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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73화 (73/133)

73화

12장. 밝혀지는 진실(6)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속을 헤매다 현실에서 눈을 뜨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라피스의 모든 기억이 손끝으로 흘러들어온 게 느껴졌다.

레온은 끔찍한 고통과 함께 겨우 정신을 차렸다.

“…….”

방대한 타티아나의 기억과 제게 머무른 본래의 기억을 구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레온은 긴 시간 동안 자신이 누구인지 한참이나 생각해야만 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그런 혼란을 느끼는 건 레온뿐만이 아니었다.

쓰러지는 순간, 두 사람의 손을 붙잡은 티나 역시 이 모든 기억을 엿보게 됐다.

“레온, 방금 전에 내가 본 게 대체 뭐냐고!”

레온이 놀란 티나를 바라봤다.

연한 녹색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듯 주변을 살폈다.

오랜 시간 동안 머물렀던 공간이, 제게 안식을 주었던 모든 것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 정말 이상했어. 대체… 이게 뭐지? 내 기억이 모조리 엉망이야. 아무것도 진짜 같지가 않아!”

그녀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부짖었다.

레온은 제 손바닥 위에 남은 물빛과 같은 타티아나의 메모리아 라피스를 바라봤다.

“티나.”

무겁게 잠겨 집중해서 들어야만 겨우 귓가에 닿는 레온의 지친 목소리가 티나를 불렀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두려운 부름이었다.

“이건 네 가족의 것이니까 네가 갖는 게 맞겠지.”

돌아온 건 그 언제인가보다 다정한 위로였지만 말이다.

“이건 타티아나의 기억이야.”

“…뭐?”

“방금 전 네가 본 모든 건 그녀가 살아온 평생이 담긴 순간이고.”

“전부… 꿈이 아니라고?”

“그래, 티나.”

손 위에 놓인 메모리아 라피스가 점차 영롱하게 빛났다.

반대로 그 영혼을 담았던 육신은 본래의 모습대로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

티나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이미 이 운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보고 난 직후라 레온의 말을 의심하긴 어려웠다.

“인사해. 이제 더는 남아 있는 시간이 없어.”

메모리아 라피스를 받아든 티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라피스를 얻기 전처럼, 주검의 모습으로 점차 말라비틀어져 가는 밀라쿠의 육신이 보였다.

티나가 손을 뻗었다. 그 가여운 품에 고개를 파묻자 혹한과도 같은 냉기가 느껴졌다.

“난 항상 내 운명이 엉망진창이라 생각했거든….”

끝을 알 수 없는 이런 삶은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이런 끔찍한 인생이 또 있을 리 없다고, 꿈이라면 어서 빨리 깨어나게 해달라고 수백 번을 간절히 빌었다.

“근데 아니었네.”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던 눈동자엔 더 이상 생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티나가 손을 뻗어 육신의 눈을 감겨주었다. 본래의 빛을 되찾은 푸른 눈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 인생은 다시 얻은 소중한 기회였던 거야.”

그녀가 나무껍질처럼 말라붙은 피부를 한참이나 쓰다듬었다.

오르내리지 않는 가슴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뜨거운 숨결이 완전한 이별을 밝혀주었다.

“다시 언니와 함께할 소중한 순간이었던 거지. 이 모든 시간이.”

그런 것도 모르고 미래를 위해 살았다. 중요한 건 항상 이곳, 현재에 있었는데.

티나가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천천히 늙은 육신에게 입 맞추었다.

“잘 가… 타티아나.”

되살아난 두 번째 삶은 이렇게 끝이 났다.

레온이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비로소 영원한 안식을 맞이하는 영혼을 위한 배려였다.

***

거센 바람이 불었다.

레온은 어질어질한 시야에 잠시간 멈추어 섰다.

메모리아 라피스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력을 소모했는지 모른다.

제 몸 안에 남아 있는 라피스를 전부 끌어다 쓴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드래곤의 기운이 약해졌던 거야.’

생명이 살 수 없던 이 땅에 점차 시체보다 사람이 많아진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만, 이 땅에 용의 혈족인 워렌이 나타나며 살기가 다시금 감돌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북부에 다시 시체병이 도진 건 그것 때문이겠지.’

그만큼 용의 혈족이 갖는 피의 무게는 수천, 수만의 목숨을 쥐고 흔들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레온이 서서히 그쳐가는 눈보라를 살피며 경계탑 근처로 다가갔다. 마치 한 걸음이 천 번의 망설임 같았다.

호흡이 가빠왔다. 누군가가 심장을 억죄고 온몸의 피를 빼돌리는 느낌이었다.

레온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수많은 계단 위에 섰다.

“후우….”

어지러운 시야를 정돈하고 호흡을 골랐다.

어느새 메리와 칼이 갇혀 있던 얼음 감옥 앞이었다.

‘용의 혈족은 다이아 스틸을 다룰 수 있어.’

엿보고 온 기억 속 사실이 그랬다.

레온은 워렌이 휘두른 일격 한 번에 형체도 없이 사라진 창살을 살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던 공간처럼 보였다.

“워렌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겠지.”

알 수 없는 늙은 술사는 죽어 목숨이 끊어진 밀라쿠의 심장에 인어의 라피스를 넣었다.

밀라쿠는 드래곤의 피를 이은 용의 혈족이다.

타티아나가 이곳 소하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 피가 남아 있는 밀라쿠의 육신에 머물렀기 때문이리라.

‘기억이 사실이라면 이 다이아 스틸을 정제하기 위해선 드래곤의 힘이 필요한 것 같은데.’

인간의 모습이던 밀라쿠는 라피스의 힘을 얻고 스스로 드래곤화 하였다.

그 숨 막히는 열기로 다이아 스틸을 녹여내고 거대한 날개로 불길을 사로잡았다.

영원히 녹지도, 깨지지도 않는 다이아 스틸을 어린아이 장난감 쥐듯 다룰 수 있는 건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존재인 드래곤만이 가능한 것이다.

“용의 혈족이 드래곤이 될 수 있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는데.”

자세히 아는 바는 없었지만 그들의 전쟁은 바다의 주인이던 자신조차 알 수 있을 만큼 지난한 세월 간 유지되었다.

애초에 용의 혈족이 드래곤이 될 수 있다면 벌어지지도 않았을 전쟁이었을 텐데.

‘하지만 밀라쿠는 되었지. 드래곤이 될 수 있었어. 왤까?’

그 알 수 없는 늙은이가 뭔가 술수를 부렸거나, 그게 아니라면….

“…라피스를 얻었기 때문일까?”

레온이 천천히 제 두 손을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새하얀 손이었다.

“그 노인은 분명 사냥개 놈들과 한 패일 거야.”

검은 투구가 누구를 칭하는 건지는 분명했다.

늙은이가 다이아 스틸에 대해 알고 있는 이상, 사냥개 놈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모든 게 연결되어 있었어.”

데로니스 놈들을 쳐부술 만한 무기는 제가 가진 유일한 무기가 아니었다.

어쩌면 놈들 역시 이 북부 땅을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

다이아 스틸을 얻기 위해, 또 용의 혈족을 찾기 위해.

“…힘이 필요해.”

텅 빈 손을 움켜쥐었다.

고개를 돌리니 메리에게 향하기 위해 부수었던 창살이 보였다. 분명 깰 수 없는 다이아 스틸이었다.

‘내가 이걸 어떻게 깼는지는 모르겠지만.’

얼기설기 부서진 창살 앞으로 다가가, 레온이 그때처럼 손을 뻗었다.

닿기만 해도 피부를 벗겨낼 것 같은 차가운 다이아 스틸을 움켜쥐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다이아 스틸을 빼앗길 순 없어.”

힘이 필요하다. 데로니스를 몰락시키고 인어의 라피스를 빼앗는 검은 사냥개놈들을 쳐부술 만한.

그 시작과 끝은 모두 다이아 스틸을 얻는 것부터였다.

“근데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느냐고!”

아무리 노력해도 지난번과 같은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레온이 막무가내로 창살을 쳐대기 시작했다.

움켜쥔 채 흔들어도 보고, 주먹으로 내려쳐 보기도 했다.

하나 다이아 스틸은 본래의 모습대로 흠집 하나 남지 않았다. 상처 입는 건 오히려 레온의 여린 피부였다.

“대체… 대체 왜!”

순간 눈앞에 어지러움이 물씬 밀려들었다.

레온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저릿한 느낌에 두 눈을 꾹 감고 휘청거렸다.

기운이 모두 사라진 탓이다. 몸 안에 남아 있는 라피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온몸에 힘이 빠져 서 있을 수 없다.

“공자님.”

쓰러지려는 순간, 누군가가 등 뒤에서 레온의 손을 붙잡았다.

레온은 눈을 뜨지 않았다. 뜨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워렌.”

그가 무너지려는 레온의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쓰러지지 않도록 지켜내는 그 힘에 레온이 워렌을 마주했다.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그냥 압니다, 이젠.”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모두가 마리사와 미셸을 배웅하고 난 뒤에도 워렌의 신경은 오직 레온에게 향해 있었다.

그를 찾기 위해 심처까지 향해 보았지만 마주한 건 주검이 된 타티아나였다.

“이제 어디에 계셔도 찾을 수 있습니다.”

불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난 뒤 워렌은 레온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아주 미약하지만 집중하면 가려낼 수 있다.

그 작은 몸에선 제 몸에 흐르는 피와 같은 운명이 느껴졌다.

“공자님.”

워렌의 부름에 레온이 그를 바라봤다.

무엇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레온에게 필요한 게 뭔지는 분명히 안다.

“드릴 게 있습니다.”

워렌이 레온을 바로 세우고 가지고 있던 푸른 검을 내밀었다.

이곳 요새 지하에서 얻어낸 드래곤의 살기를 담은 검이었다.

“이걸, 왜.”

레온은 눈앞에서 푸르게 빛나는 검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라피스의 기운이 약해진 순간 잡을 만한 물건처럼 보이진 않았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느껴지는 살기가 그랬다.

“쥐어 보십시오.”

다만, 워렌의 태도는 확고했다.

잠시간 제가 거두었으나 필요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워렌이 레온의 빈손을 맞잡았다.

“이제 공자님의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그 작은 손에 검을 쥐어주자 레온이 가쁜 숨을 토해냈다.

“…하!”

믿을 수가 없었다.

검을 쥔 순간, 마치 잃어버린 제 것을 되찾은 기분에 휩싸였다.

레온은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푸른 기운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검에 담긴 기운이 온몸을 일으켜 세웠다. 세워진 몸 곳곳에 라피스가 돌아다니는 게 느껴졌다.

“말도 안 돼.”

더는 나약해지지 말라는 듯 뛰어대는 탓에 레온은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보고도 믿을 수 없다. 검을 얻고 나니 오히려 라피스의 힘이 강해졌다.

“공작 저하께선 모든 걸 알고 계셨습니다.”

워렌의 목소리에 레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과 푸른 눈이 서로를 바라봤다.

“모든 걸 알고 계시다니?”

“이 피에 얽힌 비밀과,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자들이 누군지… 모든 걸 알고 계셨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워렌?”

확신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제게 이 검을 쥐어준 것일 테니까.

“그걸 알아내기 위해 찾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아직 살아 있었다.

레온이 제 손에 들린 검을 힘 있게 움켜쥐고 물었다.

“그게 누군데?”

“헤리스.”

“…기사단장?”

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오 몬데이어의 가장 친한 벗이자, 용의 혈족을 찾아 나서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

“헤리스 타린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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