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13장. 새로운 곳으로(2)
폰네시에 밤이 찾아왔다.
이곳을 장악한 데로니스 세력의 젊은 사령관 다니엘 이든은 바르게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크탄.”
그러자 그의 앞에 검은 투구를 뒤집어쓴 암살자가 고개를 들었다. 거역할 수 없는 부름에 응해야 하는 탓이었다.
“예.”
투구에 가린 얼굴은 표정을 알 수 없었다.
다만, 굳게 움켜쥔 주먹으로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지난번에 분명 레온을 죽이라 명을 내렸지.”
폰네시의 성문이 열렸던 태양의 절기에 내린 명이었다.
“하지만 너의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와 같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쉽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어린 공자의 목숨 줄을 끊어놓을 좋은 기회는.
“그 녀석은 죽었습니다.”
쉽게 입을 여는 법이 없는 다크탄이 고개를 들었다.
그날, 어두운 숲속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은백색 머리칼의 몬데이어는 제 운명도 모르고 쉽게 입을 놀렸고, 제 살기 어린 단검은 녀석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건 분명한 죽음이었다. 죽음이 아닐 수 없는 완벽한 움직임이었단 말이다.
“네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건가?”
“전 분명 녀석의 목숨을 끊어 놨습니다.”
“그렇다면 그놈이 다시 되살아나기라도 했단 소린가?”
다니엘의 삼백안 위 자리 잡은 짙은 눈썹이 까닥였다.
그는 전혀 흥미 없단 얼굴로 이 주제에 대해 떠들어댔다.
“마치 라피스를 지닌 존재라도 되는 것 같군.”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몬데이어 공작가의 라피스는 오직 하나뿐이니.
“일리아는 제 영혼의 일부를 여자아이에게 심어두었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일리아의 라피스는 레브란 이름의 여자아이에게 심어졌다.
그 영혼을 회수하기 위해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만약 지금 살아 있는 게 그 여자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분명하지 않는 일은 재앙의 씨앗이다. 마음속에 섣부른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재앙.
하지만 이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생각해낸 술수 같은 게 아니다.
레온에게 죽음을 선사한 후, 다시 녀석이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곱씹어본 가능성이었다.
“녀석이 본 정체를 숨기고 사내 행세를 하고 있는 거라면 모든 게 설명됩니다.”
다니엘이 고개를 저었다.
“레브의 몸속에 있던 라피스는 우리가 전부 손에 넣었다. 네 추측이 맞다 하더라도 다시 되살아날 리가 없다.”
“암살자들 중에 몬데이어의 첩자가 단 한 사람만 있었어도 가능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루시오 몬데이어라고 적진에 아군을 심어두지 않았을 리 없다.
만일 7년 전 그날, 레브에게서 라피스를 전부 빼앗아내지 못한 게 사실이라면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확인이 필요하겠어.”
다크탄이 좀 전과는 전혀 다른 기세를 끌어올렸다.
폭주하는 암살자의 기운을 하나도 숨김없이 다니엘 앞에 드러내고 방출시켰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목숨을 거두고자 검으로 노린 이가 여태껏 이 땅에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레온 몬데이어가 여자일 수도 있다라….”
내내 무표정이던 다니엘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올라갔다.
“녀석이 감추고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오라.”
다크탄의 목표가 되고도 다시 되살아난 그 목숨의 비밀을 파헤쳐야겠다.
과연 일리아가 남긴 라피스로 여태껏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또 다른 무언가로 삶을 연명하고 있는 것인지.
“네가 실수한 게 아니라면 다음번에도 다시 살아나겠지.”
라피스의 힘이란 그런 것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영혼의 보호 아래 끊임없이 샘솟는 무한한 인어의 생명력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
“가서 밝혀라. 레온 몬데이어의 비밀을.”
다니엘이 검은 투구단 중 가장 강력한 암살자에게 명했다.
이제 절기도, 시기도 녀석의 편이 아니었다.
***
레온이 제 어깨 위에 앉은 아르고의 부리를 쓰다듬었다.
소하를 떠난 일행들의 곁을 찾은 지 어느덧 삼 일이 지났으니 슬슬 체력을 회복했을 터.
“자, 여기 내 서신도 덴에게 잘 전해줘, 아르고.”
녀석의 발목에 서신을 메어주고 나자 아르고가 날개를 넓게 펼쳤다.
다시 긴 비행 준비를 하는 놈을 응원하며 레온은 며칠 전 덴에게서 온 서신을 다시 펼쳤다.
우리의 레온에게.
레온, 우리 북부는 너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어.
마리사와 미셸이 센느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은 이 문장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했다.
시체병으로 성문을 닫고 죽어가는 영지민들을 지켜봐야만 했던 우리는 더 이상 혹한 앞에 무능하지 않을 수 있게 됐어.
북부 전역에 퍼진 시체병을 모두가 극복해가는 중이야.
다행인 일이었다.
드래곤의 살기로 인해 온몸이 얼어붙는 그 끔찍한 병을 이겨낼 방법을 찾았으니 말이다.
이 모든 게 다 네 덕분이야.
우리 북부 연합은 <불의 군단>이라는 이름하에 레온, 너를 위한 두 번째 삶을 살아가려 해.
센느와 페르탈린을 비롯한 북부 영지의 연합군은 이번 일을 계기로 조금 더 단단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브라운은 이를 두고 북부를 움직이는 힘이 선대 몬데이어 공작을 벗어났다며 기뻐했다.
온전히 레온만을 위한 연합군은 은혜를 갚으려는 움직임보다 더욱 진실한 힘이 되어줄 터였다.
참, 마리사는 우리 불의 군단의 방어 체계 훈련을 담당하게 되었어.
어머니께서 다시 기력을 잃으실까 봐 절대 센느를 떠날 수는 없다는 입장이야.
위독했던 토바 부인은 극적으로 마리사의 생사를 확인하며 목숨을 부지했다.
본래 소하로 돌아가려 했던 마리사는 결국 고향에 남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병이 가족을 잃은 것에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게 돼 도저히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더 좋은 소식이 있어.
소하의 여족장인 티나가 우리 영지에 전투원들을 보내주었어.
다시 요새 밖으로 나갈 인원들을 지원받아 우리 영지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거든.
살 이유를 찾지 못해 무작정 요새 안으로 숨어든 이들이었다.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던 타티아나도, 용의 혈족을 찾기 위해 애써야 할 의무도 없어졌으니 티나는 전투원 중 원하는 이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들과 함께 온 페페라는 여인은 무척이나 박식해서 내가 배울 게 아주 많은 것 같아.
재정관도 놀랄 정도였어.
그녀처럼 고대 기록에 대해 방대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생전 처음 볼 정도라고 하니 말이야.
돌아갈 수 없는 마리사를 찾아 페페는 센느로 향했다.
그녀 역시 살아야 할 이유는 요새 안이 아니라 이제 바깥에 존재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미셸이 꼭 전해달라고 한 메시지를 전할게.
레온 일행과 함께 소하에 다녀온 미셸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평생 거들떠도 안 보던 학술서에 코를 박고 밥도 거르는 중이었다.
오라버니로서 걱정이 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말괄량이 천방지축의 아가씨가 방에만 틀어박혀 싫어하던 서책에 몰두하니 두려움까지 들 정도였다.
함께하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다음에도 같이할 시간을 위해 많은 것을 배우겠다고 해.
다만, 미셸에겐 배워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세상에 알고 있던 모든 것보다 값진 일들을 알려주어서 고맙다고, 언젠간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꼭 다시 나타나겠다고 전해달래.
그저 날씨나 환경을 탓하며 지내던 날들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미셸은 더 이상 누군지도 모르는 이와의 결혼 생활을 꿈꾸지 않는다.
눈 폭풍이 부는 영주성에서 얌전히 새로운 삶이 다가오길 기다리지도 않기로 했다.
레온, 너의 여정에 늘 우리의 힘이 닿길 바라며.
불의 군단, 덴 토바로부터.
레온이 꾹꾹 눌러쓴 덴의 흔적을 매만지며 서신을 접었다.
데로니스 세력은 반드시 북진할 것이다.
혹한의 절기가 물러갔으니 막을 새도 없이 밀고 들어갈 것이 모두의 앞에 자명한 사실이었다.
시체병을 이겨내는 방법 또한 머지않아 그들의 귀에 들어갈 터.
“공자님, 페르탈린군에 보낼 전술서입니다.”
이대로 전면전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 내 의견도 정확히 적어놨으니 바로 부딪칠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레온이 브라운에게 받은 전술서를 서신과 함께 메었다.
데로니스 녀석들이 북부 땅을 탐낸다면 센느까지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고 방어전으로 끌고 가라는 명이었다.
‘센느와 소하만 지킨다면 반드시 승산이 있어.’
물론 그 안에 푸른 피로 다이아 스틸을 다룰 줄 알게 된다는 조건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가려는 모양이네요.”
“그러게, 브라운.”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아르고의 날갯짓이 거세졌다.
지켜보는 레온과 브라운, 그리고 먼 곳에서 짐 정리를 하던 케인과 워렌도 모두 녀석을 바라봤다.
“잘 가, 아르고.”
레온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신호였을까. 아르고가 이내 드넓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녀석을 보며 일행들은 새로운 여정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자, 그럼 우리는 이제 다시 출발해 볼까요?”
브라운이 늘 그렇듯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일행들에게 당부했다.
“우리가 갈 뉴홉은 분명 우리의 동맹 세력이지만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겁니다.”
그야 당연한 소리였다.
영주가 불의 군단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곳에 사는 영지민들까지 뜻을 모은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뉴홉이라면 레온에게도 익숙한 소도시였다.
그나마 동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항구 마을이었기에 폰네시와의 접근성이 무척이나 좋은 곳이다.
그곳 영주가 몇 번 찾아온 적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온화하고 상냥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지만, 그래서 더 경계해야 해.”
은백색 머리칼에 벽안은 흔한 외모가 아니었다.
“웃는 낯 뒤에 무슨 흑심을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까.”
뉴홉 영주가 폰네시 그 석벽의 성을 찾을 때마다 레온을 마주한 적이 있는 만큼 반드시 정체를 숨겨야만 했다.
“그래서 제가 묘안을 준비했습니다, 공자님.”
북부에서 동대륙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뉴홉에서 배를 타야 한다.
그리고 정확히 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섬 도시 ‘달로스’를 거쳐야만 했다.
“묘안이라니?”
“또 무슨 짓을 꾸민 거지, 부집사?”
레온과 워렌이 의기양양한 브라운에게 물었다.
케인은 빨갛게 얼어붙은 손끝을 호호, 녹이며 어서 빨리 이 대화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머리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사람이니 어련히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오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신분을 위조할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절대 공자님을 공자님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신분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런 게 있어? 하긴, 들키지만 않는다면야 괜찮겠지.”
“아뇨, 공자님. 들키더라도 문제없습니다.”
그런 방식이 있다고?
레온이 의아해하며 브라운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눈가가 휘어지게 웃으며 설명했다.
“공자님께선 지금부터 잭 가문의 넷째 영애, 아르테미스 잭이 되실 거니까요!”
이는 완벽한 계책이었다.
“나더러… 여장을 하라고?!”
이 시대에 여자를 남자로 의심하는 결례는 목숨을 내놓아도 부족할 만한 큰 잘못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