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15장. 적진(2)
그 시각, 길라.
피타와 헤리스가 피스 포레스트 초입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 왔습니다.”
얼기설기 얽혀든 나무뿌리 밑을 한참 달렸더니 온몸에서 지하 특유의 묵은 흙 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헤리스가 킁킁, 제 옷깃에 스민 지독한 냄새를 맡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병사들이 갇혀 있을 만한 곳은 딱 한 곳뿐이에요.”
피타가 저 멀리 보이는 예배당을 가리켰다.
“통곡의 탑.”
“통곡의 탑?”
“예, 길라의 감옥 탑이죠.”
그 맞은편에 위치한 지상 10층 규모의 탑 안에 폰네시의 병사들이 갇혀 있을 가능성이 컸다.
헤리스가 침착하게 통곡의 탑을 바라봤다.
죄인들을 가둬두는 감옥 맞은편에 예배당이 있다니.
“백작의 의도가 꽤나 상냥하군.”
“뭐, 원체 너그러운 분이시니까요.”
심성이 곱고 온화한 성향의 막심 크루네도 범죄에 대한 처단만큼은 확실했는데, 통곡의 탑에 갇힌 죄인들은 보통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각자의 결말을 맞이했다.
예배당에서 울려 퍼지는 신성한 부름은 죄인들의 심신을 어지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죄를 저지른 이에게 회개할 기회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일종의 희망 고문인 셈이죠.”
말을 마친 피타가 익숙한 인기척에 뒤돌았다.
두 사람을 위해 미리 영주성 내부에 진입했던 카터 할아범이 돌아온 것이다.
“으! 어어!”
“고마워, 할아범. 뒤따라 붙은 사람은 없었지?”
“우!”
길라 영주성에서 카터 할아범의 존재감은 먼지보다도 못했다.
자신을 대신해 눈과 귀가 되어주어야 했기 때문에 피타도 겉으론 그와 가까이 지내지 않는 척했다.
할아범도 그 편을 원했다. 할 일 없이 사는 것보다야 피타를 위한 삶이 더 보람찼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우리 관리병들의 옷이네요. 이걸 입으면 진입하기가 쉬워질 거예요.”
“서두르게, 피타.”
두 사람이 변복을 마친 후 당당하게 통곡의 탑으로 향했다.
피타가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제 얼굴을 알고 있었기에, 조심해야 하는 만큼 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이쪽으로 붙어요, 헤리.”
“알겠네, 페티.”
대충 서로를 불러댄 두 사람이 수많은 인원 뒤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예배당 근처는 늘 경계가 삼엄한 곳이다. 게다가 폰네시의 병사가 맞은편 통곡의 탑에 붙잡혀 왔으니 지켜볼 감시 인원이 두 배는 더 필요한 것도 당연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피타와 헤리스가 수많은 관리병 사이에 섞여들었다.
“내부엔 오래전 이곳에 수감된 흉악한 범죄자들도 제법 있다.”
얼굴만 보면 본인이 범죄자 같은 험악한 인상의 관리장이 큰 소리로 목청을 돋워 오늘만 세 번째, 같은 당부의 말을 이었다.
“폰네시의 병사들과는 대화 금지, 또 접촉 금지이다!”
다른 구역에 있던 관리병들을 죄 통곡의 탑 보안 때문에 끌고 왔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관리장이 더욱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주의 사항을 일러주었다.
“그들은 총 세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
소지품 검사를 받던 헤리스와 피타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알아두어야 할 정보였다.
“부상이 심각한 이들과 항복한 병사들, 그리고 적개심이 강한 위주의 그룹으로 나뉘어 있으니 각자 맡은 영역에 따라 대처하도록. 알겠나?”
“예!”
사뭇 긴장 어린 대답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카터 할아범의 기지로 두 사람은 손쉽게 검열을 마치고 내부로 진입했다.
길라의 관리병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은 덕이다.
“어이, 거기 신참들.”
허리에 매고 있는 녹색 끈이 경력을 나타냈다.
피타와 헤리스가 천천히 뒤돌자 명단을 든 한 상급 병사가 다가왔다.
“뭘 하다가 늦었지? 너희 신참들은 진즉에 이동했을 텐데.”
그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피타를 바라봤다.
상관 앞에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자칫하면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헤리스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사이, 피타가 해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집결지를 착각했습니다. 예배당 앞쪽에 병사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쪽인 줄 알았지 뭐예요.”
“아, 과연. 그쪽이라면 항상 병사들이 많으니 오해할 수도 있겠군.”
“죄송합니다. 저희는 어디로 가면 되죠?”
“부상병들이 수감되어 있는 저층을 살피면 된다. 이미 늦었으니 서두르도록.”
“옙! 감사합니다!”
툭툭.
상급 병사가 헤리스의 어깨를 토닥이며 금세 뒤돌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병사들을 일일이 챙기려니 그의 피로도가 한숨 한 번에 물씬 전해지는 듯했다.
“덕분에 넘겼어, 페티.”
“이곳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으니까요. 슐츠에서 잘 부탁드립니다, 헤리.”
피타가 금세 미소를 거두고 뒤돌았다.
잡담으로 허비하기엔 너무도 시간이 부족했다.
***
내부는 기본적인 감옥 형태였다.
독방 여러 개를 지나 규모가 큰 곳으로 점차 이어졌는데, 감옥이라고 해서 어둡고 척박한 환경인 건 아니었다.
“저기 병사들이 모여 있어.”
“예, 한두 명이 아니네요. 보통 다섯 명 정도만 배치되는데.”
“…꼼짝도 안 할 것 같은데. 이제 어쩌지?”
“흠….”
폰네시의 부상병들은 가장 규모가 큰 감옥 한군데에 수감 중이었다.
참혹한 전쟁의 결과로 오는 동안 수많은 부상병이 목숨을 잃은 탓도 있고, 부상을 당했음에도 주의 그룹에 포함된 이가 많은 탓도 있었다.
피타가 각 복도 끝, 감옥 앞, 층계를 오르는 중앙 앞쪽에 배치된 인력들을 모두 살폈다.
“대부분 오랫동안 이곳을 관리한 이들이네요. 잘만 하면 다루기 쉽겠는데요?”
그들은 충성스러운 부하들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이곳 생리에 익숙해진 몸이었다.
말릴 틈도 없이 피타가 성큼성큼 그들 앞으로 향했다.
헤리스는 눈치껏 피타와 딱 붙어 자연스럽게 걷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음? 신참인가?”
“예배당 앞을 집결지로 착각하는 바람에 배치가 늦어졌습니다.”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상급 관리병이 주변을 살폈다.
늘 동경해오던 폰네시 병사들 앞에서 이런 대우를 받자니 기분이 묘했다.
“늦었으니 저희가 놈들을 살피겠습니다.”
피타가 조심스레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이만 테라스에 가서 쉬시지요.”
예배당을 마주 보지 않는 통곡의 탑 바깥쪽엔 엔드해를 바라볼 수 있는 영지 끝이 맞닿아 있다.
범죄자가 많지 않은 곳이라 이곳을 도맡은 관리병들은 주로 그곳에서 신선놀음을 하며 시간을 축내길 즐겼는데, 이는 병사들 사이에서만 공공연히 퍼져 있는 일종의 아지트인 셈이었다.
‘아버지께선 영지의 부조리도 때론 바로잡지 않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지.’
다만 영주가 될 자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을 뿐이다.
피타가 대답 없는 상급 병사를 향해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부탁드립니다. 저희 몫까지 일을 봐주셨으니 되갚을 기회를 주세요.”
무턱대고 인사를 해대니 나이 많은 헤리스도 똑같이 허리를 굽실거릴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신참의 행동에 상급 병사가 당황한 듯 주변을 살폈다.
폰네시 병사들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들은 전혀 움직일 수 없어 눈알만 굴릴 뿐이었다.
“음, …그래. 모두가 너희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낭비했지.”
내심 축축한 해풍이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지던 참이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놈들이 탈출할 리는 없고.
테라스엔 전날 밤 숨겨놓은 맛 좋은 청포도주와 부인이 구워준 타르트가 몇 개나 있었다.
“제가 처리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곧장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하지만.”
“만일에 대비해 힘을 아끼셔야지요. 감시 정도는 저희가 할 수 있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이런 중요한 시기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상급 병사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좀이 쑤셔 죽을 뻔했는데 잘된 일이다.
그가 배치되어 있는 여러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모두 잠시 모이도록. 긴히 회의할 일이 있다.”
이런 일은 걸릴 때를 대비해 다 함께 저질러야 마땅하다.
상급 병사가 구석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던 동료들을 이끌고 복도 끝 테라스로 향했다.
괜히 투덜거리면서도 그들의 입가에 걸려 있는 미소는 숨길 수 없었다.
“…갔네.”
“갔죠.”
늘 긍지 있는 자들이라 칭찬해왔던 길라의 병사들이지만 세계 어딜 가나 그들의 실력보다 앞서는 건 늘 인간의 욕망이다.
헤리스가 입을 헤벌린 채 너무도 쉽게 텅 비어버린 주변을 살폈다.
피타가 멋쩍은 듯 뒷머릴 긁으며 헤리스를 툭, 쳤다.
“…누구 아는 자가 있습니까?”
다만 집중해야 할 일이 있다.
헤리스도 피타의 목소리에 병사들을 확인했다.
“음….”
온전히 눈을 뜨고 있는 자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병사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부상병이라더니…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들의 모습에 헤리스가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상태가 좋지 않아 알아보기가 어렵군그래.”
침묵의 기사단장인 자신이 길라의 하급 관리병 옷을 입고 제 부하들을 살피는 이 사실이 믿고 싶지 않았다.
헤리스가 다시 한번 천천히 한 사람씩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았는지 온 피부가 불에 녹아 본래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정신을 잃은 자들이 태반이었다. 설령 목숨이 붙어 있다 하더라도 적군과 눈빛을 주고받을 일은 전혀 없었다.
“…게일?”
하지만, 그 모든 이가 저와 오랜 시간 함께 지낸 동료들이다.
머리칼 색과 짙은 눈썹 하나만으로도 누군지 알아보는 게 가능했다. 그가 기사단장을 바라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게일,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가!”
헤리스가 철창 가까이 다가가려 할 때였다.
“끄아아아아아!”
넓은 복도에 울려 퍼지는 단말마의 비명이 있었다.
피타가 헤리스의 어깨를 급히 붙잡았다. 이제 밖에선 고함과 함께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입니다!”
독한 검기가 느껴졌다.
이처럼 강력한 기운을 내뿜는 자가 주변에 가까이 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암살자예요! 우리 길라엔 그런 자가 없다고요.”
“이런 젠장!”
누군가가 암살자를 보냈다.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폰네시의 병사들을 노리고 이곳을 찾은 게 분명하다.
“몸을 숨겨야 합니다.”
“하지만!”
게일의 눈동자가 정확히 헤리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상처에 짓이겨진 입은 쉬이 열릴 줄 몰랐지만 그의 눈은 분명 기사단장을 알아본 것 같았다.
“저자는 공자님과 함께 폰네시를 떠났던 병사일세! 공자님의 거취를 알고 있을지 몰라!”
“알게 된다 해도 헤리스 당신이 다치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요. 자, 어서!”
게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대로 가다니, 안 된다. 붙잡고 싶었다.
하나 오래도록 지독한 연기를 들이마신 후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네, 게일!”
도와줄 수 없다. 또다시 뒤돌아야만 한다.
침묵의 기사들이 익숙한 그 목소리에 하나둘 눈을 뜨는 순간에도 헤리스는 결국 내달렸다.
“이쪽으로!”
살기가 어느새 등 뒤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피타가 아무 감옥 문이나 열고 급하게 헤리스의 등을 떠밀었다.
끔찍한 상황을 마주한 그가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온몸에 퍼져 있는 기사의 기운을 거두고 인기척을 지우자 복도 끝에서 천천히 누군가의 발소리가 울려 퍼지는 게 느껴졌다.
“…….”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짓누르는 살기가 퍼져 나왔다.
피타가 인상을 찌푸리고 폰네시의 병사들을 노리는 암살자를 살폈다.
철창 안에선 놈의 손끝만 간신히 보였다.
“이봐.”
암살자가 입을 열었다.
“레온 몬데이어는 어디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