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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84화 (84/133)

84화

14장. 움직임(4)

“서대륙의 아이들이 머나먼 땅을 밟는 건 흔히 있는 일입니다.”

꼬리 칸 바로 위, 거센 바람이 나부끼는 곳에 브라운과 케인이 서 있었다.

케인은 금방이라도 물속에 파묻힐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그런 말이 있죠. 뉴홉을 거쳐 간 아이들은 결국 마다비아인이 된다는.”

항구를 통해 팔려나간 아이들은 결국 출신도 모른 채 세계 곳곳을 떠돌게 된다는 소리를 비웃는 말이었다.

그만큼 서대륙 내 경각심 없이 행해지는 범죄 행위는 현재 극에 달해 있었다.

데로니스 세력이 크라운 캐슬을 차지한 순간부터 수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걸 몰라서 제가 그 아이를 구했겠어요?”

다만,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범죄라 하더라도 외면하기 쉬운 건 아니었다.

케인이 고통스럽게 표정을 구기자, 브라운은 손을 뻗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

“마음은 알지만 이후의 상황까지 책임질 수 없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다 구원할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아이가 바다에 뛰어들 각오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뭐라고요?”

케인이 냉정하게 브라운을 돌아봤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워렌이랑 붙어 다녀서 그런지 피도 눈물도 없다.

“저한테 그런 건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디카르테에게 중요한 건 몬데이어의 삶뿐이다.

브라운이 케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곤 한 걸음 물려나려는 케인을 붙잡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일 데로니스가 각 영주와 모든 귀족들을 소집했습니다.”

케인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총 소집령.

어쩌면 가장 피하고 싶기도, 또 기다려 오기도 했던 순간이 찾아왔다.

“폰네시의 주인 자리를 놓고 저울질을 할 셈이죠.”

서대륙을 네 개로 나누어 가장 큰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곳을 꼽으라면, 중앙 덴버그보다도 바로 동북부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폰네시였다.

그 주인을 새로 정하는 일은 하일 데로니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척도였다.

“그럼 시간을 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 주요 인물들이 모이니, 덴버그 보호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할 것 같은데.”

“그렇겠죠. 전 대륙에 퍼져 있는 병력을 수도로 집중하고 우선순위를 매길 겁니다.”

“기회가 생긴 것 아닙니까? 이 틈에 동대륙으로 넘어갈 좋은 기회잖아요.”

브라운이 고개를 저었다.

간만에 머리를 쓴 케인의 의견도 맞는 말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골치 아픈 일이 생겨버렸다.

“우리는 동대륙이 아닌, 크라운 캐슬로 가야 합니다.”

“뭐…!”

기겁이 터져 나오려는 걸 브라운이 손을 뻗어 케인의 입을 막았다.

이 서대륙의 수도 덴버그, 그중에서도 왕이 머무는 성엔 대체 왜 간단 말인가!

“데로니스가… 잭 후작 역시 소환했거든요.”

외면하고픈 현실에 브라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케인의 떨리는 눈동자는 갈피 없이 바닥에 나뒹굴 뿐이었다.

***

“사이먼 우딘이 마음에 걸려 곁에 사람을 좀 붙여 두었습니다.”

일행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선실 안에 모두 모였다.

“그러다 우딘 가문의 소집령을 듣게 되었고, 출발 직전 사람을 시켜 잭 후작의 상황도 알아냈어요.”

브라운은 그길로 아르히 잭에게 서신을 보냈다.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여러 곳을 거쳐 보내느라 이제야 받았지만 파도에 젖은 그의 답신을 드디어 손에 넣었다.

“읽어보세요, 아가씨.”

이 순간에도 브라운에게 레온은 그저 아르테미스였다.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 완벽한 그 모습에 놀랄 틈도 없이 레온이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지난밤 데로니스 대공, 아니, 왕의 명령이 떨어졌네.

원하든 원치 않든, 이 가문의 수장인 나와 후계자인 아티쿠스는 덴버그로 가야 하겠지.

잭 가문은 태초에 다섯 영역으로 나뉘어 있던 폰네시 지역의 통치 가문이다.

선대 몬데이어는 용의 힘으로 북부와 동부를 아우르는 다섯 영역을 통합했다.

그 역시 먼 옛날의 끔찍했던 전쟁 기록이었다.

우리 가문이 받들 태양은 단 하나뿐이지만….

기존 귀족들은 출신도 알 수 없는 신생 기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몬데이어를 인정하지 못한 그들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다만, 공작가에 영원한 종속을 약속한 두 가문만이 폰네시에 남아 그 영광을 나눠 갖게 되었다.

그게 바로 잭과 우딘 가문이었다.

나는 너무 늙었고, 나태에 익숙한 우리 가문은 더 이상 홀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네.

남아 있는 나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덴버그로 향하지 않을 수 없어.

루시오가 죽었으니 하일 데로니스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서신을 읽는 레온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인간들의 나약함은 이토록 보잘것없다.

우리 가문은 폰네시 통치에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힐 테지만….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우리 가문 중 한 사람은 크라운 캐슬에 얼굴을 비춰야 하지.

아티쿠스는 데려가지 않을 셈이네. 몬데이어 경이 목숨을 잃었지만, 우리의 서약은 여전히 유효하니 말일세.

약속을 지키겠노라 다시 한번 다짐하는 부분에서도 레온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

이런 상황에 예의 그렇듯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의 딸, 아르테미스의 병세가 무척이나 깊어졌네.

레온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둔다면 곧 엔드해에 영원히 잠기게 되겠지. 그 애의 죽음은 피할 수 없어.

하나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라네. 이 일이 결국 가문 간의 서약에도 차질을 빚게 될 거야.

아르테미스의 운명을 되돌리기란 이미 어려운 일이었다.

오래도록 아팠으니 이를 우려하는 건 아니었다. 죽음은 딸에게 오히려 해방이었다.

아르테미스의 죽음이 알려진다면 분명 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는가?

이런 상황에 내가 자리를 비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가신들의 입단속을 도맡을 사람마저 사라지는 거니까!

처음 깃펜을 들었을 때부터 바라는 건 이것뿐이었다.

우릴 대신해 덴버그로 가줄 수 있겠나?

크라운 캐슬, 왕의 영역.

어쩌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를 위험한 곳이다.

몬데이어 공작가에 영원한 종속을 약속한 시점부터 잭 후작에게 그곳은 피해야 할 공간이었다.

그곳에 가서 우리 가문의 뜻을 전해주게.

그렇게만 된다면, 이 비밀은 영원히 죽을 때까지 새어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겠어.

이건 대신 가지 않을 시 이 비밀을 퍼뜨리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레온이 서신을 와락 구겼다.

손쓸 틈도 없이 구겨져 버린 종이 뭉치를 보며 일행들도 할 말을 잃었다.

“아르히 잭이 놈들과 손을 잡고 공자님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겁니다.”

워렌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보낼 수 없다.

뻔히 눈에 보이는 위험 앞에 달려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깟 비밀, 더 이상 잭 가문의 신분으로 위장하지만 않는다면 두려운 일도 아닙니다.”

아르테미스와 아티쿠스의 이름을 내걸지만 않으면 된다.

워렌이 브라운을 바라봤다. 부집사가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다.

“예, 맞습니다.”

아무리 내쉬어도 속에 부글거리는 갑갑함을 꺼뜨리기 어려웠다.

브라운이 한숨과 함께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그들을 대신해 소집령에 응하는 건 너무도 위험한 일입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신분이 없다면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아닙니까?”

레온은 케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뭐, 새로운 신분을 알아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요.”

평소와 달리 브라운의 목소리엔 확신이 없었다.

“그럼 그때까지 달로스에서 대기한다면요?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역시 안전한 방향이 더 낫지 않겠어요?”

“아니, 신변보다 중요한 건 시간이야.”

레온의 일침에 일행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시련에 시련이 나아질 기미 없이 겹겹이 쌓이기만 하는 기분이었다.

과연 돌파할 수 있을까? 넘치는 의지와 반대로 숨어야만 하는 현실에 워렌이 옷을 뜯어버릴 듯 목 단추를 풀어냈다.

“잭 가문처럼 아무 이유 없이 우리에게 신원을 빌려줄 사람이 과연 또 있을까?”

결국 선택은 레온의 몫이었다.

“그건….”

“누군가 있다 쳐도. 내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 명령할 만한 힘이 있기는 하고?”

잭 후작과의 서약은 아버지인 루시오 몬데이어의 도움이었다.

냉정한 현실이지만 현재 레온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세력은 이 서대륙 그 어디에도 없다.

불의 군단도 당장 운용할 만한 병력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우린 위험해. 안전 따위 폰네시를 벗어난 순간부터 전혀 없었다고.”

거짓 신분을 등에 업고 동대륙으로 향하나, 적의 심처에 쳐들어가나 어차피 이미 정해진 운명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위험은 이미 코앞에 닥쳐 있었다. 이 땅 위에 레온 몬데이어란 이름으로 버티기 위해선 피해갈 길이 없었다.

“브라운, 덴버그에서 육로로 슐츠까지 가는 길은 얼마나 걸리지?”

“달로스를 거쳐 동대륙에서 슐츠 해안까지 향하는 것보다 적어도 반 이상 시간을 아낄 수 있습니다.”

확신할 수 있는 대답엔 전혀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래?”

달로스를 거쳐 동대륙까지 가기 위해선 반드시 누군가의 이름이 필요하다.

설령 운 좋게 검문 없이 배에 올라탄다 하더라도 동대륙에 도착하는 순간, 이미 데로니스 녀석들이 목숨을 틀어쥐기 위해 진을 치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서대륙에서 동대륙으로 넘어가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그보다 몇 배의 위험이 뒤따를 겁니다.”

“그래, 알아.”

브라운의 우려에도 레온의 눈빛엔 변함이 없었다.

모든 걸 알고 있어도 선택을 해야 한다면 언제나 같은 답을 내놓을 것이다.

“헤리스 타린이 동대륙에 있을 가능성보다는 덴버그에 있을 확률이 더 클 테니까.”

이번 총 소집령에 헤리스 타린이 응한다면 슐츠까지 가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그놈은 어차피 우릴 배신한 적의 수족일 뿐이잖아?”

달로스에 가야 하는 것도, 동대륙에 가야 하는 것도 결국은 용의 비밀을 알고 있는 헤리스 타린을 만나기 위함이니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덴버그에 가야겠어.”

레온의 결정에 일행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을 직감하며 제가 해야 할 일을 곱씹을 뿐.

“단, 아르히 잭의 저택으로 먼저 가. 어중간한 건 싫으니까.”

“예? 그곳으로 가려면….”

“응, 폰네시로 가잔 소리야.”

적의 소굴까지 찾아들어 가는 데 아무 준비도 없이 갈 수는 없다.

“어차피 우리는 잭 후작의 자제들일 뿐이잖아?”

살고 있는 고향에 찾아가는 데 문제 삼을 이는 없어야 한다. 설령 있다 쳐도.

“아르히 잭이 모두 해결해 주겠지. 감히, 나를 협박했으니.”

그만한 각오도 없이 손을 놀렸다면 배워온 검술을 선보이는 첫 번째 대상으로 삼아줄 작정이었다.

레온이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메리를 향해 말했다.

“우리 고향으로 가자.”

그곳을 떠난 지, 반년 만에 귀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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