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15장. 적진(6)
귀족과 그의 가신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은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행들은 연회장 입구에서 브라운을 다시 만났다.
레온은 마주한 브라운의 미소에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인파가 상당합니다.”
왕의 주최로 만찬이 예정되어 있다. 연회장 전체는 수많은 귀족을 수용할 수 있을 만한 규모였다.
“다들 축제 같네.”
“아무래도요.”
모두 폰네시처럼 데로니스 세력과 반대편에 섰던 건 아니기 때문에 오늘을 즐길 만도 했다.
반역으로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지 이제 스무 해 남짓.
지난 시간 동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전 상태를 유지하며 숨 막히는 대치전을 치러왔기 때문에 양측 모두 피로감이 상당했다.
“…저기 길라의 막심 크루네도 와 있습니다.”
브라운이 레온만 들릴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크루네….’
레온이 모자 안에 시선을 숨기고 그를 바라봤다.
길라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데로니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건 진작 들어 알고 있는 소식이었다.
그들이 후방에서 지원만 했더라도, 길을 열어준 월랜드와 맞붙기만 했더라도 폰네시가 이처럼 단숨에 무너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피타는?”
“그러고 보니 보이지 않네요? 길라의 후계자라 분명 참석해서 새 왕에게 얼굴을 비출 거라 예상했는데….”
그들의 선택을 단순히 배신이라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지난 탄일 연회에서 힘이 되어 주겠노라 약조한 피타의 다짐이 마음에 걸렸다.
‘길라의 뜻은 언제나 폰네시와 함께할 것이라고 했지.’
그런 사람치고 막심 크루네는 주변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며 이 자리에 자연스레 녹아든 모습이었다.
피타가 없는 것은 의외였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다.
아무리 여장을 하고 얼굴을 가렸다 하더라도 정체를 알고 있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줄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 옆에 있는 건 누구야?”
“월랜드의 군주, 에이션 월랜드입니다.”
그의 주변엔 상의를 탈의한 월랜드의 전투병들이 있었다.
늘 차고 다니는 긴 창칼은 들이지 못했지만 그들의 몸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협으로 느껴질 만큼 단단해 보였다.
“마다비아를 통해 엔드해를 건너온 전투 부족이 모여 있는 곳이죠.”
그들이 뿌리내리도록 도움을 준 영주 월랜드 가문을 배반하고 그 땅을 차지한 건 모두가 아는 역사였다.
고마움을 담아 이름만은 계승하겠다며 역대 군주들이 대대로 월랜드의 성을 쓰는 것만 봐도 비인간적인 행태는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북부인들이 동부인을 싫어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응, 재스퍼 경은 자다가도 월랜드 얘기만 나오면 화를 내신대.”
“그럴 만도 하네요.”
북부와 동부의 오랜 악연은 먼 옛날로 거슬러 가야 할 정도로 오래됐으나 오늘 이곳에서 그리 중요한 주제는 아니었다.
레온이 시선을 거두었다. 아티쿠스 역할의 워렌이 곧장 레온의 곁으로 다가와 팔을 내밀었다.
먼 곳에서부터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무리가 있다.
느낌상 우딘 가문일 거란 예측에 브라운도 재빨리 메리의 곁에 다가섰다.
“아르테미스를 만나본 적은 없다고 하니, 내가 잘 둘러댈게.”
예전이긴 하지만 어려서 우딘 가문에서 지낸 적이 있는 아티쿠스는 가능한 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들이 놀란 표정으로 바짝 다가올 때였다.
“하일 데로니스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한 귀족의 가신이 호들갑을 떨며 제 주인에게 왕의 등장을 알렸다.
다가오던 우딘 일가가 재빨리 몸을 뒤틀었다. 어떻게 해서든 오늘 이 자리에서 새 왕의 눈에 들어야 한다.
“…….”
“…….”
곧이어 연회장 내부에 삼엄한 긴장이 흘렀다.
내문 주변에 서 있던 중무장한 기사들이 칼 같은 자세로 창을 휘두르고 발을 굴렀다.
“모두 예를 갖추시오!”
우렁찬 기합과 함께 문이 열렸다.
높다란 내문과 엇비슷할 정도로 체구가 큼직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놈이 하일 데로니스.’
성성한 백발을 바짝 정돈해 넘긴 왕이 위엄 어린 모습으로 단상을 향했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주변을 압도하는 장악력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주의를 주는 브라운이 아니었다면 레온 홀로 그를 노려보고 있을 뻔했다.
겨우 그놈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레온이 아랫입술을 뜯을 듯 씹어댔다.
“모두 고개를 들어라.”
이곳에 모인 자들은 하일 데로니스를 왕으로 섬기기로 결정한 자들이다.
서대륙의 정통성을 흐트러뜨린 장본인, 그 반역자를 주인으로 받들고 그의 충실한 종이 되기 위해 크라운 캐슬에 모여들었다.
레온은 그의 말 한마디에 모두가 따르는 모습을 보며 깊은 분노를 느꼈다.
“이곳에서 서대륙의 가치 있는 자들을 만나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
그간 서대륙의 패권자로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건 그 커다란 땅덩이, 동북부를 제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오늘이 왔다.
그곳에서 설쳐대던 대영주 몬데이어 공작을 괴멸시키고, 그의 휘하에 있던 놈들도 스스로 제 발밑에 기어들어 왔다.
“오늘 이 연회는 아둔했던 그대들을 용서하는 나의 자비이기도 하며, 새로운 기회의 장이기도 하다.”
새 왕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바로 그 아래 대기하고 있던 월랜드의 군주 에이션과 길라의 영주 막심이 무릎을 꿇고 바짝 고개를 조아렸다.
“너희의 잘못된 판단은 지난 이십 년간 이 서대륙의 평화를 깨뜨렸다.”
그들은 폰네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영지의 주인으로서, 데로니스 세력과 반대 노선을 취해왔음을 이곳에 모인 모두가 알았다.
“트레톨라 놈들은 이 서대륙의 불균형을 초래한 놈이다.”
가이아 제국의 마지막 왕가를 언급하며 새 왕이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수도 덴버그와 더불어 오직 동북부, 몬데이어 놈들이 머무는 폰네시만을 주력으로 여겼지.”
그의 입에서 가문의 이름이 나오자 레온이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서대륙엔 수많은 영지가 존재한다. 서부 이그리아와 남부 슐츠, 그 모든 곳을 연결하는 각 도시와 변경 지역 모두가 이 서대륙의 주인공이지.”
하나 그럼에도 트레톨라 왕가는 폰네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몬데이어 일가가 다섯 군데로 나뉘어 있던 영지를 하나의 영역으로 통합하고, 동북부 전체를 아우르는 서대륙의 최대 영주가 되는 동안에도 그저 관망할 뿐이었다.
“그런 권리가 끊겼으니 몬데이어 놈이 새 가이아를 만들고자 헛짓거리를 시도한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엄숙한 분위기에도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이아 제국을 위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세력을 모으려 노력해 온 루시오의 의지가 폄하되었다.
“하지만 그놈이 어찌 되었지?”
대영지 폰네시는 불바다가 되었고, 루시오는 결국 끝을 맞이했다.
하일 데로니스가 꿇어앉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눈동자엔 분노만이 어려 있었다.
“가이아의 뜻을 이어나가겠다는 허울 좋은 망상을 펼치던 그놈이 어찌 되었는지 말해보라.”
고개 숙인 막심 크루네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열심히 눈알을 굴리며 눈치 보던 에이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머리맡에서 느껴지는 하일 데로니스의 분노는 위협적이었다.
“에스델!”
그가 고함치자, 대기 중이던 여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검문소에서 레온과 일행들을 압박했던 기사였다.
“그걸 가져와라.”
데로니스의 명이 떨어지자 에스델이 곧장 뒤돌았다.
만인의 시선은 다시 꿇어앉은 배반의 주역들에게 향해 있었다.
“폰네시의 주인이 되길 원하는가?”
감히 대답할 수 없다.
내일 밤 있을 귀족 회의에서 모든 게 결정 나겠지만, 그 전까지 폰네시는 누구도 욕심낼 수 없는 땅이었다.
다만, 월랜드의 군주 에이션만큼은 달랐다. 그는 폰네시의 주인을 자처할 만큼 이번 총공세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폐하, 월랜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폰네시를 함락할 수 없었을 겁니다.”
중앙 덴버그와 동북부 폰네시는 세로로 길게 나 있는 그레이트 대협곡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곳을 지나지 않고 육로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은 월랜드와 길라가 유일했다.
에이션이 바짝 고개를 쳐들고 두 눈을 부릅떴다. 드디어 공로를 인정받을 순간이 왔다.
“월랜드가 길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우리 병력의 보탬이 없었다면 그 거목 지역을 절대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겁니다!”
만회가 필요했다.
문명을 찾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엔드해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겨우 자리 잡은 땅을 잃고 싶지 않아 근방에 자리한 폰네시에 충성을 맹세했다.
선대 군주들이 그리해왔듯 따랐을 뿐이다. 그저 월랜드에 살았을 뿐이란 말이다.
“월랜드의 성의를 보이기 위해 그 땅을 폐하께 내어 드렸습니다.”
하지만 에이션은 그 자리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월랜드에 머무르는 이들은 더 이상 엔드해를 건너야 하는 전투 부족도 아니고, 문명과 거리가 먼 미개한 원주민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 제게 폐하의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폰네시를 갖고 싶다. 비록 지금은 불에 젖어 제 기능을 상실했지만 그 땅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지역적 이점을 따진다면 엔드해 진출과 동대륙 접근이 가까운 동북부 땅을 반드시 가져야만 했다.
“그래, 월랜드의 공로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하일 데로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사 에스델이 데로니스 가문의 휘장으로 둘러싼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용기 있는 그대에게 하사하지.”
월랜드의 군주, 에이션의 두 눈이 번쩍였다.
이 수많은 귀족 사이에서 새 왕이 직접, 그것도 눈엣가시 같은 길라의 영주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제게 하사품을 내리는 것이다.
에이션이 냉큼 두 손을 뻗었다. 모두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궁금한 듯 체면도 잊고 고개를 쭉 빼내느라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쪽으로.”
워렌이 레온의 손을 붙잡아 제 앞으로 끌었다.
시야를 방해하는 그 무엇도 사라지자 하일 데로니스가 대기 중인 여기사 에스델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직접 에이션에게 다가가 휘장을 거두었다.
“열어보게. 나의 선물을.”
하일 데로니스의 묵직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에이션이 곧장 커다란 상자를 열어젖혔다.
“으, 으윽!”
상자가 열리자마자 그가 비명과 함께 나자빠졌다.
잠자코 곁을 지키던 막심 크루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귀족으로 가득 찬 연회장 안으로 병사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검은 투구를 뒤집어쓴 그들은 완전 무장한 데로니스군이었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앞에서부터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병사들이 날카로운 창으로 귀족들을 위협하자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새 왕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지독한 악취가 이어졌다. 에이션이 떨어뜨리며 보존제에 담겨져 있던 무언가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두 번의 기회 따위는 없다.”
하일 데로니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주변을 모두 장악하는 지독한 기운은 레온도, 워렌도 익히 알고 있는 드래곤의 살기였다.
“내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해라!”
믿고 싶지 않다. 이게 사실이어선 안 된다.
하나둘 모두가 꿇어앉는 사이, 우뚝 선 레온은 똑똑히 보았다.
“이놈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하일 데로니스의 발치 아래,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루시오의 머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