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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83화 (83/133)

83화

14장. 움직임(3)

“조심하십시오. 검을 쥘 땐 항상 제대로 그러쥐어야 합니…, 하, 하씨….”

“너 지금 나한테 욕했냐?”

“그런 적 없… 는데.”

“아니, 분명 뭘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으신, …거야.”

“진짜 바보야?”

검 쥐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바짝 붙어 있던 워렌이 결국 먼 곳을 바라보며 한 걸음 물러났다.

한참 작은 레온의 따가운 시선이 목을 뜨겁게 만드는 것 같았지만 회피 말곤 대안이 없었다.

“있지, 그냥 우리끼리 있을 땐 원래대로 하면 안 될까?”

레온이 고개를 돌려 브라운에게 물었다.

“뭐야. 어디 갔어?”

물론 이 기막힌 상황을 강요해 놓고는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맞습니다. 이게 더 의심스럽다구요.”

기다렸다는 듯 케인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다가섰다.

안 그래도 검술 훈련을 이유로 항해 시작부터 맞붙어 있는 게 꽤나 불만이었다.

남매끼리 이리도 사이좋은 법은 없다. 게다가 누이에게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멍청한 바보가 잭 후작의 막내아들인 게 더 이상했다.

“저렇게 뚝딱거리다가는 없던 의심도 사게 될걸요?”

은근히 워렌을 밀어낸 케인이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레온을 바라봤다.

이제 레온의 냉랭한 시선은 그에게 향해 있었다.

“알겠으니까 너도 좀 떨어져. 나 지금 검 들고 있는 거 안 보여?”

“잘 보입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알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용의 검을 상대하다간 네 목숨도 위험하다. 괜한 방해 말고 비켜서, 케인.”

방금 전 일로 체면을 구겼지만, 어쨌거나 레온에게 검술을 알려주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차마 호칭이나 편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사실 그런 시간도 아깝다.

워렌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며 평소의 모습대로 돌아왔다.

“다시 시작하겠어, 아르테미스.”

“그래.”

“검을 쥐어. 두 손으로.”

실제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편하게 다가오는 워렌을 보며 레온도 짧게 숨을 골랐다.

지금 집중해야 할 건 이 상황보다도 배워야 하는 검술이다.

두 사람이 다시 거리를 좁히며 천천히 합을 맞추기 시작했다.

서너 살쯤 목검을 들고 가정 교육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레온에겐 가장 중요한 과정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찌르기를 할 때마다 자세를 봐주도록 하지.”

“찌르라고? 내 마음대로?”

“…사람만 빼고.”

이게 누굴 바보로 아나.

레온이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푸른 검을 고쳐 쥐었다.

가볍고 얇은 검 손잡이가 오히려 다루기 어렵게 느껴졌다.

까딱하다간 놓치기 쉬운 가벼운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보며 레온이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눈앞에 검은 투구를 쓴 사냥개 놈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금세 눈빛이 매서워졌다.

“한다.”

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 삼아 레온이 곧장 허공을 향해 팔을 내뻗었다.

“왼쪽 무릎이 너무 굽혀졌어. 이렇게 될 경우, 찌르는 힘보다 내 몸을 지탱하는 데 힘을 더 쓰기 때문에 공격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고.”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에 말은 놓았지만, 워렌의 태도는 그 누구보다 조심스러웠다.

차마 레온의 몸을 검집으로 툭툭 쳐대는 일은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워렌이 한쪽 무릎을 꿇고 레온의 자세를 교정하기 시작했다.

힘이 쏠린 무릎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움켜쥐고 허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안 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줄곧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케인이 기겁하며 달려왔다.

워렌의 손이 멈칫했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케인이 그 비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레온을 등 뒤에 숨겼다.

레온의 한숨 소리가 짙게 이어졌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 그게.”

누가 봐도 수상한 행동이다. 워렌이 결국 검을 내렸다.

가장 집중해야 할 순간에 하마터면 서로가 다칠 뻔한 상황을 만들다니.

“검 들고 있는 거 안 보여? 누구보다 훈련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텐데, 대체 아까부터 왜 이러는 거야?”

결국 참지 못한 워렌이 케인을 몰아붙였다.

본능적으로 달려들긴 했지만 케인도 어서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그가 머리를 굴렸다. 되는대로 입을 열자 마주한 푸른 눈이 냉랭하게 내리꽂혔다.

“만약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어쨌든 누이 아닙니까. 여인의 몸에 함부로 손대는 법은 가족 간에도 없는 법입니다.”

“아까는 우리끼리 있을 때 편하게 하자고 하지 않았나?”

“그야 상황마다 다른 거니까요.”

“대체 뭐가 다른 상황인데?”

“…그게.”

“둘 다 그만해.”

레온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낮게 가라앉았다.

워렌과 케인이 곧장 입을 다물었다. 공자 앞에서 입씨름이나 하다니. 명예로운 일이 아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이유로 속이 시끄러웠다.

“오늘 검술 훈련은 이만하자.”

한번 흩어진 집중력을 다시 붙잡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이런 문제이기도 하고.

“케인.”

레온이 제 팔을 붙잡은 케인의 손을 냉랭하게 쳐냈다.

“넌 나 좀 봐.”

불러낸 목소리는 그것보다 더 차갑고 날카로웠지만 말이다.

***

“너,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이유 없이 재미있어서 치는 장난쯤으로 보여?”

선실 바깥 갑판 구석.

레온이 외진 벽으로 케인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공자님.”

“그래, 내가 누군지는 아직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지?”

가까이 맞붙은 레온의 눈동자가 매섭게 케인을 쏘아봤다.

숨조차 내쉴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너, 똑바로 들어.”

바짝 멱살을 움켜쥔 레온의 손끝이 새하얗게 질렸다.

케인이 그 손을 바라봤다. 며칠간 검을 쥐고 휘두른 탓에 살이 짓물러 이전과는 달랐다.

“이건 내 운명이 걸린 일이고, 이 사실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전부를 걸었어.”

한시도 쉬지 않고 검을 배울 만큼 레온은 간절했다.

남자건, 여자건. 애초에 바랐던 결말과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운명이 뒤틀렸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살고 있는 덴 이유가 있었다.

“나는 여자로서, 그 어떠한 보호도 필요하지 않아.”

유일한 보호막은 더 이상 이곳에 없다.

폰네시, 그 석벽의 성을 지키던 푸른 눈의 몬데이어는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는 이가 전혀 없는 끝을 맞이했다.

“내게 필요한 건 힘이 되어줄 동료지 날 지켜줄 남자 따위가 아니야.”

그를 잃은 순간부터 중요한 건 고작 성별 따위가 아니게 됐다.

“난 레온 몬데이어다.”

그저 한 명의 몬데이어일 뿐.

“그러니 네 앞에 있는 내가 여자인지, 아니면 레온 몬데이어인지 구분할 수 없다면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더는 용납할 수 없다.

“썩 꺼지란 말이야, 케인.”

***

얼마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가 얼굴에 한참 튀는 동안에도 케인은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바보 자식.’

꺼지라 명하는 눈빛이 도저히 잊히지 않았다.

늘 매섭긴 해도 그런 표정, 그런 눈길은 처음이었다.

‘…화가 나신 거겠지.’

주제도 모르고 행동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케인이 붉은 머리통을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뭘 안다고.’

레온은 궁성 안에서나 이곳에서나 늘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

괴괴한 소문에 잡아먹힌 미지의 인물에서 누구도 모르는 비밀을 알게 됐다는 것 정도.

딱 그 정도의 거리감만 좁혀졌을 뿐 케인에겐 항상 멀기만 한 존재였다.

‘하지만….’

레온이 여인이란 사실을 알아챘을 때, 그때부터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애정이나 연정. 글쎄, 그런 건 아니었다.

보석 같은 푸른 눈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것 같지만, 제 인생엔 그보다 앞서는 게 있었다.

“…….”

케인이 조심스레 품 안에 넣어둔 목걸이를 꺼냈다.

오래되어 찌그러지고 볼품없이 색이 바랬지만 그 안에 새겨놓은 것만은 여전히 생생했다.

케롤라인 미네스티.

굳은살이 박인 손끝으로 그 이름을 쓸어보자 그리움이 치솟았다.

아무리 오래되고 깊은 곳에 묻어 숨겨도 어느샌가 소용없는 짓이 되는 아픔이 만져졌다.

“케롤라인은 케롤라인이고… 공자님은 다른 사람이지.”

레온의 사정도 모르면서 멋대로 군 건 분명한 잘못이었다.

어째서 몬데이어 공작가의 후계자가 성별을 숨기고 있는지, 그 비밀을 밝히거나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난 공자님 앞에 남자로 머무르고 싶은 게 아니야.”

그렇게 살고 싶었다면 그 힘든 시간을 버텨 기사단에 입단하는 일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더 쉬운 길이 있었다. 당장 옆집에 살던 여인과 평생을 약속하기만 해도 이룰 수 있는 꿈이었다.

하지만 그게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도움이 되는 사람….”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동생을 잃은 바보 같은 케인 미네스티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조금이라도, 일부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케인이 갑판 위에서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떠날 순 없어.”

용서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레온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 그런 감정으로 멀어지는 일 따위도 없길 바랐다.

“내 상황을 말씀드리고 용서를 구하자.”

지금 해야 할 일은 그것뿐이었다.

케인이 레온을 찾기 위해 몸을 되돌릴 때였다.

먼 곳에서부터 작은 꼬마아이가 전속력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케인이 달려오는 멍투성이의 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미간을 모으고 집중하자 주변 상황이 정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앞만 보고 달렸다.

붙잡으려는 어른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오직 직진하는 녀석의 눈빛엔 의지가 전혀 없었다.

‘이대로 가면… 바다인데?’

닳도록 봐서 이미 알고 있는 눈빛이다.

케인이 천천히 제 뒤에서 아우성치는 드센 파도를 바라봤다. 새카만 바다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등 뒤에서 팔을 벌렸다.

‘죽으려는 거야!’

삶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는 공허한 눈동자.

바라는 건 죽음뿐인 자의 발버둥이 보였다.

“안 돼!”

케인이 곧장 녀석을 끌어안았다.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아이를 붙잡자마자 두 사람이 선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악다구니가 이어졌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그 분노를 느끼며 케인은 온 힘을 다해 아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았다.

“제발 놔줘!”

그럴 수가 없다.

바닥에 제압당한 아이가 발버둥 쳤다. 품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미안할 정도였다.

곧이어 뒤쫓던 사람들이 다가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거 정말 감사하게 됐습니다.”

“구해주셔서 고맙소.”

“위험할 뻔하지 않았나, 이놈!”

“어서 가자. 넌 이제 외출 금지다!”

전혀 고맙지 않은 표정으로 성인 남녀 둘이서 녀석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거센 손길에 아이가 눈물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놔! 이거 놔!”

“조용히 못 해?”

가족이 아니다. 가족일 수 없다.

겨우 몸을 일으킨 케인이 홀린 듯 아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발버둥 치던 아이가 원망 섞인 표정으로 케인을 되돌아봤다.

“왜.”

남자가 눈을 부릅뜨며 케인의 팔을 붙잡았다.

“구해줬으니 뺏어가 보시게?”

그들은 너무도 쉽게 본색을 드러냈다. 이자들은 아이를 납치했다. 무엇을 목적으로 그랬는지까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 목숨 하나 부지하기 어려운 시대에 불필요한 호의는 서로를 다치게 만들 뿐이다.

‘모두 알고 있지만.’

저 아이를 외면할 수가 없다.

케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다가오는 남자와 당장 맞붙을 기세로 팔을 걷어붙이는 순간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볼일 없으니 아이를 데려가세요.”

등 뒤에서 케인을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저희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봐!”

바로, 부집사 브라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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