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15장. 적진(3)
그 낮은 저음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암살자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병사들을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살폈다.
“아무도 모르는 건가?”
폰네시의 병사들을 찾아 기껏 이곳까지 왔는데, 얼굴이 녹아 일그러진 병사들이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검은 투구와 검은 망토. 어둠으로 온몸을 휘감은 녀석은 분명 데로니스 놈이었다.
“다시 묻겠다. 레온 몬데이어는 어디에 있지?”
설령 안다 해도 말할 수 없다.
퉤, 가장 앞에 있던 게일이 온 힘을 다해 놈에게 침을 뱉었다.
“…명을 재촉하는군.”
암살자의 검 끝에선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깥은 고요했다. 누구도 뒤따라오지 못했다. 이는 테라스 밖에 있던 모든 이가 죽었음을 나타내는 일이었다.
맞서 싸우거나 도와줄 이가 전혀 없다. 한 사람만 빼고.
“…….”
게일이 천천히 눈동자만 굴려 헤리스가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세간에는 주군을 배신하고 그 목숨을 취한 놈이라 알려져 있지만 소문을 믿는 이는 많지 않았다.
직접 폰네시에서 겪고 지켜본 기사단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도움이 안 되네.”
하지만, 역시 오지 않는다.
이곳에 부상당한 폰네시의 병사들이, 살아 있는 기사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게일이 두 눈을 감았다. 검은 투구로 모습을 가린 암살자에게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
병사들은 검을 다루는 이들답게 그의 실력이 얼마만큼 지독한지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쓸모없는 것들은….”
암살자가 검을 꺼내 들었다.
누구도 제가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되어선 안 된다. 더 이상의 실수는 없어야 한다.
레온, 그 몬데이어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선 반드시 놈의 목숨을 끊어놔야 했다.
“필요 없다.”
제가 나고 자란 무리, 즉 <검은 투구단>이 가장 중요히 여기는 철칙을 중얼거리며 그가 쾅! 철창을 걷어찼다.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손쉽게 그 단단한 강철이 찌그러졌다.
“살지 마. 그럴 가치도 없으니.”
검은 투구단의 암살자, 다크탄이 일말의 자비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병사들의 목숨이 하나하나 끊어졌다.
사방에 피가 튀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상대방을 손쉽게 죽이는 배려 따윈 전혀 없었다.
다크탄이 마지막으로 제게 침을 뱉은 게일을 내려다봤다.
“억울해하지 마라. 공자 역시 네놈들의 뒤를 금방 뒤따를 것이다.”
묵직한 밑창으로 맥이 뛰는 목을 거세게 짓밟았다.
그러고도 절명한 게일의 목을 단숨에 베어내며 방금 전 죗값을 단단히 치르게 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지.”
지켜보는 피타가 아랫입술을 씹었다. 저자는 암살자이며 살수이기도 하다.
사람의 목숨을 해하는 검 끝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누군가가 레온의 행방을 알고 있을까 기대하는 낌새도 없었다.
그저 사람을 죽이고 싶어 죽이는 행동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총 오십이라고 했나.”
그의 생기 없는 눈동자가 위층을 살폈다.
길라에 잡혀온 폰네시의 포로는 총 오십. 그중 전장에서 도망친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총력전, 그 시기에 운이 좋아 근방을 순찰하던 병력과 공자를 따라가다 되돌아오던 행렬들 뿐.
“…전부 죽여주지.”
순식간에 다크탄이 기척도 내지 않고 내달렸다.
아직 살아 있는 폰네시의 병사들이 있는 곳, 통곡의 탑 상층부를 향해서였다.
“…헤리스 경.”
검을 붙잡은 헤리스의 손등 위에 핏줄이 돋아났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번에도 구하지 못했다.
헤리스가 마음에 드는 살심을 다스리기 위해 호흡을 골랐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뻗쳐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버텨내야 한다. 지금 들킬 순 없다.
레온을 찾아야 하니까.
녀석이 레온을 죽이기 전에, 공자가 위험에 휩싸이기 전에!
“괜찮으십니까?”
모든 상황을 지켜본 피타가 조심스레 헤리스를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제 기운과 싸우고 있었다. 분노를 담은 대기사의 살기란 숨기기 쉬운 게 아니었다.
“…병사들은 이미.”
“알고 있어. 이 끔찍한 피비린내는 몇 번을 맡아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으니 말이야.”
헤리스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감옥에서 고요함이 밀려들었다.
숨 쉬는 소리마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완벽한 침묵이었다.
“놈이 레온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나도 들었어.”
“이제 어쩌죠?”
그때 위층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이어졌다.
쿵쿵, 장정들이 복도를 내달리는 진동도 이어졌다.
암살자가 위층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그는 들킬까 걱정하는 태도도 전혀 없었다.
“저놈… 데로니스에서 보낸 걸까요?”
“아마 그럴 거야. 폰네시의 병사들을 저처럼 고민 없이 죽여버릴 세력은 이 땅에 이제 그들밖에 없을 테지.”
“서둘러야겠는데요.”
“그래, 피타.”
사달이 났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건 불가능해졌다.
헤리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음의 빚을 지우자고 위험을 감수하는 건 안 될 일이다.
“공자님이 위험해.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이제 병사들은 구할 수 없다.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지만 그들을 구할 방법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정보를 얻기도 글렀구요.”
“그래, 죽은 자들은 말이 없을 테니 말이야.”
두 사람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서둘러 마다비아로 가야겠어.”
“예, 뒤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이 있습니다. 따라오세요.”
피타가 열쇠를 이용해 문을 열었다. 몇 번의 달칵거림 끝에 손쉽게 문을 열자 뒤편에서 땅이 울리는 게 느껴졌다.
“이런. 우리 병사들이 오는 모양인데요?”
“빠져나가는 길은 저쪽인가?”
“예, 이쪽으로!”
헤리스가 피가 새어 나오는 다리를 꽉 묶어내며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어딜 가려고?”
맞은편.
어둠이 내려앉은 독방 감옥 안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헤리스를 붙잡았다.
“헤리스 타린!”
검붉은 머리칼에 그보다 옅은 하얗게 세어버린 수염.
지독한 인상을 한 남성이 감옥 안에서 두 눈을 희번덕희번덕 부라리며 헤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헤리스 타린! 내 평생의 원수!”
두 사람이 주의를 경계하며 소리 지르는 남성을 살폈다.
피타가 헤리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지만 헤리스 쪽에서도 누군지 알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누구지, 너는?”
낯이 익지만 정체를 알 수 없다.
몇 번이나 인상을 찌푸리며 머릿속을 헤집어 봤지만 전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놈이 쾅! 철창을 내려치며 잔뜩 흥분해 소리 질렀다.
“네놈이 이 감옥에 날 처넣고도 못 알아봐!”
“처넣었다고? 내가?”
“그래! 지난 십오 년 전!”
놈이 독기 품은 표정으로 다시 한번 철창 사이를 노려봤다.
“네가 날 이곳에 가두었지! 아이를 납치했단 이유 하나로 말이야!”
아이를 납치했다니.
기억을 더듬던 헤리스의 표정이 곧 일그러졌다.
오랜 세월에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얼굴이 상해 쉽지 않았으나 헤리스는 십오 년 전이란 힌트에서 해답을 얻었다.
“네놈, 아직 살아 있었나?”
그곳에 갇혀 있는 건 워렌을 납치했던.
“물론이지! 이날만을 기다렸다!”
마다비아의 물장수 데칸이었다.
***
반갑지도 않았지만 서로 간에 근황을 묻고 안부를 나눌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헤리스가 데칸의 성난 외침에도 고개를 돌렸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날 데려가라, 헤리스 타린!”
방금 전까지 원수를 운운하던 놈이 잘도 부탁해댄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헤리스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피타의 팔을 붙잡았다.
놈이 철창 안에서 큰 소리로 헤리스를 불러댔다.
“이러다 들키겠어요.”
“정말 걸리적거리는군.”
“대체 무슨 사이십니까? 저놈은 우리 길라에서 가장 오래도록 붙잡혀 있는 놈이거든요.”
“고작 어린애 하나 납치한 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자기소개 한번 끝내주는군. 들었다시피 저놈은 어린애를 납치해서 팔아넘겼어. 나와는 별 관계 없는 사이고.”
“내가 이렇게 오래 갇혀 있는 게 너 때문인 걸 모를 줄 알고!”
“하지만 저렇게 소개하는데요?”
“아니라니까, 글쎄.”
데칸이 콧김을 내뿜으며 씩씩거렸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이대로 그냥 두었다가 무슨 소리를 할지도 모르고.
“풀어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행방을 나불거릴지도 모르잖아요.”
“그래, 꼬맹이! 너는 말이 통하는 놈이로구나! 어서, 어서 날 풀어다오. 난 이미 죗값을 치르고도 남았다고!”
그의 눈이 아주 오래간만에 번쩍거렸다.
이곳을 벗어나 새 출발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가슴팍이 들썩거렸다.
다만, 그런 흥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헤리스가 검을 뽑아 들고 데칸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건 걱정 말게. 이 자리에서 말을 못 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으니까.”
철창 사이로 살벌한 검날이 들이밀어졌다.
“죽이면 그만 아니겠는가?”
어차피 십오 년 전 이미 죽었어야 할 몸이다.
혹시 몰라 죽을 때까지 이곳에 가둬두라 명했지만 이렇게 명줄을 재촉하다니.
헤리스의 형형한 눈빛이 데칸에게 향했다.
겁도 없이 실컷 떠들어대던 놈이 꿀꺽, 침을 모아 삼켰다.
“…네놈이, 아니, 루시오 몬데이어 그놈이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날 이곳에 처박아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어디 한번 더 떠들어 보시지.”
“날 살려주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거야!”
“정말 못 들어주겠….”
“그 아이에 대해 궁금하지 않나? 내가 그놈이 어떻게 마다비아에 왔는지 알고 있다고!”
티 내지 않으려 했으나 눈빛에 스치는 감정은 막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헤리스가 멈칫했다. 뒤편에 서 있던 피타가 황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저놈이 지금 마다비아라고 했잖아요. 우리 말을 들은 모양인데요?”
“그래, 꼬맹이. 너희 이곳을 빠져나가 마다비아로 가려 했지? 내 다 들었다!”
데칸은 이곳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병사들에게 정보를 사들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분명 헤리스 타린, 저놈의 고향 슐츠로 가려 할 테고?”
십오 년이란 세월은 그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길라의 병사들은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 데칸을 더 이상 범죄자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 친분을 이용해 하루도 빠짐없이 폰네시에 대한 정보를 익혀왔다.
헤리스 타린과 루시오 몬데이어. 자신을 이곳에 붙잡아둔 두 놈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난 마다비아에서 나고 자랐어. 그곳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지. 내가 비록 이곳에 갇혀 있지만, 그 바닥에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고!”
더 이상 이런 곳에서 삶을 허비할 순 없다.
지은 죄가 있다면 차라리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마다비아로 데려다주지. 그곳에서 슐츠로 향하는 걸 돕겠어!”
데칸이 스스로 검날에 목을 가져다 댔다.
“날 죽여도 상관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에 갇혀 십오 년의 세월을 보냈다.
더는 이렇게 숨 쉴 수 없다. 아무 기대도 없는 내일이 오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지금 내 목숨을 살려준다면….”
헤리스가 내뻗은 검 끝에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점점 더 깊게 목을 긋는 데칸의 눈빛은 죽음을 각오한 것 이상의 분노가 어려 있었다.
“내 목숨을 다 바쳐 너희를 돕도록 하지.”
이 구렁텅이에 떠민 것도, 이 구렁텅이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구원할 것도 오직 한 사람뿐이다.
“날 데려가라, 헤리스 타린!”
고요만 남은 통곡의 탑에 데칸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