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14장. 움직임(1)
길라 동부 연안 내부엔 해풍에 강한 울창한 숲이 형성돼 있다.
새하얀 산호 부스러기와도 잘 어우러지는 진한 녹음 일부는 영지민들에게는 개방되지 않은, 오직 크루네 백작가만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놈들도 피스 포레스트까지 밀고 들어오지는 못할 겁니다. 어쨌든 아버지가 데로니스 녀석들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니까요.”
피타가 헤리스의 짐까지 모두 들고 조심조심 거대한 열대 식물 이파리를 꺾기 시작했다.
헤리스는 그 뒤를 따라 우거진 숲속 안으로 들어섰다.
문자 그대로 이곳 숲속에선 평화가 느껴졌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바람이 풀을 가르는 소리만 귓가에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여기는 나밖에 모르는 곳이기도 하고요.”
말을 마친 피타가 뒤돌았다.
의기양양한 그 표정에 헤리스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몇 번이나 주변을 살폈다.
여기에 뭐가 있다는 거지?
영 갈피도 못 잡는 모습에 피타가 깔깔거리며 손을 뻗었다.
적어도 몇 백 년은 되어 보이는 나무를 밀어내자 그 안에서 근사한 오두막이 드러났다.
“맙소사….”
대단한 크기를 자랑하는 나무 전체가 오두막이었다.
헤리스가 입을 떡 벌리고 놀라워했다.
숲속에 이런 아지트를 만들어뒀을 줄이야.
“어렸을 때는 저도 저만의 성을 갖고 싶었거든요.”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군그래.”
“여기는 아무도 모르니 안심하세요. 하룻밤 묵었다 가기엔 전혀 무리가 없을 겁니다.”
하루가 아니라 며칠을 묵는다 하더라도 부족할 게 전혀 없을 정도였다.
헤리스가 입맛을 다셨다. 위급한 상황만 아니었다면 평화로운 이곳에 더 머무르고 싶었을 것이다.
“먹을 것 좀 있나?”
먼 길을 달려오는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었을 리 없다.
헤리스가 검을 손질하며 물었다. 당장 다친 다리를 돌보는 것보다 우선할 건 검을 다루는 일이었다.
“이런 훌륭한 성에 음식이 없는 건 말도 안 되죠.”
어린 모험가였던 피타는 모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두었다.
소금에 절여 말려둔 새 고기와 바삭한 비스킷 여러 종류가 금세 준비됐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얼마 만에 맛보는 음식인지 벌써부터 군침이 돌았다.
“이처럼 호화로운 밤을 맞이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어쨌든 제 고향이니까요.”
“그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 여기까지겠지.”
“아무래도요.”
밀항을 위해 이곳을 찾았지만 되도록 길라의 영주, 막심 크루네와는 마주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제 길라 땅엔 데로니스 녀석들이 너무 많다.
그들의 눈길을 피해 영원한 비밀을 만드는 일이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나저나, 길라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겠군.”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친 헤리스가 은근히 피타에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 웃음기 어려 있던 피타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흠, 역시 설명해줄 수는 없는 건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하고 있긴 하지만, 서로를 신뢰할 만큼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표면적으론 두 사람 모두 폰네시의 주적이었다.
미주알고주알 계획과 작전에 대해 떠들어 대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글쎄요.”
피타가 새 고기를 내려놓고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를 작전이라 아직 공유할 만한 단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럴 테지.”
“경의 넓은 혜안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그때 의견을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훈훈했던 분위기가 금세 내려앉았다. 입가에 남아 있는 고기 맛도 어째 전과 달랐다.
‘레온이 레브란 사실은 숨기는 게 좋겠지.’
모든 걸 걸고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는 만큼 피타와 헤리스는 각자 꺼내놓을 수 없는 비밀을 삼킨 채 손을 맞잡고 있었다.
등 뒤에 서로 무엇을 쥐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게 서로를 해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 무엇보다 우선할 건 레온을 찾는 일입니다.”
“그래, 가장 중요한 건 그것뿐이지.”
자갈 사이에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두 사람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때였다.
헤리스가 곧장 검을 들어 불길을 꺼뜨렸다.
어디 다친 사람이라곤 생각하기도 힘들 만큼 아주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경? 무, 무슨 일입니까?”
“쉿, 누군가가 와!”
헤리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몸은 두터운 나무 내부에 있었지만, 눈과 귀는 이미 바깥에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척으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느릿하고 묵직한 발걸음이 다가오는 순간도, 그가 손을 뻗어 이곳을 더듬거리고 있다는 것도.
헤리스가 막을 새도 없이 공격 자세를 취할 때였다.
“아, 안 됩니다!”
헤리스가 검을 내뻗기 직전 피타가 열리는 문을 가로막았다.
내려치는 검 끝에 피타의 밝은 머리칼이 흩날렸다. 이런 무모한 짓을 하다니.
그가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피타를 밀쳐냈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어쩌려고 이런 짓을 해!”
대체 문밖에 누가 있는 줄 알고 앞을 가로막는단 말인가.
헤리스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피스 포레스트에 뒤뚱거리며 서성이는 인영 하나가 지레 겁을 먹고 주저앉았다.
“어! 어어! 으!”
헤리스가 재빠르게 달려들어 그 멱살을 잡아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가 발작하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귀를 막고 두 눈을 꾹 감아 달달 떨어대는 걸 피타가 달려가 끌어안았다.
“제가 아는 사람입니다. 부디 검을 내려주세요, 헤리스 경!”
“뭐? 아는 사람이라고?”
“정말 미안해요. 미리 설명했어야 하는데.”
늙은 노인이 말도 하지 못하고 코를 훌쩍거렸다.
그 짧은 새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엔 땀과 눈물이 뒤섞여 마른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지만 어째 나쁜 짓을 한 기분이다.
헤리스가 단숨에 검을 정돈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멱살을 쥐고 있던 주먹이 얼얼할 정도였다.
“이쪽은 카터 할아범이에요. 숲 지킴이고요.”
난리 통에 피타가 낯선 이를 소개했다.
“으! 으으으!”
“아무 말도 못 하는 사람이라 내가 부탁했죠. 이 오두막을 혼자 관리하기는 좀 벅차서.”
“허, 참나.”
헤리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할아범을 살폈다.
첫 만남의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큰 변화 없이 늘 평온한 카터 할아범의 표정이 몹시 나빴다.
“자자, 일단 들어갑시다. 보는 눈은 항상 조심해야 하잖아요?”
피타가 너스레를 떨며 두 사람을 나무 안으로 밀어 넣었다.
금세 바깥과 단절되고 안락한 나무 향기가 사람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어느 틈에 이자를 불러들인 거야? 분명 오는 내내 나와 함께 있었는데.”
“우리 발소리를 들었을 거예요. 할아범은 피스 포레스트 땅굴 안에 살거든요.”
“땅굴이라고?”
마음이 좀 풀렸는지 카터 할아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대단한 규모는 아니지만요.”
영주의 영역인 피스 포레스트를 멋대로 돌아다니려면 눈에 띄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단단하게 얽힌 나무뿌리 밑을 돌아다니는 건 피타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모험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건가?”
“예, 말을 못 하니까 아무도 찾지 않죠. 나만 빼고.”
오래전 사고로 말을 못 하게 된 뒤 할아범은 나무 가꾸는 일도 함께 잃어야만 했다.
어린 피타의 눈엔 그게 안쓰러웠다. 쫓겨나거나 꾸지람을 듣지는 않았지만, 평생 해오던 일을 못 하게 됐으니 너무 가혹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할아범에게 수신호를 알려 줬습니다. 우리 둘만 알 수 있는 걸로요.”
그 뒤부터 카터 할아범은 피타의 새로운 눈과 귀가 되어줬다.
멋진 오두막을 선물 받은 것 역시 그에 대한 보답이었다.
“근데 할아범, 여긴 왜 온 거야? 아무 이유도 없이 찾아올 사람이 아니잖아.”
카터 할아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두드렸다.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뭔데?”
그가 곧이어 하나하나 집중해서 피타에게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헤리스는 그가 나무 바깥 길라의 영주성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는 것 정도만 눈치챌 수 있었다.
“북쪽, 병이… 끝?”
“우! 으으!”
“시체병이 끝났다고? 사실이야, 할아범?”
그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에 대한 소문은 동부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화젯거리였다.
혹한이 물러가는 시기라 자연스럽게 병이 가라앉은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아주 빠른 속도로 퍼진 것과 달리, 이번 시체병은 순식간에 사그러들었다.
항간에서는 데로니스가 북부를 통제하기 위해 일부러 전염병을 퍼뜨린 게 아니냐는 억측까지 난무할 정도였다.
“어! 으으!”
다만 아직 할 말이 많았다.
카터 할아범이 다시 한번 피타를 향해 열심히 손짓 발짓을 하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피타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적이 움직여? 어디에. …중앙?”
할아범이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켜보던 헤리스가 벌떡 일어났다.
적과 관련된 정보는 중요하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지금 가장 필요했고 말이다.
“데로니스가 각 영지의 영주들과 귀족들을 소집한 모양인데요.”
“예견된 일이지. 폰네시의 영주 자리가 비었으니까.”
“당분간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내 살아생전에 그 땅의 주인이 바뀌는 꼴을 보게 되다니.”
현재 임시 사령관이 폰네시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데로니스의 심복일 뿐이다.
이 서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선 데로니스도 충성을 맹세한 영주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주인이 되길 자처하는 이들 중 과연 누구에게 폰네시를 쥐어줄지.
그 대단한 하일 데로니스도 머리가 꽤나 아플 문제였다.
“우린 이 틈에 서둘러서 공자님을 찾아내는 게 좋겠어.”
두 사람 사이에 이견은 없었다.
그리 유쾌한 현실은 아니었지만 데로니스 세력이 주춤할 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터.
“곧 있으면 놈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질 테니 그때를 노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경?”
“출발 자체를 미루자는 건가?”
“예, 어차피 보는 눈이 많은 이상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순 없어요. 기왕 지체될 거라면 경계가 한산할 때 움직이는 게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수월해질 거라는 확신이 없는 상황이니….”
두 사람이 밀항 계획을 다시 점검하고 있을 때, 카터 할아범이 피타의 옷자락을 쥐었다.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였다.
“으으, 으으!”
그가 끈질기게 피타를 향해 설명했다. 오래전 만들어둔 수신호라 그 말을 이해하려면 피타도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그의 손이 하늘을 가리켰다. 헤리스가 그 끝을 따라 오두막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런.”
피타가 사색이 되어 탄식했다.
“무슨 뜻이지, 피타? 왜 그러는 거야.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이거야말로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모르겠습니다.”
카터 할아범이 두 사람을 초조한 표정으로 번갈아 살폈다.
피타가 은은한 불빛마저 피로한 듯 큰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폰네시의 병사가 붙잡혀 왔다는군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바로 이곳, 우리 길라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