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15장. 적진(1)
폰네시 구석, 궁성 뒤편에 위치한 작은 언덕 위엔 잭 후작가의 오래된 저택이 자리했다.
레온 일행은 새벽이슬과 함께 저택의 후문으로 무사히 입성할 수 있었다.
“어, 어서 오시지요.”
레온이 무심한 표정으로 장갑을 벗었다.
이 후작가의 주인, 아르히 잭이 땀을 삐질 흘리며 레온을 응시했다.
‘정말… 여자라고 봐도 믿을 만한 모습이군.’
어디서 구했는지 진정 아르테미스의 머리칼이라 할 법한 짙은 남색의 머리가 허리 끝에서 찰랑였다.
레온이 가장 편한 응접 소파를 골라 앉았다. 늘 그렇듯 곁에 일행들이 따라붙었다.
“저택에 사람들이 전혀 없던데.”
“…공자께서 오신다 했으니 미리 손을 봐뒀습니다. 총 소집령에 대비해 심부름을 좀 시켰지요.”
“칭찬을 바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지?”
“…예.”
잭 후작의 굽은 등이 펴질 줄 몰랐다. 금방이라도 굴러갈 것 같은 그의 몸은 누가 봐도 긴장한 사람 같았다.
레온이 침실 내부를 살폈다.
그간 폰네시에 기생해 잘 먹고 잘 살아왔는지 보기 좋게 꾸며져 있는 게 몹시 열 받는다.
‘그래놓고 감히 아버지의 뒤통수를 쳐?’
제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권력에 빌붙는 모습이야 익숙했지만, 그런 놈이 협박까지 해댔으니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레온이 평소보다 더 냉랭한 모습으로 후작을 노려봤다.
아름다운 모습에 그렇지 못한 표정으로 입을 다무니 애가 타는 건 후작 쪽이었다.
“그, 그게… 우리 아르테미스는 원체 약하게 태어났습니다.”
그가 구구절절 시키지도 않은 상황 설명을 해대기 시작했다.
“네 명의 딸들 중 가장 연약한 아이였죠… 아! 꼭 공자님처럼 체구가 몹시 작고….”
“그런 건 안 궁금해.”
“…옙, 아무튼 자라며 여기저기 잔병치레를 시작하더니 몇 년 전부터 좀처럼 회복하질 못했어요.”
그렇게 병상에 누워 세월만 보낸 지도 벌써 다섯 해가 넘었다.
“올해를 넘기기 힘들 겁니다. 어쩌면 내일 영면에 들지도 모르죠.”
아르히 잭은 전혀 슬퍼 보이지 않았다.
자식을 잃는 아픔이야 가늠할 수 없겠지만, 그의 눈에 아르테미스는 현재도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고통에 발 묶여 있는 지금보다 자유로울 바닷속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티쿠스는?”
레온은 그 이름을 말하며 워렌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놈은.”
아르히의 한숨이 짙어졌다.
어디서 잘못된 걸 배워왔는지 하나뿐인 아들놈의 앞가림은 생각만 해도 분노가 차오를 정도였다.
“제가 워낙 오냐오냐하며 키웠더니… 도통 뜻이 통하질 않습니다.”
“그럼 이번 일에도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
“…예, 물론입니다.”
잭 후작이 다시 한번 땀을 닦아내며 심호흡했다.
워렌의 인상이 사뭇 짙어졌다. 가만있지 않으면 차후 문제를 벌일 우려도 있었다.
“그분은 어디에 계시죠?”
두 사람을 대신해 브라운이 물었다.
잭 후작은 그 침착한 모습만으로도 서신을 주고받았던 유능한 부집사가 저자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감옥에 가둬두었네.”
“예?”
“가, 감옥이요?”
일행들이 입을 떡 벌렸다.
메리는 그의 가혹한 처사에 눈을 깜빡거리는 것마저 잊었다.
“뭘 놀라. 지키려는 건데.”
레온이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뀌어댔다.
말은 저렇게 그럴싸하게 해대지만 결국 제 아들놈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 땅의 주인이 바뀔 텐데, 나돌아다니게 두고 싶겠어?”
다 큰 아들을 감옥에 가둬서라도 보호하려는 지독한 부정이었다.
제대로 간파당한 잭 후작이 잠시간 할 말을 찾기 위해 눈알을 굴렸다.
눈앞의 작은 몬데이어는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다. 간사한 혀를 놀려 아무리 떠들어대도 영 통할 것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아, 아무튼 우리 가문은 더 이상 땅을 통치하는 데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통치권을 빼앗긴 이후부터 마음먹은 다짐은 아니었다.
패기 넘치던 몇 세대 전 잭 후작들은 우딘 가문과 함께 힘을 합쳐 몬데이어들을 몰아내보려 애쓰기도 했다.
“이 땅의 주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지요….”
하나 너무도 극명한 힘의 차이는 점차 그런 시도조차 생각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병력, 특히 몬데이어 공작들은 대대로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선보여 왔다.
‘저… 작은 몬데이어도 그럴지 몰라.’
체구는 중요하지 않다.
겉보기엔 꼭 여자처럼 아름답고 왜소해도 그 안에 어떤 숨이 감춰져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공자님.”
잭 후작이 가증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레 레온 앞에 무릎 꿇었다.
그러곤 천천히 손을 뻗어 작은 레온의 손을 붙잡았다.
뒤편에 서 있던 브라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몬데이어 공작가만이, 그 피를 이어받은 분만이 이곳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공자께 매섭게 처맞지나 않으면 다행인 일이다.
세 명의 남자, 심지어 메리까지 레온의 매몰찬 손길을 기대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
레온이 천천히 그 손을 맞잡으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힘든 여정 속에서 저렇게 환히 웃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죄 불타고 쓸모없어진 이 땅은 더 이상 가치 없을지 모르겠지만.”
레온이 붙잡은 잭 후작의 손을 뒤틀었다.
“나는 아니야.”
순간 맞잡은 손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악!”
레온은 스스로도 제가 어떤 힘을 내뿜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뒤편에 서 있는 워렌만이 용족의 살기를 눈치챘다.
“몬데이어가 살아 있는 이상, 이 세상 어느 곳이라도 다시 폰네시가 될 수 있어.”
“…레, 레온 공자님!”
“그래, 나는 그곳의 주인이 될 레온 몬데이어다.”
환하게 웃던 레온의 얼굴에서 미소가 거두어졌다.
마주한 푸른 눈동자는 꼭 선대 몬데이어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루시오, 그 강력한 공작의 영혼이 레온에게 깃들기라도 한 것처럼 숨통이 막혔다.
“그 사실을 잊지 마. 우리가 어떻게 이 땅을 차지하고 너희를 무릎 꿇렸는지 잊지 말란 말이야.”
그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잊어버리는 순간 어찌 될지는 후작가의 사람들이 가장 잘 알았다.
나머지 세 영주들이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그 아버지의 아버지까지 몇 세대에 걸쳐 절대 잊지 말라 신신당부한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예, 공자님! 뼛속까지 깊이 새기겠습니다!”
두려움에 빠진 그 표정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레온이 곧장 후작의 손을 놓았다.
더 이상 역겨운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아르테미스의 이름에 먹칠할 생각은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고.”
친절하기도 하셔라.
“자, 그럼.”
때가 됐다.
브라운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준비해온 요구 사항을 상세히 읊기 시작했다.
“덴버그까지 타고 갈 마차와 식량, 그리고 우리가 진짜 후작가의 사람이란 걸 증명할 수 있는 증좌를 준비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증좌? 증좌라면….”
“왜, 잭 가문의 가보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후계자들에게만 주어진다는.”
“아, 아니! 어찌 가보를 줄 수 있단 말이야?”
벨을 쓰다듬으며 평화롭게 듣고 있던 레온이 다시 매섭게 눈을 치떴다.
“그, 그게….”
“제가 아티쿠스인데 뭐가 걱정이십니까, 아버지.”
워렌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해댔다.
이놈은 또 뭐야? 워렌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잭 후작은 조금 전 경험한 살기가 삐죽삐죽 다시금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지독한 놈들뿐이다.
결국 후작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 드리지요. 정녕 우리 가문의 모든 것을 다 드리겠다고요!”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명심해. 내가 망하면 너도 망한다는 걸.”
입조심하라는 협박을 참 두렵게도 한다.
레온이 다시 한번 콧방귀를 뀌며 벨을 품에 안았다.
이제 잭 후작의 목숨은 제 손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다행히 우딘 가문은 어젯밤 먼저 출발했다고 하네요.”
빠르게 잭 후작의 저택을 빠져나온 일행들이 마차에 올랐다.
의심의 싹을 잘라버릴 만반의 준비를 마쳤으나 우려되는 점은 분명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큰 교류가 없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잭 가문의 일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야. 조심할 필요가 있겠어.”
“예, 마주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일이겠죠? 특히 아티쿠스 도련님은요.”
브라운이 선두에서 말을 모는 워렌을 바라봤다.
그는 잭 가문의 휘장을 들고 앞서 향하고 있었다. 가문의 후계자답게 일행을 이끌어야만 했다.
“그래, 우딘 가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니…. 사이먼이 가문에서 추방당했길 망정이지.”
그 사실도 모르고 놈에게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만에 하나 사이먼이 너무 다른 아티쿠스의 모습을 의심하고 있다면, 우딘 가문에 그 소식을 전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부분은 제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모든 상황을 완벽히 통제할 순 없지만 눈과 귀는 그의 가까이에 두었다.
레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브라운 역시 주인을 따라 바깥을 살폈다.
“…….”
“…….”
내부엔 금세 고요가 내려앉았다.
빠르게 내달리는 마차 안으로 시체를 태우는 지독한 냄새가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월랜드를 거쳐 곧장 중앙 지역으로 진입할 겁니다.”
브라운이 억지로라도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애썼다.
“그레이트 대협곡을 건너지 않아도 된다니. 이는 정말 다행인 일이죠?”
“맞습니다, 케인.”
“아이참, 이제 그 이름으로 부르시면 안 된다니까요.”
“맞네요. 가는 동안 좀 더 설정에 몰입해야겠습니다.”
브라운은 후작가의 하급 행정관으로, 케인은 병약한 영애를 지키는 호위 기사로 새 신분을 얻었다.
레온은 실컷 떠들어대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얌전히 눈을 깜빡거렸다.
화려한 후작가의 드레스가 이곳에 들르기 전보다 더욱 무겁게 레온의 어깨를 짓눌렀다.
“익숙지 않으시지요?”
“그러게.”
레온이 따뜻한 메리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눈을 떠도, 감아도 지옥처럼 지독한 연기가 시야를 방해하는 이 우울한 폰네시에서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건, 처음 보는 메리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뿐.
“메리도 어색하지?”
“…아무래도요.”
“그래도 잘 어울려. 후작 부인이 된 걸 축하해, 메리.”
“…저를 놀리세요?”
“아니, 진심이야.”
그녀는 화려한 드레스와 곱게 치장한 자신의 모습을 무척이나 어색해했다.
“그 욕심 많은 후작이 부인을 여섯이나 둔 건 고마운 일이지.”
부인이 이미 여섯이나 있으니, 근래에 한 명쯤 새로 얻었다고 해서 남들이 놀라워할 것 같진 않았다.
“…역시 놀리시는 것 같은데요.”
“아니야, 정말 고맙다니까.”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평생 볼 수 없었을 화려한 메리의 모습은 정말이지 귀한 것이었다.
레온이 어색해하는 메리를 귀여워하며 미소 지었다.
“이번만큼은 진짜 내 어머니가 될 테니까.”
“예?”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메리의 품에 마음껏 파고들 수 있다는 것.
그것만이 설명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진정한 위로가 될 터였다.
“아니야.”
레온은 폐허가 된 폰네시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메리의 어깨에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브라운이 우울한 표정의 레온을 보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꽤 피곤한 여행길이 될 테니 지금은 눈 좀 붙이세요. 두 분 모두요.”
마차는 울퉁불퉁한 길 위에서 끝도 없이 흔들렸다.
마치 평탄하지 않은 여정을 예고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