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14장. 움직임(5)
뉴홉과 달로스 사이엔 정착 섬 하나가 존재한다.
일행들은 그곳에서 다시 뉴홉으로 되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가장 우선할 건 헤리스 타린을 찾는 일이야.”
아버지인 루시오 몬데이어가 숨겨온 용의 혈족, 그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자였다.
그놈의 입을 막을 필요도 있겠지만, 그를 통해 알아내야 할 사실도 있었다.
“이건 다이아 스틸로 만들어진 검이야.”
레온이 처음으로 일행들에게 제가 알고 있는 비밀을 꺼내놓았다.
“다이아… 스틸이라고요?”
박식한 브라운도 처음 들어보는 명칭이었다.
워렌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용의 검이 보통 차원의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겉보기엔 얼음과 별반 다르지 않지. 하지만 이건 절대 깨지지 않아.”
레온이 푸른 검을 검집에서 선보였다.
영롱한 기운이 내려앉고 나자 오래도록 제련한 다이아 스틸이 빛을 발했다.
“깨지지 않는다고요?”
“인간의 힘으론 그렇지.”
아무리 두드리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물리적인 힘만으로는 다이아 스틸을 깨뜨릴 수 없다.
브라운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보다 더 빨리 워렌이 그 손목을 붙잡지 않았다면 큰 화를 입을 뻔했다.
“이 검은 용의 혈족만이 다룰 수 있어.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검이니까 만지지 않는 게 좋아.”
“…역시 공자님께서도 그런 비밀이 있었군요.”
“나도 몰랐어. 아버지는 내게 그런 말은 해주시지 않았거든.”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이유를 불문하고 레온을 따르는 게 제 역할이었으나, 어째서 헤리스 타린을 찾아야만 하는지 뜻을 알 수 없었다.
선대 몬데이어 공작이 남긴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
단순히 그의 오래된 벗이자 배신자를 찾아내기 위해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기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나 이제는 안다. 다이아 스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라면 찾아야 할 이유가 분명했다.
“이거라면… 데로니스 세력과 맞설 유일한 무기가 되겠군요.”
“그래, 브라운.”
케인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그런 차원까지 생각이 흐르지 못한 건 케인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용의 혈족도, 다이아 스틸도.
생전 생각도 못 했던 새로운 영역을 쉽게 받아들이는 브라운이 오히려 이상한 부류였다.
“용의 혈족을 뒤쫓는 세력이 있어.”
레온이 타티아나의 기억 속에서 엿본 늙은 술사를 떠올렸다.
그놈은 라피스를 다룰 줄도 알았다. 검은 사냥개 놈들과 한 패일 가능성이 무척이나 컸다.
“그들이 이 힘을 이용해 다이아 스틸을 다루게 되는 순간, 모든 게 끝이야.”
놈들이 라피스뿐 아니라 용의 혈족의 힘까지 노리는 것이라면 모든 행보가 설명된다.
데로니스 놈들이 기를 쓰고 몬데이어 공작가를 멸문으로 이끌려 하는 이유 역시 그것 때문일 것이다.
“분명 아버지의 힘을 알고 있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할 수 없다.
레온은 바다에 내려앉은 인어의 기억을 떠올렸다.
데로니스 놈들이 폰네시를 얼마나 초토화시켰는지 죽어 나간 수많은 인간들의 절규가 한동안 바다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단순히 세력 확장을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까지 불태울 필요는 없었을 거야.’
폰네시 곳곳에 불을 지른 건 불 속에서도 살아 있는 용의 혈족을 골라내기 위해서였다.
또, 그 땅에 파묻힌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물론 내 추측만이지만 헤리스 타린이 그걸 빼돌렸을 거고.”
루시오의 오래된 벗이니 그 비밀이 어디에 있는지 알 만한 사람은 오직 그자뿐이다.
“아직 서대륙에 아버지의 영향력이 남아 있으니 지금까지는 몸을 숨겼겠지만….”
그간은 자취를 숨기고 주변 눈치를 봐왔지만 더 이상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일 데로니스가 소집령을 내렸으니 헤리스 타린도 크라운 캐슬에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겠군요.”
“그래, 그자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느 것 하나 놈들의 손에 들어가선 안 돼.”
수천, 수만의 생사를 멋대로 결정할 수 있을 파괴적인 용의 피와, 무한한 생명력의 원천인 라피스.
그 두 가지를 함께 얻는다면 세상을 종말로 이끌 수도 있었다.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 누구도 권력을 위한 희생양이 되어선 안 된다.
‘세상을 구원하고 싶은 마음 따윈 없어.’
하지만 동족을 잃는 아픔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무력감을 이 땅 위에서까지 다시 느끼고 싶지는 않다.
루시오가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반드시 그 비밀을 알아낼 것이다.
얻어낸 힘으로 인어들에게, 또 용의 혈족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그자를 찾아내러 가자.”
***
뉴홉에서 반나절을 쉼 없이 달리다 보면 폰네시와 맞닿아 있는 경계 숲에 금세 도착한다.
일행들은 숲 내부에 지독하게 퍼져 있는 잿더미와 탄내에 급히 코를 가려야 했다.
“…이럴 수가.”
메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의 등 뒤에서 말을 몰던 케인이 메리를 위로했다.
“전부… 불탔네요.”
숲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모든 땅은 피에 젖어 질척거렸고, 우거진 폰네시의 나무는 흔적도 남지 않고 모두 사라졌다.
숲속에 살던 이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빤한 일이었다.
“갈 길이 멀어. 우리가 가는 모든 곳이 이럴 테고.”
레온이 일부러 무신경한 목소리로 일행들을 독촉했다.
이런 감상에 빠져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된다.
“예, 서두르겠습니다.”
일행들은 북부를 벗어나며 마차를 버리고 건강한 말 세 마리를 구입했다.
바닥의 상태가 고르지 않을 거라 예상한 덕에 발길이 막히진 않았지만 마주한 현실은 정말 참혹 그 자체였다.
케인이 가장 먼저 메리와 함께 앞서 달렸다. 그는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말을 다뤘다.
“잘하는 거 다 알겠는데 제가 방향을 잡아야 하니 조금만 천천히 달리세요.”
브라운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등 뒤 바구니에 고개만 쑥 내민 벨을 매달고서 내달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벨, 네가 고생이 많다.”
브라운의 등 뒤는 날카로운 맹수의 송곳니가 지켜줄 터였다.
레온의 진심 어린 위로에 브라운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르테미스.”
워렌이 레온의 주의를 되돌렸다.
고개만 돌려 살짝 보이는 그 옆모습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본래 아티쿠스와 다른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어두운 빛으로 물들인 머리는 워렌 역시 태어나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꽉 잡아.”
그가 톡톡, 어색하게 옷을 붙잡은 레온의 손등을 두드렸다.
대답할 틈도 없이 워렌이 곧장 고삐를 잡아당겼다.
절로 쏠리는 몸에 레온이 워렌의 등짝에 고개를 처박았다.
“아프잖아.”
“시간이 없다고 말한 건 아르테미스 너야.”
“이게 연장자한테 자꾸 말을 놓네.”
곧 죽어도 누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워렌이 모른 척, 바람을 가르며 탄내가 지독한 폰네시의 땅을 내달렸다.
“아, 그냥 내가 몰면 안 될까?”
말 위에서 워렌의 옷을 찢을 수는 없으니 아무리 싫어도 붙잡을 건 결국 그의 몸통밖에 없었다.
강제로 허리를 끌어안게 된 상황이 무척 불편했다.
레온이 고개를 바짝 들고 워렌의 귓가에 소리 질렀다.
“응?! 내가 몬다고!”
“말 탈 줄 모르지 않나?”
“알거든? 누굴 바보로 알아. 그냥 타면 알아서 달리는 걸 왜 못 한다고 생각해?”
워렌은 내심 레온에게 고삐를 쥐어주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다고 하니 말을 탈 수 있을 리가 없어.”
“그건 알지만….”
“뒤편이 불편해서 그래? 그럼 내가 뒤에 탈까?”
긴 치마를 입었으니 옆으로 돌아 앉아 허리를 껴안고 있기가 불편할 만도 했다.
여인을 가까이 해본 적이 없어 워렌도 어떻게 굴어야 할지 어색하기만 했다.
그 여인이 여장을 한 공자라는 게 가장 문제됐지만 이런 상황에 그런 고민은 사치였다.
“역시 내가 뒤편에서….”
워렌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레온이 등 뒤에서 그의 뺨을 붙잡았다.
뒤돌아보려는 머리통을 붙잡고 정면을 응시하게 만들었다.
수없이 내젓는 고갯짓은 아마 떨림으로 느꼈을 것이다.
“아니야, 괜찮아. 됐으니까 가기나 해. 그냥 달리라고.”
워렌에게 껴안길 바에는 말 위에서 낙마하는 사고가 차라리 행운인 것처럼 느껴졌다.
용납할 수 없다. 더 이상 잃을 위엄도 없다.
치마를 입는 순간부터 빠르게 사라져가는 자신감에 레온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역시 그편이 얼굴을 숨기기에도 더 낫겠지.”
앞서 달리던 일행들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얼마 가지 않아 데로니스 왕조의 군복을 입은 수색병들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지? 북부에서 오는 건가?”
“영지 간 통금령이 내려졌을 텐데.”
총 소집령이 내려진 뒤 줄어든 병력을 우려해 일반 영지민들은 모두 집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그들이 수상한 차림의 일행들에게 다가왔다.
귀한 옷을 빼입지도, 오랜 모험을 하고 돌아온 것 같지도 않은, 도통 알아챌 수 없는 행색이 수상했다.
“너희는 누구냐.”
브라운이 재빨리 모자를 벗고 말에서 내려섰다.
“저는 잭 후작가에 고용된 길잡이입니다.”
“잭 후작가?”
“두 분 자제께서 이런 일이 있을 줄 모르고 이미 북부 모험 길에 오르셨던 터라….”
브라운이 당당하게 뒤편을 가리켰다.
워렌은 표정의 변화 없이 수색병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뭐라 해도 지금부터 절대 고개 들지 마.”
그들이 여전히 말 위에서 내리지 않은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레온이 바짝 워렌의 등에 고개를 파묻었다.
“잭 후작의 자제들인가?”
“내 이름은 아티쿠스 잭, 내 뒤편에 있는 이는 내 누이 아르테미스 잭이다.”
그들이 흘끔, 얼굴을 숨긴 레온을 살폈다.
왜소한 체구에 평범한 옷을 입었지만 긴 머리칼이 인상적이었다.
“좀 확인해야겠는데.”
“뭘 확인하겠다는 거지?”
워렌이 냉랭한 목소리로 뒤편에 손을 뻗었다.
레온에게 한 발자국도 허락하지 않는 그 손짓에 수색병들이 미간을 모았다.
“그야 당연히 신원 확인이다.”
“우리 데로니스 왕가에게 불복하겠다는 건가? 감히 폰네시의 후작 놈들 주제에.”
워렌의 옷자락을 쥔 레온의 주먹 위로 핏줄이 돋아났다.
폰네시 땅에서 데로니스 놈들이 설쳐대는 꼴을 체감하자니 내장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하급 수색병이라 아마 그쪽까지 정보가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군.”
다만, 이런 놈들에게 검을 휘두르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워렌이 가슴 안쪽에서 총 소집령이 담긴 하일 데로니스의 명령서를 내던졌다.
잭 후작으로부터 건네받은 중요한 문서였다.
“우리 가문이 새 왕조의 충실한 일원이 되었다는 소식은 아직인가 보지?”
새 왕조에 충성을 맹세한 이상 하급 수색병 따위가 감히 후작 가문의 행렬을 막을 수 없는 노릇.
“더 길을 막는다면 소집령에 늦은 이유를 네놈들 탓으로 둘러대기에 딱 좋겠군.”
워렌의 당당한 태도에 수색병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왠지 모르게 온몸이 짓눌리는 기분이다. 대체, 이 살기는 뭐지?
“이, 일을 열심히 하는 것뿐이니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시오.”
“본디 신원 확인은 하루 동안 지켜보는 게 철칙이지만….”
“특수한 상황이니 시간을 지체할 순 없겠지. 좋습니다.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시오.”
그들이 맞설 수 없는 워렌의 기운에 고갤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한껏 숨을 참았던 일행들이 겨우 안도했다.
“야, 너 거짓말 잘한다.”
레온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며 워렌을 바라봤다.
익숙한 금발은 온데간데없고 짙은 색의 머리칼이 그의 잘난 이목구비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무척이나 잘생긴 얼굴이었다.
“왜, 5년 동안 배를 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워렌이 싱긋 웃었다. 꼭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레온은 처음 보는 워렌의 환한 미소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튼. 서두르자.”
하지만 지금 이런 감상을 할 시간은 없겠지.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잭 후작의 저택이었다. 일행들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