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92화 (92/133)

92화

15장. 적진(7)

“아르테미스!”

워렌이 충격으로 떨리는 레온의 손끝을 힘 있게 붙잡아 끌었다.

순식간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레온의 눈가엔 눈물이 어려 있었다.

‘…루시오가.’

그의 머리가 저곳에 있다.

루시오는 온전한 죽음마저 맞이하지 못했다.

심하게 훼손된 머리는 푸른 눈이 아니었다면 레온 역시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르테미스, 고개를 숙여.”

워렌이 곧장 레온을 품에 안고 그 여린 몸을 부축했다.

버틸 힘마저 없었다. 눈앞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레온은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했다.

“아르테미스….”

얼마나 레온이라 불러주고 싶은지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워렌은 허망하게 눈물 흘리는 레온을 보며 턱 끝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두 똑똑히 보아라. 헛짓거리를 하면 내가 너희들에게 이런 비참한 최후를 선사할 것이다.”

하일 데로니스가 새카만 검 끝으로 에이션의 턱을 치켜세웠다.

“반기를 들어도 좋아.”

군주를 지키기 위해 달려들던 그의 전투원들이 단번에 제압당했다.

순식간이었다. 여기사 에스델은 가차 없이 그들의 목을 베어냈다.

여기저기서 피가 튀고 끔찍한 비명이 난무했다.

“원하는 게 죽음뿐이라면 반드시 내 뜻을 거역해라.”

지금껏 평생에 걸쳐 누려왔던 귀족으로서의 대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곳 크라운 캐슬에서 군림하는 자는 오직 한 사람, 바로 하일 데로니스뿐이었다.

“아둔한 자들이여! 폰네시의 주인이 되길 바라는가!”

모두가 죽었다. 에이션이 피 웅덩이 한가운데서 공허한 표정으로 하일 데로니스를 응시했다.

아마 그의 시선도 에이션에게 닿았던 것 같다.

겁도 없이 폰네시를 요구한 놈에게 되돌려줄 건 살기밖에 없었지만.

“오늘 이 순간부터 폰네시는 다시 이전의 다섯 영지로 나뉘게 될 것이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중 동부 중앙은 슐츠의 타린 가문과 이그리아의 큐어 가문이 통치하며, 나머지 세 곳의 주인은 내일 밤 정해질 것이다.”

왕좌에 오르기까지 일등 공신이었던 두 가문의 동북부 진출을 허용한다는 뜻이었다.

귀족들이 절망했다. 무엇을 위해 이곳까지 왔는데.

“다시는 이 땅에 새로운 몬데이어를 만들지 않겠어.”

하지만.

완전 무장한 병사들이 내뿜는 위협과 하일 데로니스의 분노, 그리고 살고 싶다는 욕망이 한데 뒤섞여 반발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직 이 땅에 몬데이어가 살아 있다.”

“……!”

“그놈을 잡아오는 자에겐, 북부 전부를 넘겨주지.”

척박한 땅, 혹한의 끝.

악명 높은 서대륙의 북부 땅 따위는 그간 누구도 탐내지 않았다.

하지만 동대륙 진출이 용이한 곳이기도 했다. 절기만 잘 활용한다면 찢어진 폰네시와 견줄 만큼 값어치가 있는 땅일 것이다.

‘북부로 눈길을 돌리려는 거야. 모두가 그곳을 눈여겨보도록!’

놈의 계략은 지독히 계산적이었다. 폰네시를 잃은 귀족들의 관심을 한곳에 모으고, 그들 전부가 북부를 견제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북부는 서대륙 전체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 불의 군단의 일거수일투족은 제 운명과 함께 놈들의 감시 대상이 됐다. 재수 없게도.

“레온 몬데이어, 그놈을 잡아 오는 자에겐….”

그때였다.

“꺄아아아악!”

“바, 반역이다!”

넓은 연회장 창가 벽부터 희뿌연 연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창병들이 쓰러졌다. 연회장 주변을 지키고 외부인의 침입을 막아내던 이들이 모두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나둘 툭툭,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보며 귀족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폐하를 지켜라!”

“전군! 모두 제자리로!”

에스델의 고함을 시작으로 데로니스군이 단상 주변에 진을 치고 새 왕을 보호했다.

하일 데로니스는 매서운 눈으로 희뿌옇게 차오르는 연기를 살피고 있었다. 그 출처가 어디인지 찾아내야 했다.

“창밖을 살피고 문을 봉쇄해라! 누구도 빠져나가선 안 돼!”

그의 외침에 곧장 병력이 연회장 벽면을 둘러쌌다. 달려 나가려던 귀족들의 발길이 붙잡혔다.

“제발, 문을…!”

“켁, 크윽… 숨을, 숨을 못 쉬겠어!”

귀족들이 바닥을 기어 다녔다.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그들이 켈록거리며 데로니스군 발치에 매달렸다.

빠져나가야 한다. 여길 나가야만 살 수 있다.

하일 데로니스가 이곳에 모인 전부를 독살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귀족들이 너도나도 언성을 높이며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폐하! 가셔야 합니다!”

쨍그랑!

그 순간 때를 노린 듯 창밖에서 수많은 인파가 밀려들었다.

그들은 단단한 유리창을 깨고 연회장 안에 침투해 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여기사 에스델의 독촉에 하일 데로니스가 그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결국 발길을 되돌렸다.

수많은 병력이 귀족들을 밀쳐내고 내문을 감쌌다.

하일 데로니스가 빠져나가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알 수 없는 자의 고함이 이어졌다.

“반역자는 이 서대륙을 통치할 수 없다!”

눈과 귀를 멀게 하는 지독한 연기 속에서도 그 외침은 분명히 퍼져나갔다.

“가이아 제국, 왕가의 정통 후계자가 살아 있는 한!”

망토로 입을 가린 레온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희뿌연 연기 속에 홀로 서 있는, 발치에 기어 다니는 귀족들 위에 우뚝 선 그의 자태가.

“하일 데로니스는 어디까지나 반역을 일으킨 서대륙의 배반자일 뿐! 더는 누구도 반역에 동참하지 말라!”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왕가의 후계자가 살아 있다고?

늘 적법성을 따지는 귀족들의 혈통 놀이야말로 하일 데로니스가 가장 견제하는 것 중 하나였다.

“모두 저놈을 잡아라!”

“놓쳐선 안 돼!”

데로니스군이 빠르게 들이닥쳤다. 중무장한 그들이 한가운데에 서 있는, 알 수 없는 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자가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곤 가장 앞선 놈과 힘을 겨루기 위해 검을 휘두르자 연기가 걷히며 얼굴이 드러났다.

‘…그놈이야!’

검문소 앞에서 창병을 납치했던 놈, 바로 그놈이었다.

레온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자가 재빠른 몸짓으로 달려드는 데로니스군을 일격에 몰아내고 곧장 뒤돌았다.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금세 단상까지 달려간 놈이 루시오의 머리를 챙겨 들고 외벽으로 뛰어올랐다.

“안 돼!”

어째서 아버지를!

레온이 무언가에 홀린 듯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수난을 겪게 할 순 없다. 여기서 빼앗길 순 없단 말이다.

“아르테미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하지만 저들이 아버지를!”

“나도 봤어. 따라와!”

워렌이 레온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 주변을 돌아보니 모든 귀족들이 붙잡히고 있다.

메리와 브라운도 빠르게 두 사람을 뒤따랐다.

“대기실을 통해 나가면 됩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연회장 우측에 마련된 대기실을 통해 나간다면 성의 접견실과 이어져 있을 것이다.

워렌이 다가오는 데로니스군을 걷어찼다. 매달리는 귀족들을 밀어내는 것 역시 그의 역할이었다.

레온과 메리가 묵직한 치맛자락을 잡고 분주히 달리는 동안 어느새 대기실 앞에 도착했다.

브라운이 일행들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그들을 뒤따라온 귀족들이 레온을 밀치고 대기실 안으로 달려들었다.

크라운 캐슬은 이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아비규환 상태였다.

“이런, 데로니스군이 이쪽으로 옵니다!”

메리가 가장 먼저 대기실 안으로 발길을 옮기고, 그 뒤를 워렌이 바짝 뒤따랐다. 대기실 내부는 이미 탈출하는 인원으로 혼잡스러웠다.

워렌이 레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얇은 손목을 붙잡고 잡아끄는 순간, 데로니스군이 브라운에게 검을 겨누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안 돼!”

레온의 푸른 눈이 브라운을 돌아봤다. 문을 닫고 그 앞을 막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서 가세요, 당장!”

브라운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다. 신분을 드러내선 안 되니까.

레온이 주먹을 움켜쥐고 뒤돌았다. 발길에 엉켜드는 치마를 붙잡고 달렸다.

시끄러운 비명 속에서도 브라운의 목소리가 똑똑히 전해졌다.

“반드시 찾아가겠습니다!”

지금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그 다짐을 믿는 수밖에 없다.

“가자!”

브라운 디카르테라면, 반드시 해낼 테니까.

***

성 외부로 빠져나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탈출한 귀족들을 따라 데로니스군이 빠른 속도로 무기를 들고 뒤쫓아 왔다.

“그놈들도 분명 이 주변에 뒤섞였을 거야.”

“예, 수상한 움직임을 찾고 있습니다.”

레온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메리가 그런 레온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여기 제가 있어요.”

눈앞에서 마주한 참혹한 광경은 도저히 잊힐 것 같지 않다.

죽음 후에도 그런 수모를 겪게 만들다니.

그들이 저지른 짓은 두 눈을 감아도 눈앞에 생생했다. 메리 또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걱정 마. 내가 반드시 되찾아올 거니까.”

그놈들이 창병을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레온이 혼잡한 주변을 살폈다.

같은 옷을 입었다고 그 정체를 감출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은 데로니스군과 반드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아티쿠스, 오른쪽 중정 온실 너머!”

귀족들을 잡아들이며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을 뒤쫓는 데로니스군과 달리 그쪽 창병들의 움직임이 수상했다.

복면을 쓴 자들은 미끼다. 그들은 이곳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 투입된 자들이었다.

전력으로 도망치는 사람과 데로니스군의 발길을 사로잡는 움직임을 구분하지 못할 리 없었다.

“아, 아가씨!”

느린 메리가 붙잡힐 뻔했다.

워렌이 주변에 나뒹구는 부러진 창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돌격해오는 데로니스군을 밀어내며 메리를 보호했다.

날카로운 날붙이 따위 없어도 그만이다. 워렌은 그들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으윽….”

“메리, 괜찮아?”

익숙하지 않은 화려한 귀족의 치맛자락이 메리의 발을 붙잡았다.

안 그래도 느릴 수밖에 없는 늙은 몸이 오늘따라 더욱 힘에 부쳤다. 메리가 주변에 점점 모여드는 데로니스군을 보며 숨을 몰아쉴 때였다.

“아르테미스 니이이임!”

기사 케인이 주먹을 휘두르며 주변에 달려오는 놈들에게 몸을 날렸다.

그 거대한 몸집에 밀려나간 데로니스군이 주변에 나뒹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움직임을 확인한 워렌이 다 닳아빠진 창 막대를 내던졌다.

푸른 검, 레온과 워렌의 손에 용의 검이 되돌아왔다.

“벨은?”

“여기 있습니다. 오는 동안 좀 힘들었을 거예요.”

레온의 물음에 케인이 냉큼 메고 온 바구니를 열어 보였다.

그 안에서 털을 부풀린 어린 짐승이 뾰족한 눈으로 이를 드러냈다. 몹시 분노한 표정이었다.

“케인, 브라운이 붙잡혔어.”

다만, 지금 중요한 건 벨의 심리 상태가 아니었다.

“가서 브라운을 되찾아와.”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공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케인이 두말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함께 돌아와.”

“예!”

레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바로 메리에게 바구니가 넘어가고, 케인이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뛰쳐나갔다.

두 사람의 조합이라면 반드시 빠져나올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아가씨.”

고개를 돌린 레온을 기다리고 있는 건 메리의 진한 녹안이었다.

“먼저 가세요. 가서 반드시 영주님을 돌려받으세요.”

“…뭐? 절대 안 돼.”

“하지만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거예요.”

이대로라면 짐이 되고 만다.

크라운 캐슬을 탈출하는 일도, 루시오를 되찾는 것도 모두 실패할 것이다.

메리가 바구니를 꾹 움켜쥐었다. 그 안에서 맹수의 발톱을 닮은 벨의 앞발이 툭 튀어나왔다.

“걱정 마세요. 벨이 절 지켜줄 거예요.”

“하지만….”

메리가 레온의 손을 밀어냈다.

주변에 모여드는 병사들을 보며 결국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에 가 있어. 내일 정오가 되기 전까지는 반드시 돌아갈게.”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두 사람이 달려 나갔다.

끔찍한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는 적진 한가운데, 메리는 어느새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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