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77화 (77/133)

77화

13장. 새로운 곳으로(3)

“뭐? 누가 뭐가 돼?”

레온이 다시 되묻기 전에 반응한 건 곁에 서 있던 워렌이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케인 역시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소리부터 내질렀다.

브라운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잘못됐단 거지?

이처럼 완벽한 계획이 또 어디 있다고.

“신분이 들킬까 우려되는 거라면 걱정 마세요. 안전한 신원을 확보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설명이 부족했다.

브라운이 일행들에게 차분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잭 가문은 일전에 우리 공작가에 죄를 지은 후작가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워렌의 반응이 유독 날카로웠다.

“그때 죄를 묻지 않고 은혜를 베풀었으니, 이번엔 그들이 우리에게 보은할 차례죠. 제게 서약서도 있습니다.”

브라운이 가슴 안에서 루시오 몬데이어의 서명이 담긴 서약서를 꺼내들었다.

잭 가문의 수장인 아르히 잭의 서명 역시 분명히 적혀 있었다.

이 서약서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이행해야 하는 게 두 가문의 오래된 약속이었다.

“이미 잭 후작에게 서약서의 존재와 함께 아르테미스, 아티쿠스 두 사람의 바깥출입을 완전히 금하라는 명을 보낸 직후입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잭 가문은 서약서 안에 적힌 내용을 반드시 수행해야만 한다.

오래도록 간직해 온 서약서까지 꺼내든 건 레온을 보호하는 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여인의 노릇을 해야 하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토록 저항받을 일이 아니란 말이다.

“대체 왜 그러시죠?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워렌 경?”

브라운은 여전히 노기를 숨기지 않는 워렌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야….”

잭 가문과의 악연은 마다비아에서부터 시작됐다.

자식을 보호하겠다는 이유만으로 가진 것 없는 자신을 훈련병으로 대신 세웠던 전적이 있는 놈들이다.

원리 원칙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놈들이 무슨 뒤통수를 칠 줄 알고 겁도 없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걱정하시는 건데요.”

하지만 워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제게 일어난 개인적인 일로 마땅한 대안이 없는 일을 가로막을 순 없었다.

무엇보다 레온을 위한 길을 막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다, 부집사.”

“좋습니다. 그럼 이제 다들 괜찮으신 거죠?”

“아뇨! 저는 완전 반대입니다!”

“이유 없는 반대는 기각입니다.”

“들어보지도 않고요?”

가볍게 케인의 의견까지 꺾은 브라운이 고개를 돌렸다.

반대의 목소리도 가라앉은 것 같으니, 슬슬 당사자에게 실행을 확정 받을 참이었다.

“공자님?”

레온은 눈에 띄게 침울해 보였다.

한참 말없이 침묵을 지킨 레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 하기 싫어도 해야 해?”

“아무래도 그렇죠. 바다를 건너다 데로니스 놈들의 표적이 되고 싶은 게 아니시라면요.”

“으응, 역시 그렇지?”

애초에 저항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레온이 두통이 이는 머리를 붙잡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근데 아르테미스는 그렇다 치고, 아티쿠스 잭은 또 누구야? 나더러 1인 2역을 하라는 건 아닐 테고.”

얻어 쓸 신분의 주인공 뒤에 그런 이름이 따라붙었던 것도 같다.

레온의 물음에 브라운이 설명을 마저 이었다.

“아티쿠스는 아르테미스 아가씨와는 남매 사이로, 두 살 아래 남동생의 이름입니다.”

“그래? 두 사람의 신원을 확보한 거야?”

“예, 우리들 중에선 워렌 경이 그 신분을 대신하게 될 테고요.”

“뭐라고?”

워렌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또 아티쿠스 잭이라니, 워렌이 큰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피로감이 물씬 밀려왔다. 고약한 탄내를 줄줄 매달고서 말이다.

“명망 있는 가문의 영애가 홀로 배를 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녀와 동행할 가족이 한 명쯤은 있어야 했다.

“두 사람 모두 아직 미혼으로, 잭 가문에 남아 있는 이들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우리가 바다를 건너는 동안 그 누구도 눈치챌 수 없을 거예요.”

아주 완벽한 조건의 신원을 찾아내느라 브라운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브라운은 그 이후로도 메리, 케인, 그리고 자신에게 부여될 새로운 신분까지 모두 설명했다. 빠져나갈 틈이 전혀 없었다.

“고맙다… 브라운.”

“이런 것쯤 제겐 별것도 아닙니다, 공자님.”

원래 여자인 걸 숨기고 남장 중인데, 그런 상태에서 다시 여장을 하라니?

‘나, 괜찮을까?’

하는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레온의 좁혀진 미간이 펴질 줄 몰랐다.

“뉴홉에 도착하면 제가 필요한 물품을 좀 사 오겠습니다.”

“그건 저도 같이 가야겠네요, 부집사님.”

“오! 유모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면 저야 영광입니다.”

어쩐지 메리는 조금 전보다 기운을 차린 모습이었다.

다시 긴 머리칼을 빗어줄 생각에 가슴이 설레는 것이리라.

“가자, 케인.”

일행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레온은 조금 전부터 줄곧 사색이 된 케인을 불러들이며 뒤돌았다.

“예에, 공자님….”

다들 우리 공자님한테 반할 텐데.

케인은 사람들에게 빼앗기기 싫은 레온의 실체를 상상하며 온몸을 떨어야만 했다.

‘다들 눈치채면 어떡하지?’

어쩌면 당사자보다 비밀이 들킬까 봐 케인이 더 좌불안석이었다.

‘…분명 아름다우실 텐데.’

한편으로 케인은 늘 상상만 하던 모습을 마주할 생각에 가슴이 부푸는 것을 느꼈다.

여인의 모습을 한 레온이 궁금했다. 지금 그 누구보다도.

***

일행들이 뉴홉에 도착했다.

이곳은 북부의 느낌도 분명 있지만, 폰네시에서 보았던 동부의 축복이 더 많이 남아 있는 작은 항구 마을이었다.

동대륙으로 건너가기 위해선 반드시 이곳을 거쳐 달로스까지 가야 했으므로 마을을 찾는 방문객이 하루 평균 열댓 정도는 되었다.

레온 일행은 자연스럽게 그들 무리에 섞여들었다.

“특별히 눈에 띌 만한 일은 없을 테니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피로한 여정이었지만 쉴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일행들은 누가 봐도 오래도록 북부 땅을 누빈 사람처럼 보였다.

잭 가문의 남매가 식솔을 이끌고 긴 여행길을 떠나왔다고 우기기엔 어려워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내가 입을 옷을 직접 고르라고?”

“그러실 수야 없죠. 아가씨의 식솔인 제가 도울 겁니다.”

“브라운, 너 지금 나 놀리냐.”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부집사를 나무라지 말아 주십시오, 공자님.”

근데 왜 저렇게 신이 나 있는지 모르겠다.

뒤에서 은은하게 웃고 있는 메리에겐 배신감까지 들 정도였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얻을 수 있는 최선만 생각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열을 내더니 워렌도 뜻을 접은 것 같았다.

그래, 싫다고 서서 버텨봤자 억지로 옷을 갈아입히면 입혔지, 절대로 그냥 넘어갈 놈들이 아니다.

“그래, 가. 알겠으니까 가자고.”

재빨리 곁에 따라붙은 브라운이 귀한 아가씨를 대하듯 레온을 에스코트했다.

레온은 차라리 눈을 감자 싶어 메리와 함께 뉴홉의 상점가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북부 유행을 선도하는 우리 의상실에 잘 오셨습니다.”

유리알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화려하게 잘 꾸며진 규모 있는 의상실 문이 열렸다.

상점주인 조안나가 먼지 묻은 일행들의 행색을 보곤 잠시간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이런… 오시는 길이 고되셨나 보군요.”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곁에 유모를 달고 있는 가장 작은 존재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조안나는 냉큼 레온의 앞으로 다가서며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어떤 의상을 찾으시죠? 사냥을 위한 전투복부터 방한복, 방어복까지 없는 게 없답니다.”

오는 길에 잭 가문의 머리칼 색과 맞춘 가발까지 뒤집어썼지만 망토 후드를 눌러써서 그런지 여자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서로 간에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까 우려된 브라운이 서둘러 조안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요구했다.

“우리 ‘아가씨’께선 평소 즐겨 입으시는 드레스를 고르러 오셨습니다. 혹한이 곧 물러갈 테니 산뜻한 색감의 가벼운 원단으로 준비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아뿔싸.

조안나가 얼굴을 붉히고 서둘러 레온에게 사과를 건넸다.

“아가씨, 무례를 용서하세요. 워, 워낙 이곳에 무리 원정 사냥을 오는 이들이 많다 보니 함부로 판단했습니다.”

“됐어. 괜찮으니까 옷이나 줘.”

“…예? 그,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만.”

아가씨라 하기엔 다소 말투가 대범하고 건방졌지만, 그야 제 무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안나는 적극적으로 아름다운 드레스를 어필하기 시작했다.

당최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레온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우리 아르테미스 아가씨께선 평소에도 워낙 화려한 복장을 찾으셔서요.”

“호호호! 맞습니다. 이것보다 더 여성스럽고, 우아한 드레스가 없을까요?”

이제부턴 메리와 브라운의 무대였다.

기왕 여장을 한다면 평소에 입어볼 수 없는 모든 옷을 입혀볼 기세로 메리는 온갖 드레스를 점찍어대고 있었다.

곁에서 말리지 않는 브라운도 즐거워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레온이 멀뚱히 서서 눈으로 의상실을 살피는 워렌에게 다가갔다.

아티쿠스 잭 역할을 해야 하니 워렌도 옷을 골라야 할 것이다.

“명성은 별 볼 일 없지만 오래 전부터 유지해 온 후작 가문이니 치장에 신경 썼을 거야.”

레온이 적당한 의상 하나와 번쩍거리는 브로치를 골랐다.

“주변 영지민들과는 다른 차별성을 분명히 두고 싶었을 테고.”

가슴 한쪽에 매달면 넘치는 부를 자랑할 만한 표식이 되어줄 터.

브로치를 달아주기 위해 손을 뻗던 레온이 주춤했다.

워렌이 워낙 큰 탓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브로치를 달아줄 수가 없었다.

가까이 가도 되는 건가. 보통 남매들은 어떻지?

진짜 레온은 일찍 죽어버렸고, 남매간의 우애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레온이 고민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덥석 브로치를 채갔다.

“이런 건 미천한 제가 하겠습니다, 아가씨. 하하핫!”

케인이 냉큼 워렌의 가슴팍에 브로치를 내던졌다.

날카로운 핀이 근육을 뚫지 못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아르테미스 아가씨,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아름다운 드레스를 모두 골라 놨답니다.”

그때 조안나가 세 사람 사이를 가르고 레온의 손을 붙잡았다.

하마터면 후드가 벗겨질 뻔했다. 손을 뻗어 머리통을 납작 눌러댄 레온이 손쓸 틈도 없이 조안나에게 끌려갔다.

“…이걸 입으면 내가 새처럼 보일 것 같은데?”

“아주 아름답고 우아한 공작새처럼 보이겠죠. 호호호!”

“공작새라고?”

“자, 어서 입어 보시겠어요? 참! 치수도 재어야 하니 이쪽으로 오시구요.”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그냥 만들어진 대로 입을 테니 이대로 줘.”

“이런 아름다운 드레스를 몸에 맞추지도 않고 입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자! 어서요!”

“아니, 필요 없다니까? 무엇보다 이 옷은 아름답지 않아.”

“부끄러워 마시고요!”

브라운과 메리의 취향은 대단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다고 지적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끔찍한 드레스였다.

강렬한 색상을 자랑하는 검붉은 원단이 화려한 오색 빛깔 깃털과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레온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젓다가 결국 조안나의 손을 쳐냈다.

어깨를 더듬던 그녀의 손이 민망한 듯 허공에 머물렀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유치한 장난에 장단 맞춰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난 이깟 사치를 부리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이대로라면 사슴 가죽으로 동여맨 몸을 들키고 말 것이다.

사실은 여인이라는 것도, 또 억지로 그런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 그 어느 쪽도 드러낼 만한 일은 아니었다.

“내 저택에도 입을 드레스는 많아. 식견을 넓히러 가는 길이니 목적에 맞는 복장을 우선하는 게 좋지 않겠어?”

레온이 조안나에게 공작새의 깃털 같은 드레스를 내던졌다.

“새 옷을 내어와. 편한 것으로.”

이딴 옷을 입을 바엔 바다를 헤엄쳐서 동대륙으로 갈 것이다.

레온은 독한 눈으로 한참이나 드레스를 노려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