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15장. 적진(9)
“난 잭 후작가의 아르테미스다.”
검을 내린 레온이 가장 먼저 신경 쓴 건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일이었다.
속치마가 보이건 말건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지만, 아르테미스를 연기하기 위해선 이런 행동이 필요했다.
“잭 후작가?”
“그래, 나의 아버지께선 아르히 잭으로 오래도록 폰네시의 귀족으로서 우리 가문을 지켜오셨지.”
놈은 관심 없는 모양새였다. 하긴, 영지를 잃고 귀족 직함만 영위하는 후작가 따위.
어쩌면 잘 알려지지 않은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레온이 먼지 묻은 치마를 털어냈다. 속치마를 감추고 궁색한 차림새에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 게 제법 귀족가의 아가씨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통해야 할 텐데.’
놈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정체를 드러낼 수도,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그럼에도 루시오의 머리를 돌려받을 만한 분명한 이유가 필요했다.
레온은 아르히 잭의 나불거리는 입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굴었다.
“폰네시는 나에게 고향이며, 오래도록 우리 가문이 빚져 온 아름다운 땅이다.”
“허, 참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더 들을 것도 없어. 계속 밖에 있는 것도 위험하다고!”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을 끌 셈이다. 놈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창병을 납치했던 남자가 손을 들어 여전히 그들을 통제했다.
“그래서, 네놈이 폰네시 출신이니 몬데이어 공작의 머리라도 돌려받겠단 건가?”
“그래, 우리 영주님을 더 이상 욕보이게 할 수는 없어.”
그 표현을 할 때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좋은 것만 보고 어렵지 않게 살아온 아가씨가 그 수난을 겪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루시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손발이 떨려 연기가 어렵지 않았다.
“부디 돌려줘. 그 땅의 주인이시니 그곳으로 모셔갈 거야.”
“그 땅의 주인이라….”
놈은 이제 웃지 않았다. 눈 아래 작은 점이 있는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주먹을 움켜쥔 레온의 표정에도 긴장감이 맴돌았다.
“글쎄.”
그놈이 무심하게 손을 뻗었다.
거칠게 레온의 손목을 붙잡고 몇 발자국 더 가까이 끌어낸 후 입가를 비틀었다.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뭐?”
서대륙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인 만큼 잭 후작가가 덴버그에 온 것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폰네시의 분열은 오래전부터 유명한 일화이고, 그곳에 남은 두 후작이 쥐 죽은 듯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것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과연 잭 후작이 몬데이어 공작을 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레온이 놈을 올려다봤다. 슬슬 꽉 붙잡힌 손목이 아파왔다.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게 제압한 그 손길에 레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난 잘 모르겠는데. 왜 후작가의 아가씨께서 그걸 위해 이 위험을 무릅쓰는지 말이야.”
한참 시선을 주고받았다. 결국 레온이 거칠게 그 손을 풀어냈다.
“나야말로.”
그 매서운 목소리에 손쉽게 놓아준 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내가 무얼 믿고 너에게 모든 걸 털어놔야 하지?”
놈의 진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너 따위에게 말이야.”
레온이 눈동자만 굴려 하늘을 살폈다.
워렌은 아직이다. 하지만 이 덴버그 어딘가에서 제 기운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신호를 보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소리를 질러 근처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건 결국 양쪽 모두를 곤란하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가장 먼저 달려올 건 데로니스 놈들일 터.
무엇보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제게 더 불리한 상황인 건 틀림없었다.
‘워렌,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설호족과 스노우 울프의 혼종인 벨이었다면 들을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워렌은 그런 신비의 동물이 아니다.
레온이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마주한 놈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뭐야, 진짜 미친놈인가?
“과연 그렇군.”
“왜 웃는 거야? 너, 무슨 헛짓거리를 할 셈이지?”
“글쎄.”
한 발 물러난 놈이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제 이름은 에드먼드입니다, 레이디.”
그의 짙은 흑발이 그 움직임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숙일 때와 달리 다시 마주 본 에드먼드의 얼굴엔 분노가 머물러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잭 후작가가 충성을 맹세한 데로니스 왕국의 반란군이죠.”
내보이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검을 붙잡고 에드먼드가 곧장 레온의 목에 검날을 들이밀었다.
대기하던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적들에게 둘러싸인 레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란군.”
“제 소개는 끝났는데.”
레온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지켜본 에드먼드가 미소와 함께 물었다.
“이제 당신을 어찌해야 할까요, 레이디?”
그는 공작의 머리를 돌려줄 마음도, 놓아줄 마음도 전혀 없어 보였다.
***
“에스델, 경위는 파악했나?”
그 시각, 크라운 캐슬.
여기사 에스델이 하일 데로니스 앞에 고개 숙이고 상황을 보고했다.
“붙잡은 자들 중, 살아 있는 자는 없습니다.”
“한 놈도?”
“변복을 한 자들은 모두 자결했고, 귀족 몇과 그의 가신들로 보이는 무리는 연회장에 붙잡아 두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을 벌인 주범들을 붙잡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우선할 건 반드시 왕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에스델이 입술을 세게 씹었다. 제가 나섰다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 것이다.
“그들로부터 알아낸 사실은 없나?”
“혐의를 묻고 있지만 모두 관계를 부인합니다.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새 왕이 좀처럼 인상을 펼 줄 몰랐다.
그 아래 고개를 조아린 에스델이 무거운 공기를 피부로 체감했다.
“작정하고 때를 노린 게지.”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전, 등 뒤에 내리꽂히던 그 목소리가 지독하게 맴돌았다.
“감히 나를 반역자로 몰아가다니.”
왕가의 후계자를 들먹거리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그놈이 지껄이는 소리를 모인 귀족 모두가 들었다.
“찢어 죽일 놈.”
그 정체를 숨기기 위해 끝없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엔 이렇게 되고 말았다.
이 자리를 손에 넣으려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누구도 모른다. 또 알아선 안 됐다.
‘살아 있을 리가 없는데….’
그놈은 제 손으로 죽였다.
트레톨라 왕가의 마지막 후계자를 품고 있던 왕세자비의 목을 직접 취했단 말이다.
하일 데로니스가 핏발 서린 눈으로 잠시 골몰했다.
“…….”
에스델은 머리맡에서 느껴지는 왕의 분노를 가장 가까이에서 받아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헛소리를 지껄인 놈을 놓쳐 버린 게 이내 마음에 걸렸다.
지금껏 쌓아올린 공이 이번 한 번에 무너질 것처럼 느껴졌다.
왕의 신뢰를 잃어선 안 된다. 그래야만….
“에스델.”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가 곧장 자세를 바로하고 왕을 바라보았다.
“예, 폐하.”
“상황을 만들어야겠다.”
“…상황이라면.”
하일 데로니스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그는 전장을 누비는 백전노장이기도 했지만, 수많은 기사를 이끄는 전군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지난 스무 해 동안 그는 서대륙의 유일무이한 왕으로 군림하며 수많은 수 싸움을 해야만 했다.
“때가 되었다 달려들겠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어차피 최측근 몇을 제외하곤 왕가의 후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 서대륙 백성 전부가 그랬다.
“잡아들인 귀족 중에서 가치 없는 자를 추려내라.”
“…가치 없는 자라면.”
“그들 중 한 가문이 반역을 저질렀다. 헛소리는 들어줄 가치가 없지 않나?”
왕이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 에스델 역시 쉽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왕은 오늘 있었던 일을 그저 반역을 노리는 한 가문이 일으킨 일로 치부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내뱉은 말 모든 게 거짓이 될 수 있도록.
“배반의 대가는 오직 처단뿐이겠지.”
지금부터 죄인이 만들어질 것이다.
“죄를 뒤집어쓸 놈들을 구해라.”
“예, 폐하!”
하일 데로니스가 미소와 함께 편안히 왕좌에 기댔다.
‘이런, 큰일인데.’
왕의 알현실 천장 위.
맨손으로 기둥 위까지 빠르게 타고 오른 케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선 에스델이 나서는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머리칼이 제 마음처럼 정신없었다.
‘아까 검문소에서 봤던 그 여자잖아? …설마.’
개인적인 감정으로 처리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야말로 정말 모르는 일이다.
레온의 성격상 고분고분 상냥히 대하지는 않았을 터.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앙심을 품고 잭 후작가를 이번 일의 배후로 지목한다면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지고 만다.
‘그게 아니래도 가능성이 있어.’
잭 후작가는 폰네시 출신의 귀족이다.
비록 영주의 지위를 잃고 오래도록 영지의 그림자처럼 살았지만 그야말로 대대로 몬데이어 공작가의 덕을 본 셈이다.
그들의 친인척과 잭 후작가의 영애들이 결혼으로 엮이며 아주 먼 가족이 되기도 했다.
‘누가 봐도 눈엣가시일 게 분명하잖아.’
해치우지 않으면 언젠가 등에 칼을 꽂을 수도 있을 만한 가문이다.
물론 이곳에 오기 전 마주했던 아르히 잭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용기도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곤 입을 나불거리는 것뿐이었으니.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아르히 잭의 성향이나 가문의 역사를 제외하고도 새 왕 하일 데로니스의 성향이 무척이나 난폭했다.
‘왕좌에 오르기 전까지 죽일 수 있는 놈들은 모두 죽였으니까.’
게다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왕세자비의 태중에 있던 생명에도 손을 댄 것 같았다. 정말이지 잔악무도한 놈이다.
‘폰네시의 귀족들을 한풀 꺾어놓고 싶을 만도 해.’
아니, 어쩌면 이 기회에 멸문을 이끌어내고 싶을지도 모른다.
‘제길, 일이 점점 꼬이는데.’
그 지경까지 상황이 어려워지면 브라운을 구출하기도, 이 덴버그를 무사히 빠져나가기도 힘들어질 것이다. 그전에 어서 브라운을 구해야만 했다.
어떤 가문이 붙잡혔는지도 알아낼 필요가 있다. 그저 도망간다고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연회장이랬지?’
알현장을 빠져나가 곧바로 그곳으로 가고 싶지만 들어올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에스델이 이곳을 나선 후 근방 병력이 늘어나고, 감시가 삼엄해졌다. 검을 다루는 자답게 케인에게도 그들의 기세가 모두 느껴졌다.
“…….”
케인이 주먹을 펴보았다.
맨손으로 기둥을 타고 오르느라 제 상태는 아니었지만 아직 힘은 충분하다.
한두 사람 정도는 소리 소문 없이 목을 비틀어 버릴 만한 힘이 남아 있다.
‘정 안 되면… 나도 붙잡히는 수밖에.’
하지만 그건 최후의 방법이다.
브라운과 함께 붙잡혀 탈출할 기회를 노리는 것보다는 구출하는 쪽이 훨씬 더 낫다.
‘지금은 우선.’
케인이 숨죽인 채 주변을 살폈다.
왕이 돌아서고 난 후 이곳을 지키는 다섯의 기사들이 보였다.
‘나는 할 수 있다.’
케인이 훌쩍, 놈들을 향해 뛰어내렸다.
“뭐야! 침입자다!”
“잡아라, 반드시! 놓쳐선 안 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
오래도록 꿈꿔온 그 일은 데로니스군에 잠입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