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13장. 새로운 곳으로(4)
지금 입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본 외출복을 건네받고서야, 레온은 메리와 함께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올 수 있었다.
메리가 뿔이 난 레온의 후드를 조심스레 벗겼다.
그 안에서 치렁치렁하게 긴 남색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도련님, 조심스레 살피지 못해 죄송해요. 제가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하는 건데.”
여인의 옷을 고를 수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났던 게 미안했다.
레온이 무엇을 감수하며 사는지 다 알면서도 그저 기뻐하기만 했으니 말이다.
“괜찮아. 이 머리부터 어떻게 좀 해줘봐.”
“예, 도… 아니, 아가씨.”
치렁치렁 긴 머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메리가 묵직한 망토 안에서 이리저리 엉겨 붙은 머리칼을 살살 빗어내기 시작했다.
레온은 바로 앞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거울을 바라보며 제 낯선 외모에 한숨을 내쉬었다.
“꼭 7년 전 같네.”
“예, 그때와는 정반대의 일이지요?”
허리 끝에서 찰랑거리는 머리칼이 어렸을 적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머리색만 다르지 여인의 복색을 차려입은 레온은 늘 메리가 상상해온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날부터 모든 게 너무나 달라져 버렸어요.”
두툼한 메리의 손가락이 남색 머리칼 사이를 비집고 갈랐다.
레온은 거울 너머 메리의 연한 녹색 눈동자 안에 담긴 것이 폰네시를 향한 그리움일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있잖아.”
7년 전, 석벽의 성에서 새로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제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게 흘러왔다.
이곳에서 마주한 순간들은 바다를 누비던 그 긴 하루보다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여자에서 남자로, 그리고 다시 잠시간 여자로.
데로니스에게 폰네시를 빼앗기고 아버지라 여긴 루시오 몬데이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은 단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때도, 지금도 메리가 내 곁에 있으니 다 괜찮아.”
새로운 삶이 시작된 순간부터 늘 변치 않고 곁을 지켜준 이와 아직 함께였다.
레온이 제 어깨 위에 내려앉은 메리의 손을 토닥이며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달로스에서도 잘 부탁해, 메리.”
“…예, 도련님.”
메리가 빠르게 눈물을 훔쳤다.
레온이 그런 메리를 모른 척하며 자리를 정돈했다.
옷도 입었고 머리도 만졌으니, 이제 일행들 앞에 나설 차례였다.
“나 안 이상하지?”
오늘따라 사슴 가죽으로 꽁꽁 동여맨 가슴이 더욱 갑갑한 것 같았다.
“그렇게 보는 이가 있다면 누군가에게 눈퉁이를 맞은 게 틀림없지요.”
“그래?”
“예, 그럼요.”
걱정 말고 나가라는 메리의 응원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어쩐지 나서기가 부끄럽다.
레온이 손잡이를 한참 붙잡고도 나가지 못하자, 메리가 달칵 말릴 틈도 없이 문을 열었다.
“…….”
“…….”
“…….”
곧장 세 사람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안절부절못하며 대기실을 뱅뱅 돌고 있던 케인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었다.
“헉!”
그가 헛숨을 들이마셨다. 뭐라 법석을 부리기에도 할 수 있는 표현이 부족했다.
내가 지금 천사를 보고 있는 건가?
케인이 제 머리를 내려치는 동안 워렌은 시선을 돌렸다.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맙소사, 고, 공…주님이 따로 없으시군요!”
늘 그렇듯 공자라 부르려던 브라운이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조안나가 두 눈을 부릅뜨고 일행들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런 호칭은 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맙소사!”
세 사람이 못 다 내지른 탄성을 대신 터뜨리며 조안나가 레온에게 다가왔다.
메리는 등 뒤에서 제 일인 양 뿌듯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정말 하늘이 주신 축복이에요. 어쩜 이리도 아름다우세요?”
흰 피부와 대비되는 짙은 색 머리칼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살구를 물들인 것처럼 양 볼에 피어난 아름다운 생기는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군더더기 없는 매끄러운 콧날과 도톰한 입술까지 찬양하다가는 날이 새도 모자랄 게 분명하다.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군요!”
아무 장신구도 없건만 이토록 빛이 날 수 있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레온이 걸치고 있는 건 가장 기본적인 옷 중에서도 정말 특색 없는 것이었다.
동북부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보석이 빛나고 있었다니?
조안나가 숨 쉬듯이 주접을 이었다.
“원단을 사러 폰네시를 오갈 때 분명 기억에 남았어야 하는데! 맙소사, 제 회심의 명작을 꼭 한 번 입혀드리고 싶은데요?”
“공작새를 말하는 거라면 사양할게, 조안나.”
“무료로 드린다 하더라도요? 입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제 영광일 것 같아 그래요!”
“아니, 싫어. 바다를 건너는 새가 되고 싶진 않아.”
“이럴 수가! 어쩜 그런 마음 아픈 소리를!”
허리 끝까지 찰랑이는 긴 남색 머리칼이 잘게 흔들렸다.
레온이 고개를 젓곤 챙이 커다란 모자와 짧은 망토 몇 가지를 더 주문했다.
“얼굴을 가릴 수 있을 만한 걸로 부탁해.”
머리색은 감추었지만 푸른 눈동자는 숨길 수가 없다.
조안나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얼빠진 케인에게 옷 꾸러미를 얹어주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가자.”
레온이 말없이 낯가리는 일행들을 향해 명했다.
“아가씨, 돌아오시는 길에 꼭 한 번 더 들러주세요. 그땐 정말 마음에 드실 만한 드레스를 선보일 테니까요!”
아쉽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조안나가 검붉은 공작 드레스를 들고 손을 내저었다.
“안녕, 조안나.”
레온은 다시 여인이 되어 의상실을 나섰다.
7년 만에 본모습을 되찾은 채였다.
***
“그만들 좀 힐끔거려!”
참다 참다 레온이 휙, 에일 잔을 내려두며 일행들에게 소리 질렀다.
순간 요릿집 한구석에 모여 있던 일행들에게 시선이 쏠렸다.
“아, 아가씨! 소리 지르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그러는 케인 경 목소리부터 낮추는 게 좋겠는데요. 이곳 사람들 중 가장 목청이 좋으셔서요.”
“둘 다 시끄러워. 사람들 시선이 아니라 너희가 문제라니까. 왜 자꾸 흘끔거리는 건데?”
“그야….”
케인과 브라운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시선이 가는 미친 외모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공자가 당장 가발을 집어 던질 걸 가장 잘 아는 탓이었다.
“어? 차라리 워렌처럼 고개나 처박고 밥만 먹든가.”
“…큽.”
묵묵히 식사를 하던 워렌이 캑캑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고개는 들지 않은 채 접시에 파묻히고 싶은 사람처럼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이상하냐고.’
워렌은 일행들과 의상실에서 나온 직후부터 전혀 말이 없었다.
저렇게 심하게 굴 만큼 끔찍한 행색인가 싶어 레온은 입맛이 다 떨어질 정도였다.
“아주 셋 다 가지각색으로 사람 속을 불편하게 만들어.”
안 되겠다. 이러다가는 달로스가 아니라 요 앞 광장에도 나서지 못할 것 같았다.
레온이 팔짱을 끼고 일행들을 노려보았다. 고작 머리칼만 길어졌을 뿐인데 당하는 위협마저 상당히 황송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적응이 필요한 단계니까요. 자연스러워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공….”
“또 공주님 소리 하기만 해.”
“예, 왕자님.”
“에이씨.”
확, 한 대 쳐버릴까 보다.
레온이 제 허리춤에 숨겨놓은 푸른 검을 만지작거렸다.
“흠, 흠흠. 아무튼 내일 새벽 달로스로 가는 배를 타기 전까지는 좀 경계하는 게 좋겠습니다.”
케인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천지 분간 못 하고 흘끔거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 머리통을 깨부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제가 바짝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어서 식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어. 난 더 안 먹을래.”
레온이 케인에게 답했다.
브라운과 메리도 식사를 마무리했다. 반도 채 먹지 못했지만 지금은 식사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워… 아니, 동생아. 너도 다 먹었니?”
레온의 뻣뻣한 물음이 워렌에게 향했다.
워렌은 순간 컥, 부드러운 음식이 목에 걸리는 체험을 해야만 했다.
“…다, 다 먹었습니다.”
아니래도 더 이상은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일어나자.”
레온이 질질 끌리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어색하게 일어섰다.
브라운은 레온이 일어나기 무섭게 의자를 치워주었다.
걷는 것도 불편하고 일행들의 대접은 더욱 끔찍했다.
레온이 서둘러 자리를 정돈하고 요릿집을 나섰다.
작은 항구 마을에서 돌아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녀석이 혼자 오래 있었으니 빨리 가보는 게 좋겠네요.”
메리가 다 먹지 않은 생선과 고기를 챙겨들었다.
홀로 여관 안에 갇혀 있는 새끼 짐승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 문짝이나 안 뜯었으면 다행이지.”
새끼 스노우 울프를 안고 돌아다닌다면 삽시간에 소문이 퍼지고도 남게 된다.
하는 수 없이 여관에 떼어놓고 오다 보니 레온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녀석 성격에 얌전히 침대에서 털을 손질하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걱정이네요. 지금이야 숨길 수 있겠지만 달로스까지 가는 배편에서는 또 문제니까요.”
브라운의 걱정이 깊어졌다.
모두의 신원은 확보했지만 갑자기 생긴 북부 짐승까지는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 탓이다.
“그냥 고양이라고 우기면 되지 않을까요?”
여관으로 향하며 케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길거리 어디를 돌아다녀도 고양이는 흔하게 보이니, 그 정도로 둘러대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큰 고양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벌써 성체 고양이의 크기는 벗어난 듯싶은데.”
“어디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 고양이 전부를 다 알겠어요? 적당히 둘러대면 된다니까요.”
“애초에 종이 다른 것처럼 외관이 확연이 다르니 문제죠.”
“우리가 우기면 상관없습니다! 남들 생각 알 게 뭐예요.”
“글쎄 소문이란 게 무서운 거라니까요?”
브라운과 케인이 열띠게 토론을 이었다.
이쪽은 북부 밖을 벗어난 적 없는 녀석이 먼 뱃길을 버틸 수 있을지가 걱정인데, 저쪽에선 저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
“도련… 아니, 아가씨께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가?”
“녀석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를요. 고양이가 좋을지… 그도 아니라면 스노우 울프라고 해야 할지.”
세상에 그 난폭한 스노우 울프를 데리고 다닐 무리는 많지 않다. 아니, 어쩌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하니 정체를 숨기는 게 가장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설명을 할 필요가 뭐 있어.”
레온은 그보다 좋은 답을 찾아냈다.
“우린 그냥 부르면 돼.”
이건 아주 오래도록 고민한 문제였다.
“부르다니요, 아가씨?”
실랑이하던 케인과 브라운도, 또 주변을 살피며 경계하던 워렌도 메리의 물음에 레온을 돌아봤다.
“벨.”
누군가가 묻는다면 알려줄 만한 가장 당연한 것.
“벨이라고 알려줘. 그게 녀석의 이름이니까.”
무엇으로 정해줘야 할지 한참이나 고민하게 만들었던 그 이름.
레온이 오래도록 고심한 새끼 스노우 울프의 이름을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