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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74화 (74/133)

74화

12장. 밝혀지는 진실(7)

멀리서부터 토바가의 귀환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이어졌다.

아르고가 떠난 지 보름째 되는 날의 일이었다.

“영주님! 지금 막 마리사 아가씨와 미셸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연로한 재정관이 헐레벌떡 덴에게 달려왔다.

모든 이들의 접근을 막고 오직 중요한 보고만을 받고 있는 영주였기에 늙은이가 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 돼. 마리사까지 함께 돌아왔다고?”

“예, 영주님!”

기대하던 소식이었다. 기껏 바랐지만 이룰 수 없는 일이라 마음 졸이고 있기도 했다.

재정관이 꽉 닫힌 침실 문을 바라보며 덴이 모습을 드러내기만 기다렸다.

“…영주님?”

어찌 된 일인지 문은 작은 소음조차 내지 않았다.

꼼짝도 않고 부동하는 문을 요리조리 살피며 재정관의 주름진 입가가 점차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이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는 이제 문 앞에서 이리저리 주변을 맴돌며 제 의심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두 분의 귀환이거늘… 어째서 방에 틀어박혀 한 발자국도 안 나오신단 말입니까?”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히스 토바라면 모를까, 마음 착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덴이 그럴 리는 없었다.

재정관이 문고리를 붙잡았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안쪽에서 굳세게 잠겨 꼼짝도 하지 않는 문짝을 뜯어낼 것처럼 힘을 주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마치 제게 무언가 숨기는 분처럼 말이죠!”

그러고 보니 덴이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지 벌써 삼 일이 지났다.

오며 가며 조심스레 행동했던 지난날과는 달리 아예 침실에 콕 박혀 음성만으로 보고를 나눈 게 고작이다.

재정관이 광기 어린 표정으로 문고리를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열지 않으면 부술 기세였다.

“제게 무엇을 숨기시는 겁니까! 서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로 저 고귀한 신수 아래 맹세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건 토바가에 평생을 건 제 가문 어른들을 욕보이는 일이다.

재정관이 침까지 튀겨대며 덴을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먼 길을 달려온 마리사와 미셸이 숨도 채 고르지 못하고 나타났다.

“이럴 수가. 마리사 님!”

“영감, 오랜만이야.”

“정말입니다. 정말이지 오랜만이에요. 우리 미셸 아가씨께선 여정이 고되지 않으셨나 보군요.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그럴 리가 없다.

투명한 뺨 위엔 피할 수 없는 반사된 태양의 흔적이 가득해 몹시 흉측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소린 됐고. 대체 오라버닌 뭘 하는 거야? 뭘 하는데 나와 보지도 않아?”

“…서, 설마 어머니께서?”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모른다. 영주성 어디를 가도 덴과 어머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미셸과 마리사가 불안한 눈초리로 서로를 살폈다.

설마, 너무 늦은 걸까.

“그게….”

재정관이 이 참담한 소식을 어찌 전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순간이었다.

지난 삼 일간 굳게 닫혀 있던 덴의 침실이 달칵, 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모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안쪽에서 덴의 기운 빠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 사람이 전부 그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맙소사.”

“정말 미안해, 마리사… 기껏 찾아와 줬는데.”

이런 모습으로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슬픔을 보탤 생각 역시 없었지만.

“나… 시체병에 걸려 버렸어.”

센느의 수많은 이들을 괴롭혔던 병세가 덴에게도 옮겨왔다.

그 지독한 기운을 떨쳐낼 수 있는 건 이곳에 단 한 사람도 없었다.

***

“그게 모두 사실이란 말이지.”

어머니가 쓰러져 있는 침대 곁, 그 위독한 생명을 지키고 있던 덴이 소하에서 일어난 모든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래, 그러니까 포기하긴 일러. 아니, 포기하면 안 돼, 덴.”

마리사가 토바가의 장녀답게 어린 남동생의 기운을 북돋았다.

곁에서 대화를 경청 중이던 미셸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머니는 더 이상 가망이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어머니가 가망이 없다니?!”

덴이 조심스레 어머니의 체온을 유지해주던 모포를 걷어냈다.

마리사와 미셸이 단숨에 가까이 달라붙었다.

두 자매의 연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뒤흔들렸다.

“어머니는 시체병에 걸리신 게 아니야.”

“그럼… 어째서.”

그녀에게선 회색 반점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특별한 증상도 없었다.

점차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다는 게 유일한 병세였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거야.”

어쩌면 먼저 떠난 둘째 아들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덴은 다시 그녀의 말라붙은 몸 위에 모포를 덮어주었다.

“나을 수 없어, 어머니는.”

그리움을 낫게 할 방법이 없다. 떠나간 이가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미셸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다만 마리사만큼은 아니었다.

마리사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어머니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어머니, 제발 눈 좀 떠보세요. 제가 왔어요. 마리사가 왔다구요.”

이 토바가의 비극은 제 여정에서부터 시작됐다.

가족의 곁을 그리도 쉽게 떠날 수 있다는 걸 알렸으니, 히스의 부조리를 참지 못한 둘째가 먼 길을 떠나다 죽어버린 것 역시 모두 제 탓일 것이다.

마리사가 뚝뚝,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토바 부인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모습이었다.

“…나 역시 지금까지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덴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제 주먹을 움켜쥐었다.

뜨겁고 차가운 고약한 것들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생명에 남아 있는 기운을 전부 불살라 지옥 아래로 끌고 내려가는 듯한 느낌에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레온이 내게 기회를 주는군.”

지난밤까지 들끓었던 열감이 모두 사라졌다.

몸 곳곳에 서서히 퍼져나가는 회색 반점이 이제는 무엇인지 알게 됐다.

“내 몸을 얼릴 생각이라면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덴이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곤 벌떡, 의자를 밀고 일어나 세 사람 앞에 섰다.

“재정관, 성문 앞에 우리 영지민들을 모두 모아줘.”

“…예?”

제대로 눈조차 뜰 수 없는 노쇠한 늙은이가 마른침을 모아 삼켰다.

지금껏 제가 모신 세 분의 영주 중 이런 눈빛을 한 이는 없었다.

“예, 영주님!”

따라야 한다. 그의 명을 이뤄야 한다.

그런 사명감이 그의 느려터진 심장을 부풀게 만들었다.

“나도 도울게!”

미셸이 굳세게 눈물을 닦아내고 늙은 재정관을 도와 서둘러 침실을 빠져나갔다.

마리사는 저주가 내려앉은 남동생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결심이 선 덴의 얼굴은 낯설 만큼 대단해 보였다.

“불을 준비할게.”

그녀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덴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사는 지체없이 발길을 돌렸다.

“…어머니.”

덴이 천천히 어머니에게 고개를 내렸다.

죽음이 드리운 어머니의 이마에 한참이나 고개를 묻고 마지막일지 모르는 순간에 진심을 전했다.

“제가 원하는 것에 전부를 걸게 됐으니 이렇게 제 삶이 끝나더라도 저, 후회하진 않을 거예요.”

레온이 건네준 기회가 정말 시작일지, 그도 아니라면 영원한 끝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심지어 불길에 뛰어들 자신조차도 운명을 시험하는 꼴이었다.

“그러니 아직 떠날 준비가 안 되셨다면… 조금만 더 지켜봐 주세요. 제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 되는지를요.”

덴이 어머니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한기가 머무르는 앙상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긴 채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가야 할 길이 정해진 사람은 더 이상 멈추어 서지 않는다.

덴 역시 마찬가지였다. 덴은 반점이 올라온 제 모습을 더 이상 감추지도, 홀로 죽어가지도 않았다.

“여, 영주님!”

“이게 대체….”

“영주께서 시체병에 걸리셨어.”

“…말도 안 돼. 우리 센느의 몰락이다!”

지난 시간 동안 영주성에 감금되다시피 목숨을 부지하던 영지민들이다.

내문이 열리고 성문 앞에 모이라는 미셸의 당찬 목소리에 모두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나온 참이었다.

한데, 그런 순간 마주한 게 죽어가는 영주의 모습이라니.

모두가 좌절했다. 또 주저앉아 허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성내에도 시체병이 돌고 말았으니, 이제 남은 건 죽음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이 혹한의 저주는 오래도록 우리 북부를 점령했습니다.”

그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영지민들에게 현실을 고하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른 채 우리는 북부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생명을 내어줘야만 했죠.”

치료 방법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눈 깜짝할 새 살아 있던 자가 모두 죽어 나갔으니, 죽지 않은 이들은 살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됩니다.”

이 위대한 발견을 해낸 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려야 했다.

덴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신만을 바라보는 영지민들을 향해 외쳤다.

“레온 몬데이어! 나의 영원한 친우가 우리 북부를 구할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뭐라고? 북부를 구하다니. 그게 가능한 일이던가?

영지민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는 소리다. 어린 영주가 죽음을 앞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닌지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다.

“마리사.”

“…준비됐어.”

곁에 서 있던 마리사가 마른 장작더미 위에 불을 붙였다.

덴이 일렁이는 붉은 불꽃을 제 눈에 담았다. 제 운명을 뒤바꿔줄 생명의 기운이 저곳에 숨 쉰다.

“여, 영주님. 지금 무엇을….”

예상하지 못한 재정관이 공허한 눈빛으로 덴을 바라봤다.

그에게서 삶의 의지를 엿보았는데. 살아남겠다는 분명한 기운을 읽어 심장이 뛰었는데!

“영주님, 안 됩니다!”

달려들려는 늙은이를 미셸이 끌어안았다.

지켜보는 수많은 영지민들이 너도나도 비명을 지르며 눈앞의 상황을 믿지 못했다.

제 발로 불길에 뛰어들다니!

“센느의 몰락이다!”

“토바가의 멸문이야! 오,이럴 수가!”

영지민들이 두 눈을 꽉 감고 중얼거렸다.

눈앞에서 영주가 제 발로 불 속에 뛰어들었다. 제정신이라면 가능할 리가 없는 행동이었다.

불길이 거세게 몸집을 부풀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타닥거리는 장작 타는 소리만이 영지민들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

“…….”

이상했다. 수상하리만치 주변이 고요했다. 영주를 말려야 할 두 영애께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누구보다 영주의 목숨을 귀히 여기는 재정관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영지민들이 하나둘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끔찍함을 외면하고자 노력했던 시선을 돌리고 나자.

“…여, 영주께서….”

“살아계신다.”

“…맙소사.”

불길 속에 굳건한 덴이 보였다.

그는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 타들어가는 장작과 달리 흠집 하나 남지 않았다.

모두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덴은 마치 불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사람처럼 보였다.

“…….”

긴 시간이 흘렀다.

거대하게 쌓아 올린 장작더미가 모두 재가 되고도 덴은 한참이나 그곳에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주인을 지켜보던 아르고가 높이 하늘을 맴돌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재정관이 털썩, 주저앉는 순간 덴이 천천히 눈을 떴다.

“…여, 영주이시여.”

여린 피부를 물들였던 회색 반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덴은 하나둘 제 발치에 조아리는 영지민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한의 저주를 이겨낸 자, 나 덴 토바.”

꺼져가던 생명에 다시 불이 붙었다. 온몸을 짓누르던 작은 망설임도 더 이상 남지 않았다.

덴이, 신을 보듯 저를 바라보는 영지민들을 향해 고했다.

“이 혹한의 주인, 레온 몬데이어를 위해 살 것을 내 영지민들 앞에 맹세한다.”

두 번째 삶은 제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대들도 따르겠는가?”

가야 할 길은 분명했다.

그건 오직 레온을 위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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