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90화 (90/133)

90화

15장. 적진(5)

폰네시에서 왔다고?

어디선가 날 선 목소리가 이어졌다. 병사들의 움직임이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마차 밖에 서 있던 워렌과 브라운의 주위로 두 배나 되는 인원이 달라붙었다.

마차 주변도 수많은 창병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모두 내려 주셔야겠습니다.”

전혀 공손하지 않은 어투였다.

그들은 적진에서 온 적을 대하듯 예리한 눈길로 일행들을 살폈다.

“아버지는 이미 왕가의 일원이 되기로 결정을 내리셨다.”

“맞습니다. 여기 이게 그 증거입니다.”

브라운이 그들을 향해 하일 데로니스의 서명이 적힌 소집 명령서를 내밀었다.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는 이곳에 소집될 일도 없다.

‘이걸로 적의를 거둘 순 없겠지만 최악의 상황만큼은 막아야 해.’

이런 때일수록 침착할 필요가 있었다.

브라운은 준비해온 신원 확인서를 내어주며 일행들에 대해 설명했다.

“안에는 이번에 새로 후작 부인이 된 몽브리텔 부인과 넷째 영애 아르테미스 잭 아가씨께서 타고 계십니다.”

“그 외의 다른 인원은 없소?”

“우리가 전부입니다. 후작께서 가장 아끼는 두 분을 이곳에 보내 왕께 성의를 보이려 애쓰셨죠.”

병사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새로 들인 부인과 막내딸을 이곳에 보낸 게 사실이라면 후작의 각오를 믿어줄 만했다.

덴버그.

적의와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적진 한복판에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주었으니 말이다.

“하나 제대로 확인해야겠소.”

병사들이 다시 한번 신호를 주고받았다. 그러곤 바로 워렌과 브라운이 그들에게 붙잡혔다.

“무, 무슨 짓이오?”

“모두가 거쳐 갔던 검문이니 억울해 마십시오.”

그들이 손을 들어 워렌과 브라운의 몸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숨겨온 무기는 없는지, 또 해가 될 만한 물건은 없는지 크라운 캐슬에 입성하기 전 제대로 살펴봐야만 했다.

‘이래서 시간이 많이 소요된 거야.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다 살펴보느라.’

브라운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차 내부를 살폈다.

냉랭한 레온과 걱정 어린 메리의 얼굴을 보고 나니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그래도 설마.’

여인의 몸을 함부로 살필 순 없을 것이다.

브라운이 서서히 마무리되어 가는 상황에 주변을 살폈다.

위협이 될 만한 어느 것도 나오지 않자 병사들의 경계심이 한풀 꺾인 것이 느껴졌다.

좋아, 이대로만….

“문을 열어라.”

그러나 말릴 틈도 없이 병사들이 거칠게 마차 문을 열어젖혔다.

워렌이 표정을 굳히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브라운도 병사들을 돌아봤다.

“무슨 짓이오. 안에는 후작 부인과 후작의 넷째 영애가 타고 있소!”

“하나 예외는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때, 검문소 안에서 머리를 하나로 바짝 묶어 올린 여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이 그녀를 향해 고개 숙였다.

워렌은 가까이서 느껴지는 묵직한 기운에 여기사의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직감했다.

“제가 직접 몸수색을 할 겁니다.”

브라운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같은 여인이니 상관없겠지요?”

***

이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왕의 성이라고는 하지만 귀족의 몸을, 게다가 혼인도 안 한 여인의 몸을 살펴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 시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데로니스 폐하의 안전이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선다면 반역이기에 더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들이 단호하게 두 사람을 막아서며 마차 내부에 진입했다.

강압적으로 메리와 레온을 붙잡는 손길에 단단히 아랫입술을 씹어야만 했다.

“이 아이는 몸이 약하니, 그리 함부로 대하지 말아주게!”

억센 손길에 양팔이 붙들리고도 메리는 레온을 걱정했다.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친모도 아니신데, 상당히 마음을 써 주시는군요.”

가능하다면 저자의 목을 찢어놓을 것이다.

레온이 냉랭한 눈빛으로 기사를 노려보았다.

“좋습니다. 후작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영애를 조심히 살피지요.”

여기사가 몇 번의 걸음만으로 레온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치마를 붙든 레온의 손목을 거세게 그러쥐었다.

“이쪽으로.”

일행들이 인상을 구겼다. 레온 역시 불편한 감정을 숨길 줄 몰랐다.

다만, 그들에게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다.

폰네시의 귀족들이 어떤 기분인지 따위는.

“그곳에 살았으니 분명 들어 봤겠지요, 레온 몬데이어란 이름을.”

검문소 내부.

병사 여럿을 내쫓은 여기사가 쾅, 나무문을 닫고 억센 힘으로 레온의 등을 밀어 넣었다.

이번 행렬을 위해 간이로 지은 건물이라 외벽 틈이 꼼꼼하지 못하게 마감되어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벗은 몸을 그대로 바깥에 보일 수도 있을 만한 구조.

이런 곳에 레온을 몰아붙인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직접 보고 말을 나눠 봤을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꼭 당신만 한 체구일 겁니다.”

그녀는 의심하고 있었다.

일행들이 잭 후작가의 일원일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듯했다.

“폐하께서 그놈이 새로운 신분을 얻어 이 서대륙을 활보할 거란 사실을 예상치 못하셨을까요?”

여기사가 얼굴을 가린 레온의 앞으로 아주 가까이 밀착했다.

푸른 눈동자를 숨기기 위해 레온은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챙이 넓은 모자도, 얼굴을 가리는 부채 따위도 지금 이 순간은 기댈 만한 것이 못 된다.

“그에 딱 맞는 가문이 있다는 것도 너무 쉽게 알아냈답니다.”

그녀가 레온의 얇은 턱을 쥐어 잡았다. 힘을 주어 고개를 들게 만드는 그 손길에 레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뭐라도 생각해내야 해.

“겁이 나십니까? 비밀이 들킬까 봐?”

그건 두려움에 휩싸인 귀족 아가씨의 모습 그대로였다.

여기사가 미소 짓는 사이, 두 눈을 질끈 감은 레온이 손을 들어 그 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갑옷의 냉랭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들킬 순 없다.

비록 은백색 머리칼은 기다란 가발 안에 숨겼지만, 이 푸른 눈동자만큼은 어떻게 해도 숨길 수 없다.

레온이 자신의 손으로 제 옷가지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무, 무슨.”

“믿지 못하시는 거잖아요. 지금.”

레온이 어깨를 감싸는 장식 끈과 화려한 수가 놓인 슬리브, 허리 양쪽을 묶어놓은 리본을 하나하나 풀어내며 모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내 드레스가 바닥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레온 몬데이어는 남자가 아니던가요?”

여기사의 눈길이 흔들렸다.

고스란히 드러난 어깨와 그 아래 이어져 있는 부드러운 곡선은 완벽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드러낸 나신에 여기사는 숨이 막혔다.

“당신의 눈엔 내가 레온 몬데이어로 보이나요?”

레온이 그녀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의심이 문제일 만큼 눈앞에 서 있는 자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절대 꾸며낼 수 없는 몸의 곡선이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었다.

“이 이상의 수치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귀족이 제 시종이 아닌 자들에게 이리 쉽게 온몸을 내보이는 건 어디에도 없는 법도였다.

제길, 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사가 주먹을 움켜쥐고 결국 한쪽 무릎을 굽혔다.

크나큰 결례를 저질렀으니 영애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송구합니다, 아가씨.”

“됐습니다. 드레스 입는 거나 도우세요.”

이 일로 당분간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그쪽이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레온이 여기사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푸른 눈동자엔 싸늘함만이 남아 있었다.

***

“…그래서 정말 다 벗으셨다고요?”

메리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차 내부엔 오직 두 사람뿐이었지만, 여기저기 떠벌릴 만한 주제는 전혀 아니었다.

“응, 어쩔 수 없었어. 메리도 봤잖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 벗어날 수 없었을걸.”

“…그야 그렇지만.”

“설령 언젠가 이 비밀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더 이상 그게 내 문제가 되진 않을 거야.”

어차피 루시오 몬데이어는 죽었고, 폰네시는 내일 밤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된다.

더 이상 폰네시의 후계자도 아닌데 굳이 남자로 살아야 할 이유는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여인이란 게 밝혀지면 이전과는 다른 걱정을 해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무슨 걱정? 위협은 위협일 뿐이야. 나를 위협하는 자는 결국 죽게 될 거고.”

제 검에 의해서든, 워렌에 의해서든. 그 누구라도 목숨을 노리는 자들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메리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아직 어린 레온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오래도록 곁에 머물며, 아무것도 모르는 이 아가씨를 지켜주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멜… 아니,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그들이 함부로 대하진 않았나요?”

마차가 드디어 크라운 캐슬의 정문을 넘어섰다. 레온이 곧장 제정신을 차렸다.

“…….”

“응? 왜 대답이 없지? 그 새끼들이 험악하게 굴었어요?”

“아니, 내게 관심도 없었어.”

진정 자식이 된 것처럼 살갑게 구는 레온의 모습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메리는 이런 상황에 행복을 느끼는 것마저 불손한 것 같아 재빨리 표정을 지우고 상황을 설명했다.

“새로 맞은 후작 부인에 대한 정보 같은 건 그들에게도 전혀 없었으니까. 신원 확인서와 무기를 갖고 있지는 않은지, 뭐 그런 것 정도만 확인했어.”

“다행이네요. 어머니의 몸까지 수색했다면 오늘 밤 벨을 풀어놨을지도 모르겠거든요.”

“호호호! 그 녀석이라면 내 복수를 제대로 해줬을 테지.”

때마침 마차가 멈추어 섰다.

더 이상 마차와 말의 진입이 불가한 성채의 입구였다.

그곳엔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앞서 도착한 귀족들이 들뜬 표정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환영 연회가 있다더구나.”

브라운을 통해 전해 들은 소식을 레온에게 전하며 메리가 난생처음으로 황금 성을 눈여겨봤다.

이토록 화려한 곳은 처음이다.

폰네시, 그 석벽의 성 역시 규모가 대단하고 위엄이 넘쳤으나, 온화한 그곳의 분위기와 이곳은 너무도 다른 느낌이었다.

“부인, 아가씨.”

앞서 있던 워렌과 브라운이 말을 넘기고 곧장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고 몽브리텔 후작 부인 역할의 메리가 발을 내디뎠다.

뒤이어 크라운 캐슬을 밟은 건 바로 레온이었다.

“아르테미스.”

워렌이 바짝 다가와 섰다.

질질 끌리는 묵직한 드레스를 붙잡을 틈도 없이 레온이 그 단단한 팔에 팔짱을 꼈다.

이미 앞서 검문을 끝낸 상태라 일행들은 어렵지 않게 성문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수많은 귀족이 모여든 드넓은 다리 위에 도착했다. 다리를 지나면 드디어 왕이 머무는 아성이다.

레온이 일행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며 입술을 씹었다.

팔짱 낀 워렌의 어깨도 평소보다 단단하게 굳어 있는 것 같았다.

“크라운 캐슬….”

드디어 왕의 성, 하일 데로니스의 영역에 도착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사는 곳.’

그리고 수천수만의 죄 없는 영지민들을 모두 불태워 죽인 범죄자가 머무르는 곳.

‘반드시 죽일 거야.’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죽어간 이들의 목숨을 기리며, 레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드디어 적진 한복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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