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93화 (93/133)

93화

15장. 적진(8)

수상한 무리는 빠르게 중정을 지나 도로 정문으로 향했다.

그곳을 지키고 있는 경비 인력과 맞붙는 것 역시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은 계획적으로 이 일을 준비한 거야.”

애초에 빠져나가야 하는 인원을 제외하곤 모두 이곳에서 희생을 자처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이번 작전을 계획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메리는 못 봤지?”

“수상한 움직임을 따라 병력 대부분이 성 밖으로 이동했습니다. 시기만 잘 맞았다면 무사히 빠져나갔을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들이 시간을 벌어준 덕에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크라운 캐슬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레온이 고개를 끄덕이곤 먼지를 뒤집어써 엉망이 된 제 드레스를 살폈다. 우선 이것부터 벗으면 좀 좋겠는데.

“망토 좀 줘봐.”

달리다 말고 레온이 상가의 좁은 골목길로 몸을 숨겼다.

뒤따라오는 녀석들은 없지만 이곳은 크라운 캐슬과 인접해 있었다. 워렌도 재빨리 몸을 밀어 넣고 레온을 되돌아봤다.

“공… 자님!”

레온이 드레스를 벗어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팽개쳤다.

금세 얇은 속치마 하나만 입은 모습에 워렌이 황급히 뒤돌았다.

“뭘 놀라고 그래. 내가 여장했다고 진짜 여자로 보여?”

“죄송합니다. 그럼 다시 볼까요?”

“그럴 건 또 뭐야. 누가 따라오는지 잘 봐둬.”

에스델 그자가 어찌나 꽉 묶어뒀는지 혼자 벗기가 꽤 불편했다.

낑낑거리는 걸 들키지 않으려 레온이 퉁명스럽게 떠들어댔다.

“이런 드레스를 입고 돌아다니면 얼마 안 가 붙잡히고 말걸?”

“하지만 갈아입을 옷이 없지 않습니까?”

“있어. 그러니까 너도 얼른 벗어. 금붙이 같은 건 다 버리고.”

레온이 아무렇게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워렌에게 받아든 망토를 뒤집어 어깨 위에 걸치고 가지고 있던 장식 끈으로 허리를 조였다.

갈라진 망토 사이로 새하얀 속치마가 조금 보이는 것만 빼면 귀족이라고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레온이 상가 뒤편에 널어놓은 때 묻은 앞치마도 꿰어 입었다.

“이거면 돼.”

화려한 드레스는 역시 맞지 않는다. 한결 가벼워진 차림새로 레온이 워렌의 환복을 도왔다.

상가 주인이 뒤편에 나와 본다면 옷가지를 도둑맞았단 사실에 놀랄 것이다.

“잠시 여기 계십시오. 위쪽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워렌이 좁은 골목 위를 바라봤다.

창가 위에 가려놓은 천막을 밟아 건물 위까지 빠르게 오르고 나자 주변이 한눈에 보였다.

“어때? 뭐 좀 보이는 게 있어?”

내려둔 푸른 검을 제대로 허리춤에 밀어 넣으며 레온이 물었다.

먼지가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인파가 몰려 있는 곳을 알 수 있다.

“생각이 있다면 지금 광장을 빠져나가려 하진 않을 겁니다.”

고로 인파를 끌어들이는 저들은 또다시 미끼를 자처한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워렌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수상한 짐마차를 확인했다.

절기와 맞지 않은 쌓아 올린 장작, 그리고 어두운 골목길로 방향을 잡는 모습까지 충분히 의심스럽다. 저들은 아니다.

워렌이 다시금 그 주변을 확인했다. 그들과 반대로 인파 속에 침착하게 이동하는 행인 몇몇이 있다.

“찾은 것 같습니다.”

다만 제 눈에 보이는 움직임을 데로니스군이 확인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데로니스군도 움직입니다. 서두르시죠.”

단번에 뛰어내린 워렌이 검을 뽑아 들고 레온을 바라봤다.

레온도 준비를 마쳤다. 곧장 달려들 기세로 호흡을 가다듬는데, 어째 저쪽에서 반응이 없다.

“가자며, 뭐 해!”

“…공자님은 너무 느립니다.”

“응?”

골몰을 거듭한 워렌이 레온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단숨에 레온을 잡아끌어 어깨 위에 들쳐 멨다. 또다시 세상이 뒤집혔다. 이놈이 진짜!

“꽉 잡으세요.”

지금은 루시오를 되찾는 게 우선이다.

워렌은 더 이상 용서 따위 구하지 않았다.

***

“제길!”

수상한 행적을 쫓기 위해 공중전을 택한 두 사람의 움직임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워렌의 빠른 움직임도, 주변을 경계하고 눈에 띄지 않도록 길을 찾아내는 레온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사방에 적이 너무 많았다.

“이대로라면 우리가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겠어.”

워렌이 레온을 내려주었다. 천막 아래 몸을 숨기고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데로니스군은 중요한 행사에서 말도 안 되는 비밀을 드러낸 적을 추적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대로 움직인다면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물론, 자칫 놈들의 죄를 대신 뒤집어쓸 수도 있다.

“공자님, 제가 놈들을 따돌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위쪽 상황을 살피던 워렌이 레온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을 벌 테니 공작 저하를 되찾으세요.”

“내가 시간 안에 못 찾으면?”

워렌의 실력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적진 한복판에서 홀로 미끼를 자처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데로니스 놈들에게 쫓기는 판에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놓치고 말았다.

이 넓은 덴버그 안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반드시 찾으실 수 있습니다.”

다만 워렌에겐 믿음이 있었다.

“집중해서 공작 저하를 떠올려 보세요.”

“…떠올리라고?”

“용의 기운은 죽음에도 갇히지 않습니다.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레온의 몸에도 그 피가 흐르고 있다.

아직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분명 용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늦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근방에서 위협적인 발소리가 이어졌기에,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곧장 워렌이 건물 위로 뛰어올랐다. 금세 사라지고 만 그 뒷모습을 보며 레온이 주변을 살폈다.

‘용의 혈족이라….’

레온이 천천히 피가 도는 제 심장 위를 문질렀다. 이 몸에도 루시오, 그가 남긴 피가 흐르고 있다.

느낄 수 있을까?

레온이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제발….’

찾아야 한다. 찾고 싶었다.

수없이 많은 바다의 기억과 해주의 분노 말고도 레온의 안엔 본연의 마음도 남아 있었다.

새 왕이 그 수많은 귀족 앞에서 능욕당한 루시오의 머리를 내던졌을 때, 그때부터 지금껏 몸 안에 분노가 잘게 남아 있었다.

레온은 두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간절함과 분노가 한데 뒤섞여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데로니스 놈들은 워렌을 따라간 것 같은데.’

더 이상 주변에선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워렌이 크라운 캐슬과 반대쪽 방향으로 놈들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레온이 숨을 몰아쉴 때였다. 생각을 털어내고도 검을 쥔 손이 떨렸다.

“…검?”

푸른 검이 어둠 속에서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손에 쥔 레온만이 느낄 수 있는 아주 미약한 떨림이었다.

“설마.”

푸른 검은 다이아 스틸로 만들어졌다. 이는 오직 용의 혈족만이 다룰 수 있는 검이다.

그렇다면, 혹시.

“네가 알아낼 수 있어?”

레온이 재빨리 검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허공에 검을 내뻗고 천천히 움직이자 미묘하게 강해지는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싸워서 이길 수는 없어.’

레온이 어두운 골목길을 빠르게 가르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들이 어떤 목적을 가졌고, 어떤 의도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알아내는 것보다 우선할 건 반드시 루시오를 되찾는 일이었다.

그 전까지 섣부른 행동은 금지다. 어쩌면 워렌이 돌아올 때까지 그곳에서 들키지 않는 게 우선일지도 모르겠다.

‘이 실력으로 맞서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몸을 떨어대는 검을 바라보며 레온이 발길을 서둘렀다.

이제 주변은 더욱 어두컴컴한 영지민들의 마을 근처였다.

광장과는 정반대로 이미 데로니스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라 그런지 누구도 나와 보는 이가 없었다.

‘막다른 길?’

빠르게 달리던 레온의 발길이 멈추었다. 그도 그럴 게 눈 앞에 보이는 건 붉은 돌벽이었다.

주변 어느 곳을 둘러봐도 놈들이 몸을 숨겼을 만한 곳이 보이진 않는다.

레온이 다시 건물 위쪽을 둘러봤다. 불빛 하나 없는 일반적인 가정집의 모습뿐 주변을 살피는 사람조차 없다.

‘하지만 여전히 검이 울리고 있어.’

이 주변에 있다. 그들은 없을지라도 검이 반응하는 걸 보니 루시오 만큼은 반드시 이곳 어딘가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레온이 천천히 검을 들고 기운을 읽을 때였다.

막다른 골목 앞에 놓여 있는 수레를 보자, 쥐고 있기 힘들 정도로 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문?’

집 안의 하인들이나 오고 갈 법한 허름한 뒷문이 보였다.

허드렛일을 위해 자주 드나드는 곳인 만큼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게다가 수레.

레온이 유심히 수레를 살폈다. 검고 진득한 무언가가 묻어 있다. 아직 마르지 않은 것을 보니 무언가가 흐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짐작케 했다.

‘보존제….’

루시오의 머리는 분명 무언가에 담겨 보존되고 있었다.

이게 그 흔적이라면 이곳 어딘가에 그놈들이 있다는 소리가 된다. 게다가 검이 강한 반응을 해댔다.

‘이 안에 있어.’

레온이 수레 너머 낡은 문손잡이를 붙잡을 때였다.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걸.”

순식간에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놈들이 모두 튀어나왔다.

녀석들은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레온을 한가운데로 몰아넣고 검을 뽑아 들었다.

레온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 창문 안에서 레온을 지켜보던 그놈, 창병을 납치했던 알 수 없는 자가 눈썹을 까닥였다.

“데로니스 놈들을 교란시킨 건 그쪽 짓인가?”

놈들이 바로 턱 밑까지 추적해 왔다. 따돌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데 그런 놈들의 시선이 분산됐다. 마치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겁먹은 건가, 아가씨?”

놈이 턱을 괴고 이런 상황에서도 윙크를 보냈다.

“미친놈.”

“응, 아무래도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은 못 하지.”

레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소 짓던 놈이 곧장 매서운 눈빛으로 돌변했다. 이러고 농담이나 따먹고 있을 시간이 없다.

“쳐.”

신호와 함께 기다릴 틈도 없이 뒤쪽에서 검이 레온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으윽!”

레온이 주저앉아 검을 피했다. 생각보다 빠른 몸짓에 놀랐는지 놈들이 멈칫했다.

하나 이대로 있을 순 없다.

멈추지 않고 배운 대로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싣고 재빠르게 마주 오는 검을 쳐내자, 덩치가 두 배는 될 듯한 놈이 어느새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보기보다 좋은 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레온이 자세를 바로잡고 주변에 모여든 적들을 매서운 눈으로 살폈다.

누구든 달려든다면 용의 검으로 밀어낼 것이다.

감히 손도 댈 수 없는 이 세상 최강의 물질, 다이아 스틸로 만들어진 이 검으로 말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창가에서 지켜보던 놈이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적들 한가운데 홀로 서 있던 레온은 어느새 놈을 마주하고 있었다.

“묻는 말에 대답해. 왜 적들을 따돌렸지? 무슨 의도로.”

윙크나 날려대던 히죽거리는 얼굴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놈이 레온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검을 쥐고 있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적이라….’

놈들은 데로니스군을 적으로 여긴다.

크라운 캐슬에서의 행동도, 이자가 내뱉은 정통성에 대한 이야기도 그들과 같은 편에 섰다고는 볼 수 없는 맥락이었다. 그렇다면.

“난….”

레온이 천천히 놈에게 다가갔다.

적들이 당장에라도 레온에게 달려들듯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자 그가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무슨 꿍꿍이지?”

확인해 봐야겠다.

과연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일지, 아닐지.

“몬데이어 공작의 머리를 돌려받으러 왔다.”

레온이 천천히 내뻗었던 검을 내렸다.

두 사람 사이에 위험한 건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