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75화 (75/133)

75화

13장. 새로운 곳으로(1)

며칠간 소하를 관통했던 폭풍 같은 일들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건 지난 수천 년간 유지했던 고요를 깨뜨리는 커다란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타티아나 님은 더 이상 이곳에서 이룰 일이 없다.”

용의 혈족을 불러들이는 모든 역할을 해냈으니 더는 주검에 갇힐 필요가 없었다.

티나가 가지런히 도열한 전투원들에게 타티아나의 죽음을 알렸다.

“더 이상, 다른 그 누구도 우리 소하의 타티아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전투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또 세상의 눈과 귀를 속이기 위해 이 소하의 여족장은 대대로 타티아나라 칭해져왔다.

하나 그 모든 게 거짓이란 건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티나가 제일 잘 알았다.

그녀에게 영원한 안식을 줄 것이다. 이름 또한 거두어 나고 자란 바다로 보내주고 싶었다.

“우리 소하는 지금부터, 나 티나가 통치할 것이다.”

전투원들이 슬픔을 삼키고 얼음 창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오래도록 타티아나의 곁에서 궂은일을 도맡아온 티나였기에 그녀에 대한 믿음은 부족하지 않았다.

“페페.”

“예.”

마리사를 잃은 정예병 넷이 곧이어 타티아나가 잠든 심처에 활활 타오르는 불을 내렸다.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보내주기 위해 티나는 오래도록 머문 타티아나의 거처를 모두 불태웠다.

“정말 대단한 규모네요.”

먼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브라운이 잠시간 타티아나를 향한 애도를 표했다.

짐을 꾸리던 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투모를 가슴 위에 올리고 잠시간 묵념했다.

“메리,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기 가만히 있어.”

“예, 도련님. 걱정 마세요. 이놈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힘에 부친다니까요.”

메리가 품을 벗어나려는 새끼 스노우 울프의 목덜미를 단단히 옭아맸다.

레온이 손을 뻗어 그런 녀석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목을 울리는 위협 소리가 짜증을 표했지만 미약할 뿐이다.

레온은 녀석의 골난 얼굴을 단단히 붙잡고 경고했다.

“조금이라도 메리를 귀찮게 하면 엉덩이를 맞을 줄 알아.”

그르르릉!

불만 섞인 두툼한 꼬리가 사정없이 바닥을 쳐댔다. 물론 잠시간이었다.

놈은 얌전히 앞발 손질에 신경 쓰며 일행들의 떠날 채비를 방해하지 않았다.

“공자님, 어느 정도 짐을 꾸렸습니다. 빠진 게 없나 확인하면 되는 정도예요.”

“그래, 수고했어.”

“뭐, 뭘요! 이 정도는 제게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제게 맡겨주세요!”

케인이 기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레온에게 도움이 되다니.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케인, 네 검을 빼먹었다.”

“가, 가장 중요한 것을요?”

물론 장막을 걷고 나서는 워렌이 나타나자마자 좌절했지만 말이다.

“브라운.”

“예, 공자님.”

레온이 두 사람을 뒤로하고 브라운을 찾았다.

지도를 살피던 그가 방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정말 슐츠에 가도 되는 걸까?”

레온은 소하를 떠나 데로니스 세력의 영향권인 남부 슐츠로 떠나기로 목적지를 잡았다.

수도 덴버그와 넓은 수로 하나만을 가운데 두고 붙어 있는 곳이라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녀석들의 턱 밑으로 다가가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기사 헤리스를 찾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브라운은 워렌의 이야기를 토대로 헤리스를 찾을 만한 목표지 여러 곳을 떠올렸다.

그중 가장 가능성이 크고 확실한 곳은 서대륙 최남단 슐츠였다.

“그곳은 기사 헤리스의 고향으로, 여전히 타린 가문이 통치하고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헤리스는 가문을 버리고 아버지의 곁을 택했잖아. 과연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까?”

“예, 그곳에 가야만 공자님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레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잡으려면 역시 정보가 필요하겠어.”

“예, 공자님을 찾아내기 위해 길라행까지 자처한 몸이니 더 이상 물불 가릴 게 없을 거예요. 어쩌면 데로니스 놈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손쉽게 슐츠로 입성할 가능성도 있겠죠.”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어.”

헤리스 타린은 하나뿐인 주군 루시오 몬데이어의 등에 칼을 내꽂고 폰네시를 배반한 몸이었다.

적어도 항간에 떠도는 그에 대한 소문은 그랬다.

레온 역시 그 모든 걸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그럼 슐츠로 가자.”

“대륙을 따라 가로지르는 것보단 엔드해를 통해 가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그래, 데로니스 놈들의 해상 병력은 현재 웨스트 아리아에 집결해 있다고 했지?”

“예, 지금으로선 동대륙으로 건너가는 배편을 찾아 그곳에서 슐츠까지 가는 방식을 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원이 적으니 배편을 구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좋아, 출발하자.”

때마침 케인과 워렌이 옥신각신하면서도 짐을 모두 챙긴 상태였다.

메리가 앉은 자리에서 새끼 짐승을 안아들었다.

또다시 새로운 여정이었다.

“레온.”

그때 여린 목소리가 일행들의 틈에 뒤섞였다.

“티나?”

영면식을 마무리한 후 레온을 찾은 티나의 방문이었다.

“떠날 것 같아서 인사를 하러 왔어.”

티나가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낸 채 레온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더 이상 변하지 않는 제 모습을 숨기지도, 백색 망토 아래서 다가오지 않는 끝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네게 고난을 주어서 미안해. 메리의 일도, 기사 칼에 대한 일들도.”

티나가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메리를 함부로 대한 일은 내내 마음에 얹힌 것처럼 걸려 있었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도 얻은 게 있으니 이곳에서의 기억이 나쁘지만은 않아.”

“그래? 다행이다.”

타티아나의 기억을 통해 알아내야 할 모든 것을 얻은 직후였다.

레온이 티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티나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레온을 바라봤다.

“만나서 즐거웠다, 티나.”

같은 아픔을 지닌 동족의 영혼이 이 어린 몸에 잠들어 있다.

어떤 말로도 이 운명을 위로할 순 없겠지만 그렇게라도 손잡아주고 싶었다.

“…….”

티나가 한참이나 레온의 손을 바라보다 천천히 그 손을 맞잡았다.

그러곤 한쪽 무릎을 굽히며 레온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알아.”

기억 속에서 엿본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언니와 나를 이렇게 만든 그 사람을 찾아 반드시 죄를 묻겠어.”

이 삶에 언젠가 끝이 있다면 그 끝까지 맞서 싸우리라.

티나가 천천히 레온의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내 멈춰 있는 시간은 이제부터 너를 향해 흐를 거야.”

살아가야 할 이유를 준 이에게 할 수 있는 건 이런 맹세밖에 없었다.

“그 순간까지, 네게 바다의 가호가 깃들길.”

목숨을 걸고 그를 지켜낼 것이다.

이곳 소하는 이제, 레온의 영역이었다.

***

그 시각.

길라 인근의 숲속.

“그러니까 그 자뎅이란 분만 찾는다면 레온의 행방을 알 수도 있단 말씀이시죠?”

“자뎅의 눈은 이 서대륙 곳곳에 있지. 반드시 알고 있을 거야.”

“눈이요? …눈이 많아요?”

“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놈은 잘나가다가 한 번씩 삐끗하는 경향이 있다.

헤리스가 웬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피타를 한참이나 노려봤다.

“그러니까 그 자뎅의 눈이란 게 정확히 뭘 말씀하시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아서 그래요. 제가 상상이 안 되면 납득도 못 하는 편이라.”

“머리가 나쁘다는 소리를 제법 자랑스럽게 하는군.”

“…헤리스 경께선 기대와 달리 자애롭지 못하시고요.”

“길라까지는 소문이 안 났던가? 내가 생판 남 같은 아이를 직접 거둬 키웠다는 이야기가?”

“친자식을 본인과 연관 없는 자식으로 키운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뭐야? 너 지금 말 다 했어?”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길라 인근 숲속으로 걸어 나갔다. 하여간 좋지 못한 말동무를 얻었다.

툴툴거리던 피타가 슬슬 긴장하기 시작했다.

“쉬이이잇.”

나고 자라 그 어느 곳보다 익숙하고 정겨운 곳이지만, 지금은 그런 만큼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 있는 풀 하나까지도 저를 모를 리가 없어요. 그러니 좀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헤리스 경.”

“흠흠, 그래, 뭐.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군.”

두 사람이 나무에 바짝 달라붙어 주의를 기울였다.

레온의 행방을 찾기 위해 두 사람은 헤리스의 고향인 슐츠로 떠나는 길이었다.

슐츠는 가장 먼저 데로니스 왕조에 충성을 맹세한 영지다.

그레이트 대협곡을 가로질러 적진 한복판에 맨몸으로 들어서는 건 불가능할 터.

두 사람은 본래 헤리스의 생각대로 길라의 해안 마을을 통해 밀항하기로 결정했다.

“그나저나 걱정이군요. 우리 같은 부랑자가 그런 좋은 검을 들고 있는 건 설명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에요.”

피타가 헤리스의 검을 보며 고심했다.

몬데이어 공작가의 표식이 새겨진 강인한 검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숨긴다고 숨겨질 것 같지도 않다.

피타는 그 사파이어가 꼭 레온의 눈동자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밀항자들이 몰려드는 해안 마을에 도착할 터였다.

“부랑자라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을 거란 건 편견이지. 모른다면 알려주겠어.”

“예, 몸부터 잘 지키신다면 가능한 일이겠죠.”

그의 다리 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피타는 주변에 불어대는 바람 소리마저 유심히 살피며 헤리스의 걸음에 맞추었다.

“잠깐, 저건 수색자들인가?”

“…이런.”

“하나, 둘… 적어도 열다섯은 되어 보이는데.”

그들은 검은 복색을 하고 있었다. 데로니스 세력의 특색이었다.

“어디 뒤로 돌아가는 길 같은 건 모르나? 눈에 띄지 않고 밀항할 수 있는 비밀 통로 같은 거 말이야.”

“아버지는 정직한 분이시죠. 그런 건 없습니다. 적어도 이 영지 길라엔 말이에요.”

피타는 말하면서도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만큼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적도 없다.

“쉿, 이쪽으로 온다.”

헤리스가 피타의 뒷목을 잡아챘다.

항구를 지키는 수색자의 수는 겨우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행인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자들의 수는 도저히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를 어쩐다.”

마을엔 데로니스의 충성스러운 개들이 득실거리고, 밀항을 위한 길은 완전히 막혀버렸다.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목을 죄어오는 수색자들을 보자 등 뒤가 서늘해졌다.

“큰일이군. 싸울 수도 없을 텐데.”

무엇보다 헤리스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대로 놈들에게 들킨다면 상대는 물론이고 도망마저 쉽지 않은 상황.

“데로니스 놈들이 병력을 파견한단 소식은 이미 들었지만… 예상보다 이르네요.”

“동부는 가장 늦게 혹한이 다가오는 지역이지 않나. 병력 운용이 가능한 시기를 놓치진 않았겠지.”

“제길, 아버지께 도움을 청할 순 없는데. 이제 어쩌죠?”

해안 마을을 통해 밀항하지 못한다면 목적지 슐츠로 우회하는 길이 더욱 복잡해진다.

이 몸으로 그레이트 대협곡을 지날 수도 없는 일.

헤리스가 신경마저 끊어진 것 같은 제 다리를 눈여겨볼 때였다. 문득 눈앞에 길이 보였다.

“슐츠로 갈 배를 구할 곳이 한군데 있기는 하지.”

헤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기가 어딥니까? 월랜드라면 이곳보다 경계가 더욱 심할 텐데.”

“엔드해와 맞닿은 곳이 하나 더 있지.”

“…설마?”

헤리스의 몇 마디에 피타도 같은 곳을 떠올렸다.

엔드해와 맞닿은 곳, 그러면서도 데로니스의 손아귀에 넘어가지 않아 누구의 감시도 없는 곳.

“하지만 어쩌면 여기보다 더할지 모르겠네요.”

“그래, 그곳에 머무르는 모두가 서로의 감시자일 테니.”

출신도, 신분도, 그 무엇도 기준이 되지 않는 무법자들의 영역.

“그래도 가야겠지.”

“…갈 곳이 그곳뿐이라면요.”

“그럼 정답은 나왔군.”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마다비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