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13장. 새로운 곳으로(5)
“벨, 우리 왔다.”
레온이 여관 문을 열어젖혔다.
침대 아래 몸을 숨기고 꼬리만 툭툭 쳐대던 녀석이 익숙한 목소리에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냈다.
“벨, 밥 먹을래?”
레온이 챙겨온 음식을 녀석에게 내밀었다.
작은 스노우 울프가 귀를 쫑긋거리며 레온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리고.
으르르르릉!
녀석이 온몸을 부풀리며 레온을 향해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발치에 달려들어 치맛자락을 물어뜯기까지 했다.
“이 바보 자식.”
레온이 겨우 녀석을 떼어놓고 옷을 정돈했다.
뒤따라온 일행들도 벨의 이름을 불러주며 한 사람씩 인사했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겠죠?”
벨에게 이름이 생긴 걸 가장 좋아한 건 역시 메리였다.
그녀가 레온의 곁에서 미소 지으며 긴가민가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 벨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응, 우리 모두 새로움에 한참 적응해야 할 거야.”
그래도 다행인 건 홀로 버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메리가 생각에 빠진 레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왜 벨이라고 지으셨어요?”
냉랭한 공자가 지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꽤나 고전적인 이름이었다.
일행들도 까부는 벨에게서 시선을 떼고 레온을 바라봤다.
뜻 없이 단순히 이름을 지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글쎄.”
오래도록 고민했으나 모두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 그것뿐이라서.”
“예?”
그건 오래전 바닷속에 가라앉은 한 인어의 이름이었다.
태어나며 가장 먼저 손에 쥔 모든 것을 내려두고 바다의 주인이 되어야만 했던.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녀석에게 줄 수 있는 건 인어 시절 제가 갖고 있던 이름뿐이었다.
레온이 재빨리 오래된 이야기를 털어냈다.
“그냥 여자애 이름으로는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났어.”
레온이 턱으로 벨을 가리켰다.
브라운이 들고 있던 컵을 떨어트렸다. 지금 뭐라고?
“여, 여자애요?”
“벨이 암놈이었단 말씀이십니까, 공자님?!”
케인도 호들갑을 보탰다.
워렌은 제 발치에서 털을 고르는 벨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무엇을 찾아내려는 건지 한껏 심각한 표정이었다.
“응, 몰랐어?”
벨이 눈을 감고 앞발을 열심히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주 고고한 모습이었다.
“벨은 여자애야.”
레온이 손을 뻗었다.
벨의 까만 코를 짓누르자 녀석이 잇몸을 드러내고 레온의 손을 앙앙, 깨물기 시작했다.
“아주 성질 나쁜 아가씨라고.”
낯선 모습에 잠시 당황했지만 코 끝에 묻어나는 익숙한 냄새는 레온의 것이었다.
이내 벨이 레온의 손가락에 이마를 비비기 시작했다.
“당연히 수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일행들이 충격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였다.
쾅쾅쾅!
아무도 찾아올 리 없어야 하는 나무문이 작은 부스러기를 떨어뜨리며 진동했다.
“…….”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입가에 드리운 미소를 거두었다.
“아르테미스!”
그리고 절대 불려서는 안 되는 이름을 찾는 이가 있었다.
“아르테미스 잭! 그대, 안에 있소?”
***
찾아온 이는 잭 가문과 친밀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동북부의 우딘 가문 차남이었다.
그의 이름은 사이먼으로 20년 전, 가문으로부터 이미 추방당한 처지였다.
“추방이 됐다고? 어쩌다가?”
“자세한 소문은 집안에서 쉬쉬한 탓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브라운은 그런 조심스러운 치부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훈육이 전혀 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훈육?”
“예, 우딘 가문의 장남은 아주 어려서 목숨을 잃었는데. 사실상 가문을 이끌어가야 할 차남의 상태가 썩 좋지 않으니 어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죠.”
결국 그들은 사이먼을 먼 친척집에 양아들로 보낸 후 새로운 양자를 들여 가문의 기둥으로 세웠다.
그 후 친척집을 전전하던 사이먼이 여기저기서 꽤나 큰 사고를 치고 다녔다는 것으로 강렬한 소개는 마무리됐다.
‘한마디로 정신이 돌아버린 놈이란 소리구나.’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십 년도 더 된 인연을 들먹거리는 게 영 이상하다 싶긴 했어.”
“예, 보통 교육을 받고 자란 자제들이라면 결코 그런 결례는 범하지 않겠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특별한 목적은 없어보였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 얼굴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하긴 했습니다만.”
“그러니까 이상하다니까. 오랜만에 만나는데 얼굴을 보여 달라는 게 수상하잖아.”
“뭐, 그나마 다행이죠. 아르테미스 아가씨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으니.”
사이먼은 아르테미스를 궁금해했지만, 그가 레온의 얼굴을 알아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름 있는 가문에서 으레 그렇듯 남녀 사이에 친분을 쌓는 건 금기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의상실에 들렀다가 이름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브라운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여관 주인으로부터 사이먼의 만남 요구를 전해 받았지만 거절을 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우린 어차피 새벽이면 이곳을 떠나는데요.”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사이 케인이 단호히 선을 그었다.
애초에 진짜 아는 사이도 아닌 데다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자를 만나줘야 할 의무 따위도 없다.
“우리는 곧 있으면 이곳을 떠날 텐데, 놈에게 대꾸해줄 필요가 뭐 있겠어요.”
“흠, 그런가요? 뭐, 괜한 부스럼을 만들 바엔 그것도 괜찮은 방법 같습니다.”
애초에 사이먼은 가문으로부터 추방당했으니 대우해야 할 존재도 아니었다.
“그럼 결론은 나왔네. 미친놈이니 그냥 무시하자.”
레온도 이 꼴로 누군지도 모르는 자식을 만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비록 새벽녘에 배를 타기 위해 가는 길이 좀 걱정되긴 하지만, 모자와 로브로 모습을 감춘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말을 조심하는 게 좋겠어.”
“예, 공자님.”
“그 호칭도 더 조심하고.”
“신경 쓰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군가가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니.
레온이 불안한 듯 창밖을 바라봤다.
***
오후 내내 여관 주변을 서성거렸지만 늙은 주인에게 들을 수 있는 답변은 없었다.
사이먼은 끝내 여관의 모든 불이 꺼지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이런 제길.”
어째서 만나주지 않는지 사이먼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잭 가문과 우딘 가문은 오래도록 친분을 쌓아온 사이였다.
그곳의 일원으로서 이름을 이어받은 자가 이 먼 곳에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좀처럼 저택 밖으로는 나오지도 못했을 텐데.”
게다가 아르테미스는 유독 활동이 없기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성년을 맞이한 지 거의 십오 년이 다 되어가니 그 나이 먹도록 혼처도 구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노릇이긴 했다.
그러니 더더욱 사이먼은 아르테미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만나 주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무시하다니?
“어쩌면 이게 아버지에게 잘 보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담벼락 아래서 연속으로 연초를 피워대던 사이먼이 구둣발로 연기를 꺼뜨렸다.
흘끔, 위쪽을 바라보자 넓지 않은 여관의 창문이 보인다.
“저곳 어딘가에 아르테미스가 있을 텐데.”
그녀가 어째서 이 먼 북부 땅까지 와있는지는 모르겠다.
배를 타기 위함인가? 그렇다면 어디로 가려는 건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불쌍한 아르테미스가 여태껏 바깥출입도 제대로 못 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사는 삶을 뿌리치고 이곳까지 왔다는 데 있다.
‘아르테미스도 더 이상은 억압된 삶을 살고 싶지 않을 거야.’
20년 전, 퇴출당한 자신 때문에 혼처를 잃게 된 그녀가 여태껏 홀로 살고 있는 건 정혼자였던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쩌면 날 보기 위해 여기 왔을지도 몰라.”
사이먼이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해대며 손을 비볐다.
잭 가문과 다시 인연이 이어지도록 돕는다면,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먼 땅에서 아르테미스란 이름을 듣게 된 건 정말 운명적인 일이었으니까.
“지금은 좀 토라졌겠지만 나를 직접 본다면 마음이 금세 풀리겠지.”
기껏해야 혼처로 몇 번 거론된 게 전부인 주제에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다.
하지만 사이먼의 확신을 막기엔 주변이 너무 고요했다.
지나가는 사람도, 그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빼앗을 만한 화젯거리도 전혀 없었다.
“찾아가야겠어.”
사이먼이 발치에 나뒹구는 제 흔적을 아무렇게나 치우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여관 안.
“어디가 불편하세요, 도련님?”
메리가 건너편 침대에서 뒤척거리는 레온에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 품에 안겨 있던 벨이 냉큼 침대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금세 허전해지는 품을 느끼며 메리가 레온의 답변을 기다렸다.
“…글쎄, 피곤한데 잠이 안 오네.”
“오늘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따뜻한 우유라도 좀 드시겠어요?”
누울 때마다 걸리적거리는 긴 머리칼도 그렇고, 다리 사이에 엉겨 붙는 묵직한 치맛자락도 불편했다.
레온이 고심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가 기다렸다는 듯 작은 초를 들고 방을 나섰다.
“벨, 언제까지 삐쳐 있을 거야?”
녀석은 모두에게 토라져 있었다.
일행들이 북슬북슬한 털 안에 숨겨져 있는 성별을 가늠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자로 태어났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도 있다.
물론, 살다보니 다시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입는 삶이 오게 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응?”
대꾸도 없다.
“됐다. 잠이나 자자.”
레온이 다시 벌렁,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어쨌든 곁엔 제 비밀을 이미 알고 있는 메리와 케인이 있고, 무슨 일이든 제 편이 되어줄 워렌도 있었다.
문제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브라운이지만, 그가 언젠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제게서 등 돌리는 일 따윈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일에 집중하자고, 레온 몬데이어.’
지금은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보다 더 집중해야 할 일이 있었다.
데로니스 녀석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북부를 뒤지고 불의 군단을 모두 무너뜨리기 전에 반드시 다이아 스틸을 다룰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검은 사냥개 놈들과 함께 전부 불태워 버릴 거야.’
데로니스 놈들 중 누가 검은 사냥개고, 그들이 얼마만큼 그 세력과 엮여 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들 전부가 같은 세력일지도.
아니더라도 그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다.
‘…폰네시는 이제 사라졌어.’
레온은 어딘가에 비친 제 눈동자를 볼 때마다 루시오를 떠올렸다.
아무 상관없는 이라 칭하기엔 모든 것을 주고 떠난 제 아버지가 문뜩문뜩 떠올랐다.
“…….”
덜컥.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메리가 온 거겠지.
레온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모로 누워 침대 아래 슬쩍 보이는 흰색 털 뭉치를 눈에 담았다.
어쩌면 따뜻하게 데운 우유가 소용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레온은 푹신한 베개에 파묻히는 순간, 잠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아르테미스.”
그 순간 소름 끼치는 낯선 이의 목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