기억으로 존재했다.

“…….”

타티아나는 말이 없었다.

꼭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내내 기다리기만 했다.

“용을… 찾는다.”

그래야 이 생명이 끝날 수 있다.

아무런 기억도 없었지만 본능처럼 제 목표를 알았다.

“그들을… 불러들여야 해.”

용의 혈족을 찾기 위해선 끊임없이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야 했다.

타티아나는 그 순간부터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곧장 요새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직 용의 피가 돌고 있는 얼마의 시간만 가능한 일이었다.

‘말도 안 돼.’

정신을 집중하고 기억을 지켜보던 레온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타티아나의 영혼이 묶여 있는 육신, 즉 밀라쿠가 인간의 가죽을 가르고 드래곤의 날개를 뿜어냈기 때문이다.

‘드, 드래곤이 될 수 있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른다. 알 수 없는 그 늙은이가 도움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죽어 되살아난 육신은 인간의 모습을 감추고 피의 기운을 끌어모아 드래곤이 되었다.

그 후부터는 모든 게 쉬운 일이었다.

‘맙소사, 드래곤이 해답이었다고?’

드래곤화가 된 밀라쿠가 살기와 열기로 다이아 스틸을 녹여내 한평생 맞붙었던 거대한 드래곤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위에 소하의 요새를 세웠다. 그 불가능한 일은 단 며칠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밀라쿠만이… 모든 걸… 끝낼 수 있다.”

불쌍한 타티아나는 제가 밀라쿠란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렸다.

이제 용의 기운이 얼마 남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용의 심장을 찾아야 해.”

세상에 모든 이가 혹한의 땅에 찾아왔다. 거부할 수 없는 부름을 받은 이들이 이곳까지 걸음을 자처했다.

다만 타티아나가 찾는 이는 없었다. 용의 피를 가진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 죽어.”

아닌 자들은 필요 없다. 성가실 뿐이다.

타티아나가 감정 없는 얼굴로 찾아온 이들을 하나씩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아온 이는 모두 시체가 되었다. 시체들이 사라지기도 전에 또다시 사람들이 찾아왔다.

시체가 쌓이고 쌓였다.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인간들은 추운 혹한 속에서 영원히 죽지도 못했다.

‘…결국 이게 시작이었던 거야.’

요새 아래 잠든 드래곤의 사체에선 감당할 수 없는 살기가 흘러나왔다. 열기는 이제 다이아 스틸 안에 갇혀 한기가 되었다.

요새를 찾은 이는 모두 그 강력한 기운에 노출되었다.

사람들은 검을 마주하기도 전에 살기에 먼저 질식하고 말았다.

그리고 살아 있는 자들 역시 죽어가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채로 심장이 얼어붙었다.

‘모든 건 드래곤의 저주였어.’

유일무이한 존재를 가둔다는 건 그런 걸 의미했다.

쌓이고 쌓인 시체 속에 살아 있는 자들도 모두 시체가 되고, 점점 살 수 없는 땅이 되었다.

이미 주검이었던 밀라쿠의 육신은 그곳에서 라피스에 빌붙어 생명을 유지했다.

‘정말 끔찍한 일이야.’

믿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저 요새 안에 잠든 드래곤 때문이었다니.

그 후로 또 영겁 같은 시간이 흘렀다. 라피스의 기억은 매일 비슷한 하루 역시 빠짐없이 기억했다.

그 방대한 기억을 흡수하는 동안 현실의 레온은 온몸을 덜덜 떨어야만 했다.

점차 몸의 기운이 남김없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 라피스의 기운이 역으로 방출되는 순간 제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이제 그만 흡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기억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대체 뭐지?’

레온이 무언가에 이끌리는 것처럼 기억을 따라갔다.

강력하게 자신을 불러대는 라피스의 기운이 느껴졌다. 꼭 이미 죽어 사라진 심장이 요동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

타티아나 역시 기운을 느꼈다.

그 육중한 몸이 얼음 요새의 정문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찾아오는 건 익숙한 일이었지만, 이런 느낌은 영겁의 시간 동안 처음이었다.

어쩌면 기다리던 존재가 왔을지도 모르겠다.

용이, 용의 심장이, 뜨거운 피를 가진 혈족이 나타난 일인지도 모른다.

“어서 문을 열어라!”

노기 섞인 그 강력한 목소리에 전투원들이 재빨리 문을 열어젖혔다.

타티아나가 지체없이 달려 나갔다. 저를 불러대는 이 강력한 기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어서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

그곳엔 작디작은 어린아이가 주저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눈물이 차올랐다.

“…타티아나?”

그녀가 나를 부른다.

뒤집어쓴 껍데기를 부르는 게 아니라, 그 안에 갇혀 있는 제 영혼을 불러주는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는.”

붉은 눈이 자신을 마주하고 방긋 웃었다.

타티아나는 그 앳된 얼굴 위에 겹치는 영혼이 누구의 것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티나….”

마지막으로 봤던 울부짖는 모습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타티아나가 곧장 티나에게 달려갔다.

또 다른 주검을 뒤집어쓰고 찾아온, 사랑하는 제 동생을 향해 뻗는 손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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