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14장. 움직임(2)
헤리스의 기억 속 폰네시의 마지막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사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적군의 수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고, 그들이 피워낸 불길은 지옥을 방불케 했다.
굳건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석벽의 성은 너무도 쉽게 데로니스 앞에 무너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건 내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야. 난 우리 병사들에게 가봐야겠어.”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먼저 잃은 건 폰네시의 병사들이다.
“난… 그들에게 죄를 지었어.”
헤리스는 레온의 비밀과 오랜 친구의 부탁을 지키기 위해 기사단과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그들이 적군을 막아내기 위해 뛰는 순간에도 기사단장 헤리스 타린은 궁성 내부로 달려가고 있던 것이다.
“병사들이 내 앞에서 목숨을 잃었어. 피를 토하고 날아오는 바위에 맞아 머리가 터져나갔지.”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아직도 까끌까끌하게 목을 괴롭히고 있었다.
결국 그 죄책감이 목을 졸라 제 숨통을 쥐어댈 것이다.
헤리스가 고통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병사들을 구하러 가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걸 들키는 순간,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사정은 딱하지만 이 전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피타가 초조한 표정으로 설득에 나섰다.
“그래, 레온 공자님을 찾아야 한다는 유일한 목표이자 공동의 목적이 한순간 어그러지겠지.”
“모든 걸 알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겁니까, 경?”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헤리스가 검 하나만을 든 채 일어섰다. 그럼에도 가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느껴졌다.
피타 역시 더는 말릴 수 없음을 직감했다.
“폰네시의 병사들은 전부 목숨을 잃었어.”
들이닥치는 적군의 손속엔 전혀 계산이 없었다.
마치 폰네시의 인구 전부를 죽이고, 새로운 이들로 그곳을 채우려는 것처럼 움직여댔다.
“지금 살아 있는 병사들은 나처럼 겨우 궁성을 빠져나간 자들이거나, 공자님을 따라갔던 무리뿐.”
침묵의 기사들은 명예 있는 자들이었다.
“부끄럽지만 나처럼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병사들은 아마 얼마 없을 걸세.”
“그럼 저들이 레온과 함께였던 병사들일 가능성이 큰 겁니까?”
“그래, 그러니 만나 봐야겠지. 공자님의 행방을 알아내기에 그보다 좋은 기회가 있겠는가, 피타?”
“그런 이유라면….”
말릴 필요가 없다.
피타가 카터 할아범을 바라봤다. 눈치 빠른 그가 재빨리 오두막 문을 열어젖혔다.
“다 커보고는 처음이지만… 숲속 아래로 지나간다면 영주성 근처까지는 무리 없이 이동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군!”
마치 이날을 위해 이 모든 준비를 끝마친 것만 같다.
피타가 호흡을 정돈하고 문밖으로 나섰다.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피스 포레스트는 꼭 태풍의 눈 속처럼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제가 이미 떠난 줄 알겠지만 하는 수 없죠.”
갑작스러운 출발이었지만 두 사람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원래 아들놈들은 제 아비 말을 안 듣는 법이네, 피타.”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던 겁니까?”
“소문? 무슨 소문?”
“친자식이 있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 따위.”
“왜 말이 안 됩니까?”
“그야….”
“설명을 못 하시는데요? …설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앞장이나 서, 피타!”
두 사람이 옥신각신했다.
앞서 걷는 카터 할아범은 왠지 모를 이유로 가슴이 쿵쿵거리는 것을 느꼈다.
***
“자, 다시 한번 설명드리겠어요.”
입이 부르트도록 벌써 세 시간째 떠들고 있는 브라운이 또 미간을 모았다.
듣는 청중의 집중력은 기대 이하지만, 중요한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공자님께선 잭 가문의 넷째 영애 아르테미스 아가씨가 되시는 겁니다.”
“알겠다고. 몇 번을 말해.”
“아가씨께선 올해….”
“서른세 살로 어려서부터 병약해 외부 활동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내게 딱 맞는 적임자라고 했지, 브라운?”
잭 가문의 일대기를 주야장천 설명해 주는 탓에 외우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만나본 적도 없는 아르테미스가 그리울 정도니 말 다 했다.
“예, 맞습니다. 아티쿠스 도련님도 모두 외우셨지요?”
저놈의 도련님 소리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워렌이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잭 가문의 수장인 아르히 잭 후작이 워낙 막내아들을 이리저리 싸고돈 탓에 아티쿠스 역시 미지의 인물이었다.
“불편하시겠지만, 괜한 오해를 만들지 않기 위해 지금부턴 완벽히 공자님을 아가씨로 대할 겁니다.”
처음 만난 그날 제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처럼 브라운의 눈빛이 그랬다.
“그러니 아가씨께서도 더는 불편해하지 마세요.”
브라운의 또렷한 눈빛을 마주한 레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단순한 역할 놀이가 아니다.
이 서대륙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목숨을 노리고 있는 제 신분을 감추기 위한 유일한 방법일 뿐이다.
‘익숙해져야 해.’
평생 밀어내기만 했던 삶에 다시 익숙해지기 위해 레온 또한 수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레온이 묵직한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높지 않은 구두가 더욱 발길을 무겁게 잡아끌었지만 멈춰 서 있을 순 없다.
“가자.”
레온이 일행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이곳부턴 아르테미스 잭의 발걸음이었다.
“일등석을 구해놓긴 했는데 보시다시피 배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라서요.”
신분 검사는 무사히 통과됐다.
하루에도 워낙 많은 이들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책임은 가볍고 확인은 무심할 수밖에 없었다.
“흩어져 있는 것보단 함께 있는 게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아 방은 하나뿐입니다.”
“뭐?!”
재잘거리는 브라운의 목소리에 레온이 홱, 뒤돌아봤다.
가장 앞서 걷던 이가 멈추어 서니 뒤따라오던 일행들도 줄줄이 배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메리는 케인의 등짝에 코를 부딪치기까지 했다.
“죄송해요. 남는 방이 없었거든요.”
달로스까지 이 끔찍한 복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편안하게 씻기도 물 건너갔고.
“우선 들어가세요. 생각보다 불편하시진 않을 거예요.”
브라운이 공손한 태도로 문을 열어주었다.
선체 내부에서 따가운 햇볕과 비바람을 피할 용도로 만들어진 방이지만 조악한 침대도 여럿이었다.
오랜 야영으로 몸에 밴 피로를 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공간이긴 했다.
“그간 설명만 드렸던 검술을 보여드릴 수도 있겠네요.”
워렌이 오래간만에 미소 지었다.
소하를 떠나며 워렌은 줄곧 레온에게 스스로를 지키는 검술에 대해 알려주었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추운 외부에서 걷는 내내 피로가 쌓인 몸으로 동작을 선보이는 건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궁금한 게 많았어.”
메리가 짐을 풀고 벨이 마른 건초더미 위에서 발을 할짝거리는 동안 레온이 푸른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날이 휘는 느낌이야.”
“휘둘러 보셨습니까?”
“뭐… 장식용은 아니잖아?”
워렌이 고개를 저었다.
가벼운 무게라 부담은 없지만 날은 그 어떤 검보다 예리했다. 함부로 휘두르기엔 너무도 위험했다.
“기본자세를 모두 익히기 전까지는 당분간 찌르는 용으로 사용하세요.”
“이걸로 찌르기나 하라고?”
“그것도 상대에겐 충분히 위협적입니다.”
워렌이 레온의 자세를 봐주기 시작했다.
달로스부턴 험난한 여정이 예정돼 있다. 언제 또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을지 모르니 가능한 한 감각을 익히는 게 중요했다.
“그 소식 들으셨나 모르겠군요. 몬데이어 공작가의 후계자께선 태어나 단 한 번도 검술 훈련을 받아보지 않으셨다고요.”
브라운이 남 얘기하듯 두 사람에게 말했다.
“대기사 이렌트께서 결국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영면에 드셨죠. 평생 그처럼 쓸모없는 인간이었던 적은 없다는, 마지막 유언이 일가 모두를 마음 아프게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만.”
“야, 조용히 안 해?”
“아가씨께서 왜 발끈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나 지금 검 들었다?”
“그 정도는 피할 수 있습니다. 모르셨겠지만 저도 기본 검술은 배웠거든요.”
“부집… 아니, 길잡이 네놈이?”
놀라움은 워렌 쪽에서 터져 나왔다. 브라운이 벌떡 일어났다. 뭘 놀라워하는데!
“사람에겐 모두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정해져 있는 법입니다!”
“길잡이 네놈이 검술을 배웠지만 전혀 못하는 것처럼?”
케인이 뒤쪽에서 큭큭거렸다. 참으려 했지만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예, 대신 저는 몸보다 머리를 잘 쓰죠?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탁월하게요.”
제 자랑을 늘어놓으려 입을 연 건 아닐 것이다.
레온이 검을 내리고 브라운을 바라봤다.
대기사 이렌트의 죽음을 들먹거린 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
“아가씨, 본인의 역량 한계를 남과 비교하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께서 하실 수 있는 만큼. 딱 그만큼만 해도 충분합니다.”
곁에 있는 워렌과 케인이 워낙 검을 잘 다루니 그게 쉬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검은 단숨에 후루룩 배워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검을 뻗어낼 것인지, 무슨 마음으로 상대방을 마주할 것인지.
각 가문의 자제들이 어린 시절부터 그 수없는 시간을 들여 종자 노릇을 하는 게 괜한 헛수고가 아니란 소리였다.
“그래, 어쨌든 한계를 알려면 휘둘러 보기는 해야 하는 거니까.”
진심 어린 조언에 레온도 쉬이 브라운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되지 않는 일에 욕심 부리다 다치는 꼴은 유능한 부집사로서 용납하지 못할 터.
레온 역시 제 몸을 지킬 정도의 힘만 얻으면 그만이었다. 아니, 메리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 딱 그 정도까지만.
“그 똑똑한 사람이 검술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는 잘 모르는 모양이군.”
워렌은 공감하지 않았다.
검술에서 배우는 자의 한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가르치는 사람의 역량이 그 한계를 무수히 끌어 올릴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무슨! 아가씨를 어디 기사단에 입단이라도 시키시려는 겁니까?”
“어중간한 것보단 최고가 나을 테니까.”
“그것도 정도가 있죠. 지금 제자 양성이 목적이 아니잖아요.”
“검 뒤에는 항상 심장이 있어. 목숨을 걸고 다루는 일에 정도를 정하는 건 옳지 않아.”
워렌이 천천히 제 검을 내뻗었다.
용의 기운을 담은 두 검이 마주하니 주변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제가 아는 모든 것을 공, 공… 아니….”
“뭐?”
“누… 께 알려 드리, 알려주겠다.”
“뭐라는 거야, 진짜. 말 똑바로 안 할래?”
“…죄송합니다.”
결국 케인이 참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브라운도 배를 붙잡고 통곡에 가까운 곡소리를 내었다.
“검술이 문제가 아니라 말투부터 어떻게 손봐야겠는데, 동생아.”
“…예.”
“괜찮겠어?”
“…아니오.”
워렌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꼭 불타는 구황 작물 같았다.
앞으로 많은 적응이 필요하겠지만, 가장 우선되어야 할 건 호칭이었다.
“후, 어쩔 수 없군요. 다시 한번 우리 관계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몇 번이고 연습하다 보면 조금은 어색함을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 아티쿠스 도련님을 위한 설명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옙.”
조금 전과 달리 일행들이 브라운에게 집중했다.
돈 주고도 못 살, 일행들을 위한 최고의 맞춤 강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