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80화 (80/133)

80화

13장. 새로운 곳으로(6)

메리의 것과는 다른 묵직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레온이 번쩍 눈을 떴다.

갑작스레 나타난 낯선 이가 누워 있는 레온을 보곤 손쓸 새도 없이 다가왔다.

“아르테미스! 당신, 아르테미스가 맞소?”

사이먼이 레온의 어깨를 짓눌렀다.

은은한 불빛 하나만을 두고서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사이먼은 희열로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을 느꼈다.

‘이 자식 뭐야?’

레온의 푸른 눈동자가 사이먼을 아래위로 훑었다.

낯선 존재였지만 어떤 무뢰한이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지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미친놈이. 당장 꺼지지 못해?”

레온이 거세게 몸을 뒤틀었다.

짓누르는 사이먼의 팔을 풀기 위해 있는 힘껏 뿌리쳐 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르테미스! 놀랐겠지만 이렇게 저항할 필요 없소. 나는 사이먼이오. 기억이 안 납니까?”

기억은 개뿔.

설령 아는 사이라 하더라도 한밤중에 허락도 없이 이런 식으로 마주한 만남을 반길 이는 없었다.

레온이 가까이 다가오는 사이먼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치맛자락이 몹시 거슬렸다.

‘젠장! 검도 지금 없는데.’

워렌이 절대 몸에서 떼어놓지 말라 했을 때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이번만큼 푸른 검이 간절한 적은 없었다.

레온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이먼에게 으름장을 놨다.

“내 주변엔 나를 지키는 사람밖에 없어. 지금 놓지 않으면 후회를 맛보게 될 거야.”

“나 역시 당신을 지키는 사람이오. 이 먼 북부에서 서약을 지키기 위해 기다려 왔으니까.”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사이먼은 이제 완전히 제가 생각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르테미스와 자신은 오래도록 사랑한 사이이고, 어린 시절 약속한 혼인 서약을 깨지 않기 위해 그녀가 고난과 역경을 뚫고 이곳까지 자신을 찾아왔다는 설정이었다.

“웬만한 정신 나간 놈이 아니네.”

“당신처럼 아름다운 이를 사랑하는 일은 온 정신을 다해도 모자랄 만한 일이긴 합….”

“당장 그 생각 없는 주둥이 그만 놀려라, 너.”

“오, 아르테미스.”

사이먼이 레온의 발목을 붙잡았다. 더 이상 밀어내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그 손길에 레온이 소리를 질렀다.

“워렌!”

호명과 동시에 문짝이 날아갔다.

침대 아래서 기회를 노리던 벨도 지체 없이 사이먼의 목 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으, 으윽! 왜, 왜 이러시오!”

곧장 사이먼이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놈의 가슴팍에 당당히 올라선 벨이 잇몸을 드러내며 얼어붙은 피 속에 머무르는 살기를 전부 끌어 올렸다.

끄르르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목숨을 노리는 위협이 이어졌다.

그건 도망갈 수 없는 극한의 두려움을 마주한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벨.”

워렌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벨이 몸을 돌렸다. 두 존재의 살기가 공간을 무겁게 짓눌렀다.

“…제, 제발….”

사이먼이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다. 목숨이 이만큼 가치 없었던 적도 없다.

구걸도 못 할 만큼 두려운 존재를 보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죽고 싶게 만들어주지.”

레온을 놀라게 한 죗값은 충분히 돌려받을 것이다.

사이먼의 턱 끝엔 어느새 워렌의 검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방 안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사이먼이 상황을 파악하고 후회하는 소리였다.

“우려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닙니다.”

일행은 사이먼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놈을 격리시켜 두고 모두가 다시 레온의 침실 앞에 모였다.

“도대체 무슨 걱정을 하시는 건데요, 부집사님? 일단 좀 패버리고 이야기 나누면 안 될까요?”

“있어보세요, 케인.”

케인이 두 눈을 부릅뜨며 열불을 냈다.

자고 있는 동안 파렴치한이 레온에게 달려들었으니 손끝이 간질간질한 탓에 도저히 맨 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저 역시 당장 저놈을 찢어 죽이고 길거리의 갈매기 밥으로 던져주고 싶지만, 일을 크게 만들기엔 우리 처지가 좀 걸리거든요.”

“놈은 어차피 가문에서 추방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저놈 곁에 우딘 가문의 눈길이 없을 거란 보장이 있나요?”

분노에 불타 앞뒤 생각 않고 움직일 만한 일이 아니었다.

“죽이고 아무도 모르게 처리한다면 문제없지 않겠나, 부집사?”

“워렌 경까지 대체 왜 그러세요? 좀 다들 진정하세요.”

케인이야 그렇다 쳐도 워렌까지 놈을 죽일 기세니 곤란한 건 브라운뿐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레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저 자식이 죽고 그 일로 우딘 가문과 잭 가문 사이에 문제가 커진다면 결국 신분을 빌린 우리에게도 좋을 게 없어.”

어쨌든 사건 사고 없이 조용히 이곳을 벗어나 달로스를 거쳐 동대륙까지 가는 게 이번 여정의 최종 목적이었다.

초입부터 괜한 소란으로 문제를 키울 필요가 전혀 없었다.

“맞습니다. 우리야 잠시 잭 가문의 일원이 된 거지만, 실제 아르테미스 아가씨는 어쩌면 평생 추문에 얽혀들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그래, 저 새끼가 아르테미스의 덕을 보는군.”

이름만 겨우 아는 존재에게 그런 위험을 감당하게 할 순 없었다.

레온이 고개를 저었다. 케인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많이 놀라긴 했지만….’

레온은 조금 전 일어났던 일로 아직까지 가슴이 쿵쿵거렸다.

당하고도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분노 때문이기도 했지만, 놈이 붙잡는 손길이 자꾸만 발치에서 느껴지는 탓도 있었다.

레온이 께름칙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물었다.

“브라운, 근데 나 저 자식 한 대만 때려도 돼?”

아주 세게 한 대 정도만 패버리고 나면 마음이 풀릴 것도 같았다.

“안 됩니다.”

하나 아주 단호한 반대가 터져 나왔다.

브라운이 아닌 워렌에게서였다.

“안 된다고? 왜? 때리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이 주먹으로 패봤자 저놈 머리통엔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레온이 입을 부루퉁 내밀고 워렌을 바라봤다.

워렌은 표정 없는 얼굴로 단호히 고개 저었다.

“녀석이 다음번에 또 실수한다면 살려둘 자신이 없습니다.”

“뭐?”

“지금도 간신히 참고 있습니다.”

레온이 녀석의 근처에 가는 것조차 싫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헛소리를 지껄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역했다.

워렌의 감정적인 모습에 레온은 대답할 말을 찾느라 머리를 굴려야 했다.

설득이 통할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 그보다 내가 왜 이놈한테 설득을 하려는 거야.

‘그냥 명령이나 하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레온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일행들에게 이제 명령만 내릴 수 있는 일반적인 관계는 물 건너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탓이었다.

“그래요, 공자님. 놈은 제가 잘 내보낼 테니 더는 엮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괜히 얼굴 한 번 더 마주해 봤자 이득이 전혀 없었다.

브라운이 상황을 정리하고 케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저희는 놈을 내보낼 테니 워렌 경께선 공자님과 유모님 곁을 지키세요.”

“그러도록 하지.”

“쳇, 딱 한 대만 후려갈기고 싶었는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검으로 목을 베는 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래, 검도 생겼겠다 이제 정말 배워야겠어.”

달로스까지 가는 길은 멀다.

그동안 기본기라도 익혀둔다면 오늘 같은 상황에서 고작 발길질로 끝나는 일은 없겠지.

레온이 아쉬움에 툴툴거리면서도 얌전히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케인과 브라운이 방을 나섰다.

건너편으로 향하자 곧 질식할 것 같은 안색의 사이먼이 울상을 짓고 있었다.

어찌나 꽉 묶었는지 안색이 시체와 비슷했다.

“사… 살려주시오.”

그 소리에 케인이 콧방귀를 뀌어댔다. 쳐들어올 땐 이런 걱정이 없었던 걸까?

필요할 때만 선택적으로 불쌍한 척하는 놈의 코를 납작 깨부수고 싶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왔으니 닥치시오.”

“흠, 흠흠.”

브라운이 케인의 옆구릴 찔렀다. 괜한 대화로 경계를 풀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케인이 입을 삐죽 내밀고 꽁꽁 묶어둔 밧줄을 도로 풀어주었다.

“…정말 미안하게 됐소. 잭 가문의 식솔들이라 했으니 들었겠지만… 내가 이래저래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오.”

20년 전 추방당했으니 잭 가문에 누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브라운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사이먼을 살폈다.

“어려서부터 내 방에서 이상한 것을 자주 보았는데… 아무튼 나도 내 병이 불편하고 힘겹다오. 날 불쌍하게 생각해 주시겠소?”

생각에 사로잡히면 과도하게 그 망상에 열중하게 되고, 결국엔 그 사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조차 스스로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사이먼이 드디어 피가 통하는 제 손끝을 쥐었다 펴며 힘겹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테미스를 기껏 만났는데… 이런 추악한 모습으로 기억에 남게 될 걸 생각하니 정말 끔찍하군.”

어쩌면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 세월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여인이었다.

이토록 아름답다는 소문은 들은 적 없지만, 마음에 흠집을 낸 건 아닐까 싶어 사이먼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일말의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다면 서둘러 이곳을 떠나 주십시오.”

“내 직접 만나 사과하고 떠날 순 없겠소? 그런 기회를 준다면 평생의 은혜로….”

“아가씨께선 누구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어림도 없다.

브라운의 단호한 대답에 사이먼이 잠시간 입을 벌렸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냉랭한 표정을 보아하니 축객령이 틀림없다.

“이만 가보겠소….”

사이먼이 천천히 어깨를 늘어뜨리고 계단을 밟아 내리기 시작했다. 오래 묶여 있던 탓에 걷기가 힘들었다.

“…….”

그래도 혹 아르테미스가 어디선가 날 지켜보고 있진 않을까?

사이먼이 내려가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선 날 선 눈빛이 여전했다.

케인이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갑니다! 간다고.”

결국 쫓겨나듯 여관을 벗어나야만 했다.

사이먼이 어둠이 내려앉은 바깥에서 다시 한번 레온이 있을 창가를 빤히 바라봤다.

“…….”

축 처졌던 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불쌍한 척 늘어뜨렸던 눈썹 역시 본래의 상태로 뒤틀렸다.

‘이상하단 말이지.’

저들은 잭 가문 사람들이 아니다.

아니, 아르테미스는 맞다 하더라도 그 곁에 있는 남자는 결코 아티쿠스가 아니었다.

“내가 그놈을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줄줄이 태어난 잭 가문 네 명의 여인들이라면 모를까, 아티쿠스는 모를 수가 없다.

형제 없이 지낸 아티쿠스는 아주 어려서부터 우딘 가문의 형제들과 함께 자라왔다.

쫓겨나기 전, 분명 몇 해나 함께 지냈기에 녀석과는 알고 지낸 사이라 말할 수 있었다.

아무리 20년의 시간이 지났다 하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는 아티쿠스가 아니었다.

“아르테미스는 왜 저놈들과 함께 있는 거지?”

어쩌면… 아르테미스가 납치당한 것은 아닐까?

순간 사이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오늘 이곳에 머무르는 거라면 내일 달로스로 떠나는 거겠지.”

곧 있으면 새벽빛이 밝아온다.

뉴홉 항만에 여러 대의 배가 마련되고,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은 그 배를 나눠 타고 달로스로 향할 것이다.

“분명… 워렌이라고 했지?”

아직도 아름다운 아르테미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떠올리며 사이먼이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빼앗길 수 없다. 사랑하는 여인을 도로 되찾을 것이다.

“우딘 가문의 명예를 걸고.”

사이먼이 어두운 밤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어쩌면 다시 가문으로 돌아갈 수 있을 만한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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