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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89화 (89/133)

89화

15장. 적진(4)

우려했던 상황은 수도 덴버그에 입성할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왕명에 응하기 위해 수도로 집결하는 행렬이 워낙 많기도 했고, 소집일 내에 결국 한곳으로 모여야 했기에 수도 검문이 가벼운 덕도 있었다.

“문제는 크라운 캐슬에서의 신원 확인이겠네요.”

덴버그 초입에선 각 가문에 보내진 하일 데로니스의 명령서와 신분 확인서만 살폈을 뿐, 마차에서 내릴 일이 없었다.

브라운이 피로에 물든 레온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잠시간 걱정을 뒤로 밀어두었다.

아무렴, 오늘 밤만큼은 공자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제가 고민해 볼 테니 아가씨께선 푹 쉬세요.”

“응, 고마워.”

“그럼 이만.”

덴버그는 지난 몇 세기 동안 왕이 머무르는 도시 역할을 제대로 해왔다.

중앙 지역 중에서도 한가운데,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왕의 성이 도시 어느 곳에서나 눈에 띄는 구조였다.

“바로 저기구나, 크라운 캐슬.”

레온이 창밖 먼 곳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황금빛 성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새 왕이 된 하일 데로니스 대공이 있다. 어쩌면 사냥개 놈들의 우두머리일지도 모를 자.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한참을 바라보다 레온이 곧 낡은 커튼을 쳤다.

바깥과 완전히 분리되고 나자 방 안엔 어둠이 밀려들었다.

레온이 손수 방 안에 놓인 잔등에 불을 밝혔다. 그러자 바깥바람에 창문이 잘게 흔들렸다.

유리와 나무틀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레온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숨 막혀….”

부피가 큰 옷을 입을 때는 그리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제 몸보다 몇 배나 되는 넉넉한 품의 로브나 망토를 걸칠 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하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레온은 가슴을 압박하는 사슴 가죽이 갑갑해 깊게 숨을 내쉴 수조차 없었다.

“…으윽.”

몇 겹을 껴입었는지 모르겠다. 여성의 옷은 특히 그랬다. 온통 몸을 조이고 가두는 것들밖에 없었다.

더 이상은 못 버틸 듯해, 레온이 굳게 닫힌 문을 확인하고 천천히 제 몸을 감싸고 있는 것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러다 허리가 끊어지겠어.”

오늘 밤, 일행들 모두 이곳을 찾지 않을 것이다.

브라운과 케인은 주변 정찰을, 워렌은 바로 옆방에서 모든 상황에 대비 중이었다.

이미 잠자리에 든 메리가 깬다면 모를까. 그녀를 제외하면 이곳을 멋대로 찾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레온의 발아래 풍성한 치마가 흘러내렸다.

갑갑한 사슴 가죽과 옷가지 전부를 벗어내자 짓눌렸던 숨이 겨우 흘러나왔다.

‘…대체 얼마 만에 벗어보는지 모르겠네.’

가죽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몇 번을 빼곤 성장해오며 레온은 늘 몸을 가려야 했다.

최근 몇 달간은 너무 바빠 씻는 것조차 사치였다.

“…살이 좀 빠졌나.”

레온이 제 몸을 내려다봤다.

가슴과 허리 아래는 가죽에 쓸려 벌써 진한 흉이 남아 있었다.

늘 짓눌려 있는 납작한 배에도 상처는 깊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흉터.”

가슴과 가슴 사이, 심장이 위치한 곳 위에 여전히 남아 있는 상흔이 레온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존재를 잊지 말라는 듯 흉터는 이따금씩 피부 위에 진한 고통을 남겼다.

레온이 가는 손가락으로 흉터를 천천히 훑었다. 조금만 스쳐도 불에 덴 것처럼 고통이 밀려들었다.

“놈이 날 찾고 있을 거야.”

그놈은 전문적인 암살자였다.

검은색 투구를 쓰고, 인어들을 입에 올리던 놈들의 대화가 아직까지 잊히지 않았다.

“곧 있으면 달빛을 볼 주기랬지.”

녀석들은 또다시 인어 사냥을 계획하고 있다.

인어들이 물 밖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노리고 바다 곳곳을 살피고 있을지 모른다.

‘…놈들이 사용했던 건 뭘까?’

타티아나의 기억에서 엿본 그들의 사냥 방식은 이전까지는 전혀 상상도 못 한 방식이었다.

마치 자연 환경까지 조종한 듯한 주변 현상….

인어들은 무언가에 시야를 빼앗기고 판단력마저 흐려졌다.

짙은 섬광과 바다를 얼어붙게 만드는 것도 있었다.

“그게 뭔지 알아내야 해.”

그들이 무슨 방식으로 인어를 사냥하는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피해를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만에 하나 데로니스와 대적할 만한 힘을 얻지 못할 경우, 남아 있는 인어들만이라도 살리는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경우는 절대 없었으면 좋겠지만….’

레온이 한숨과 함께 걱정을 밀어냈다.

내일부턴 모든 순간에 아르테미스 잭이 되어야 한다.

집중해도 모자랄 순간에 해주로서의 책임감을 끼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난 아르테미스 잭이다.”

아르히 잭 후작의 넷째 영애, 어려서부터 병약했지만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왕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이곳에 온.

레온이 몇 번이나 사실을 되새기며 드레스를 정돈했다.

“잘 부탁해.”

화려함의 극치를 담은 은빛 드레스를 쓰다듬으며 레온이 사슴 가죽을 잘 접어두었다.

이곳 적의 심처에서 레온 몬데이어로 존재하는 건 너무도 위험할 테니.

“괜찮겠지?”

당분간 남장은 불필요했다.

***

“벨, 내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도록 해.”

아르르르!

벨의 동그란 눈이 매서워졌다. 화가 난 거다.

“그래도 하는 수 없어.”

후작 부인의 애완 고양이쯤으로 우겨볼까 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벨의 크기는 더 이상 고양이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과 빛나는 새하얀 털, 군데군데 돋아난 설호족의 특성은 누가 보아도 심상치 않았다.

“벨, 벨을 데려가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양이라고 소문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래, 어쩌면 빼앗길 수도 있고.”

“그렇게 겁을 주면 어떡합니까, 워렌 경?”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빼앗길 리가 없잖아요. 벨이 저래 보여도 얼마나 흉폭한….”

으르르르!

“아니, 흉폭하다는 말은 혹한 짐승에 대한 제 편견일 뿐입니다. 일반화를 용서하세요, 벨.”

“아무튼 여기 머무르는 게 안전하다, 벨.”

브라운과 워렌, 두 인간 오라비들이 벨을 어르고 달래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을 수 없다.

레온이 위엄을 잃지 않기 위해 겨우 입술을 꽉 깨물고 시선을 돌렸다.

“…….”

“…….”

벨을 보호하기 위해 여관에 남기로 한 케인과 눈이 마주쳤다.

레온의 얼굴에서 곧장 웃음기가 거두어졌다.

공자의 표정은 무척이나 냉랭했다. 케인은 입 안에서 굴리던, 벨을 잘 보호하겠다는 말조차 차마 할 수 없었다.

“자, 두 분께선 그럼 이만 마차에 오르시지요.”

벨과 원만한 합의를 봤는지 한결 표정이 가벼워진 브라운이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메리가 먼저 올라서고, 레온도 그 뒤를 따랐다.

일행들의 가장 선두엔 역시나 아티쿠스 역할의 워렌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벨을 잘 부탁드려요.”

“실력은 비등하니 밥이나 잘 챙겨주면 되겠어요.”

“흠흠, 일이 생기면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케인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브라운까지 마차에 오르고 나자 마차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정말 어마어마한 인파네요.”

여관을 나서며 상가 거리로 빠져나오자마자 수많은 행렬이 일행들을 맞아주었다.

인파에 합류하기 위해 한참이나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레온이 유심히 왕의 영역을 살폈다. 백성들은 축제라도 맞이하는 듯 신이 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돈 많은 귀족들이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사치를 부릴 테니까요. 그들로선 좋은 기회인 셈이죠.”

“총 몇이나 온다고 했지?”

“슐츠와 이그리아의 대영주를 제외한 각지 귀족들, 총 삼백여 명이 모일 예정입니다.”

“…어마어마하네요, 정말.”

“그렇죠, 부인?”

“그, 그렇구나. 호, 호호호!”

일곱 번째 후작 부인인 몽브리텔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브라운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메리도 제 실수를 깨닫곤 곧장 부채로 입을 가렸다.

평생 유모로 살아왔으니 귀족 부인 행세가 쉽지 않을 만도 했다.

“곧 있으면 신원 확인이 있을 테니, 주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걱정 마시게, 행정관.”

“예, 부인. 어려울 일은 없을 겁니다. 새로운 후작 부인이시니 그들도 아는 게 없을 거거든요.”

브라운이 창밖을 바라보는 레온에게도 강조했다.

“아가씨께서도요. 폰네시의 귀족이니 더욱 경계할 겁니다.”

“난 걱정하지 마. 안 걸릴 자신 있으니까.”

“예? 그럼 다행이지만….”

레온은 브라운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뭘 보시는 거지?

브라운도 그 시선을 따라 창밖을 살폈다.

광장에서 성의 입구까지는 수많은 행렬과 구경 나온 인파로 빈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검문이 꽤나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마차는 한자리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는 중이었다.

특별한 건 없는데, 발 디딜 틈도 없는지라 모여든 사람들도 잘 움직일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예?”

무언가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

레온이 눈을 좁게 뜨고 정면에 위치한 성벽 위 관리병들을 유심히 살폈다.

일정한 간격으로 잘 배치되어 있는 이들 중 유일하게 규칙을 무시한 자가 있다.

미묘하게 어긋난 간격이 의아했다. 이처럼 중요한 날 저런 실수를 하게 내버려두진 않을 것 같은데.

‘뭔가 있을지도 몰라.’

레온이 그 주변부터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인파를 따라 구석진 성벽 아래 골목까지 시선을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주변을 감시 중이던 창병 뒤편으로 아주 빠른 움직임이 있었다.

수많은 인파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레온의 눈엔 정확히 잡혔다.

누군가가 창병의 목을 조르고 납치하는 모습이.

‘대체 누구지? 누가 저런 짓을.’

데로니스의 영역 한가운데, 그중에서도 가장 수많은 눈길이 예정된 오늘. 이처럼 대담하게 일을 벌일 자는 많지 않았다.

순간, 레온의 푸른 눈이 입만 가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먼 곳이었지만 분명 저쪽에서도 이곳을 보고 있었다.

그때, 정체를 가린 의문의 남자가 레온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 미친놈인가? 이런 상황에.

“어디 갔지?”

“예?”

사라졌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주 찰나였지만 납치된 창병과 의문의 남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레온이 다급하게 창문에 달라붙었다. 어느새 인파에 뒤섞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브라운이 레온에게 물었다.

곧 있으면 검문 차례다.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서둘러 해결해야 했다.

“그게….”

레온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머무르고 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레온도 이게 정말 현실인지 아닌지 믿기 어려웠다.

“아가씨, 곧 우리 차롑니다. 사람들이 와요.”

메리가 손을 뻗어 재빨리 레온을 앉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게 중요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워렌이 말에서 내리자 브라운도 미소를 장착하고 문을 열었다.

“어디에서 온, 어느 가문의 행렬인지 밝혀 주십시오.”

긴장과 피로가 뒤섞인 병사의 목소리 끝에 브라운이 침착하게 답했다.

“우리는 폰네시에서 온.”

검문소 주변 일대에 모여들었던 이들의 표정이 일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잭 후작가의 행렬입니다.”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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