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95화 (95/133)

95화

16장. 새 삶(1)

그 시각, 마다비아 인근 해안가.

“두 분, 그러지 말고 표정 좀 풀자고요.”

피타가 한숨과 함께 노를 움켜쥐었다.

작은 나룻배로 쉬지 않고 밤새도록 이동해온 통에 이제 이 가운데 역할도 정말 힘겨웠다.

“이봐요, 데칸. 목숨을 다 바쳐 우릴 위하겠다는 사람치곤 너무 태도가 적대적인 거 아닙니까?”

그는 나룻배 끄트머리에 앉아 단검을 매만지며 밤새도록 헤리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헤리스 경! 다친 건 무릎이지 손이 아니지 않습니까? 왜 저만 노를 젓고 있는 거죠?”

헤리스 역시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끄트머리에 앉아 데칸을 마주 보고 있었다.

고로, 이 배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건 오직 피타뿐이었다. 결국 그가 노를 내동댕이쳤다.

“이런! 빠질 뻔했잖아, 꼬맹이!”

“그 꼬맹이 소리 좀 집어치워요. 스무 살 먹은 꼬맹이가 세상에 어디 있답니까?”

“내 나이보다 반절은 덜 됐으니 꼬맹이라면 그런 셈이지.”

“하! 세상에 나와 사신 건 딱 그 절반 정도일 테니, 저랑 경험치는 비슷하시겠군요.”

“이놈이 어른을 놀려!”

데칸이 흥분해 피타에게 달려드는 걸 헤리스가 검을 뽑아들어 단숨에 제압했다.

시끄럽게 떠들썩하던 배가 일순간 고요에 잠겼다.

“닥쳐라, 데칸.”

헤리스의 눈동자는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이 조금도 재밌지 않아 보였다.

데칸 역시 마주한 헤리스의 눈매에서 분노 비슷한 것을 읽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화를 내도 내가 내야겠구만. 좀처럼 재미없는 양반일세.”

그가 쳇, 더러운 침을 내뱉으며 도로 나룻배 끄트머리에 엉덩일 붙이고 앉았다.

상황이 잠잠해지자 피타가 겨눈 검을 밀어냈다. 헤리스도 순순히 검을 거두고 다시 데칸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튼 마다비아 근방까지 왔으니 잘된 일이잖아요. 이제 눈에 힘 좀 빼세요, 헤리스 경.”

피타가 다시 노를 잡았다. 이번엔 데칸도 눈치껏 함께였다.

두 사람이 천천히 노를 휘저었다.

마다비아가 길라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만큼 새벽녘 여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데칸, 마다비아에 아는 사람이 많다고 했죠?”

“그래, 그곳에 사는 놈들은 다 거기서 거기야. 내가 돌아왔다는 걸 알면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던 놈들이 어디서 죄다 튀어나올 거다.”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확실하고요?”

“마다비아에서 중요한 건 돈도 가문도 신분도 아니야. 오직 인맥, 그곳에서 나고 자란 자유인의 정체성뿐이지.”

그런 면에 있어서 데칸은 완벽한 존재였다.

마다비아에서 태어나 마다비아에서 자랐고, 오래도록 마다비아를 주 무대로 삼았으니 말이다.

“너희 패거리들은 어찌 되었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헤리스의 매서운 목소리가 두 사람을 갈라놨다.

노를 젓던 데칸이 잠시 멈칫했다. 명치 아래 깊은 곳부터 분노가 머무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기에 십오 년이란 세월은 너무도 길었다.

“그날부로 다른 놈이 내 패거리를 먹어버렸지.”

“여전히 범죄를 저지르나?”

“납치는 안 할 거요. 그 짓을 하다 내가 이리되었으니, 그놈들도 생각이 있다면 같은 죄는 저지르지 않겠지.”

“갱생 안 되는 놈들이군.”

“나고 자라 배운 게 그 짓인데 새사람이 되길 기대했다고? 웃기지도 않는 신념일세.”

데칸이 잔뜩 비웃었다.

헤리스가 검을 쥐자 도로 입을 다물었지만 그의 눈빛을 보니 여전히 우습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피타는 좀처럼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지금껏 눈치 보느라 묻지 못했지만, 어차피 동행을 허락한 터였다.

“십오 년 전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나도 좀 압시다.”

그나마 더 잘 설명해 줄 것 같은 데칸을 바라보자 그의 입꼬리가 무겁게 내려갔다. 뭐야, 울어?

“떠올리기 아직 쉽지 않은 이야기라서 말이야.”

“…아니, 무슨 그렇게까지.”

피타가 이번엔 헤리스를 바라봤다. 그는 검을 갈고닦으며 묵묵부답, 입을 다물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답답해 죽겠네.

“이런 순간에도 결국 목적지에는 도착한 모양입니다.”

짧게 숨을 몰아쉰 피타가 드디어 눈에 잡히는 마다비아 항구를 보며 미소 지었다.

데칸이 등 뒤쪽을 바라보기 위해 빠르게 몸을 뒤돌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배가 출렁거렸다.

“마다비아….”

드디어 왔다. 드디어 꿈에만 그리던 그곳에 도착했다.

격해진 감정을 추스를 새도 없이 고향을 마주하게 된 데칸이 끅끅, 추잡스러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천, 천천히 갑시다, 데칸!”

“그럴 수는 없지!”

눈앞에 익숙한 그 풍경이 보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데칸이 서둘러 노를 휘저었다. 사정은 모르지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좋다. 피타도 힘을 보탰다.

“나의 고향 마다비아!”

세상의 그 어떤 상식도 통하지 않는 자유 도시.

어느새 일행의 배가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

골목 곳곳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부랑자들을 보자 이곳이 전에 살던 영지와는 전혀 다른 곳임을 체감하는 피타였다.

헤리스가 허름한 망토 안에 검과 짐을 숨긴 채 예리한 눈길로 주변을 살폈다.

가장 앞선 데칸은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지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밝은 표정이었다.

“밥부터 먹자고. 내내 쓰레기 같은 음식만 먹었더니 속이 아주 허해.”

데칸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굳은살 박인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 무리들이 자리 잡은 구역이 있다.

일전에 워렌을 붙잡아 싸구려 에일을 먹였던 그곳이 말이다.

“여긴 누구도 장악할 수 없어. 전투복을 입고 기사단의 망토를 두른 이들이라면 더더욱.”

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 바로 이 마다비아였다.

이곳에선 오로지 이름만이 정체성을 나타내는 유일한 지표다.

성별도, 나이도, 가문도.

그 허울 좋은 것들은 모두 마다비아에서 쓰레기 조각에 불과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온갖 범죄자가 이곳에 몰려들었지.”

통제되지 않는 땅은 가져도 의미가 없다. 여기는 신분이 통하지 않는 곳이기에 더 이상 귀족들이 탐내지 않는 땅이었다.

그들은 대우받고 존중받길 원하며 타인의 위에 군림하길 원한다. 자유를 꿈꾸는 자유민들에겐 웃기지도 않는 소꿉놀이일 뿐이다.

“지난 몇백 년간 얼마나 많은 자유민들이 쉽게 목숨을 잃었는지 몰라.”

범죄자들은 살 구실을 찾기 위해 가장 쉬운 약자를 노렸다. 그 약자들은 자신보다 더 약한 이들을 노렸다.

그건 끊어낼 수 없는 악순환의 굴레였다.

스스로를 자유민이라 칭하지만, 그 누구보다 약육강식 세계 속에 물들어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게 바로 마다비아인들이었다.

“그 체계를 정돈한 게 바로 나, 데칸이라 이 말씀이지.”

적어도 이곳에 사는 이들끼리 다툴 필요는 없었다. 마다비아 밖으로 눈길을 돌리면 등쳐먹을 놈들은 그곳에 더 많았다.

가진 것도 없고, 가질 것도 없는 이 땅에서 서로를 해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었다.

데칸은 몇몇 뜻이 맞는 자들을 모아 마다비아 밖으로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일을 저지르고 이 땅에 돌아와 얻은 것을 나누어 가졌다.

“쓰레기 인생을 잘도 포장하는군그래.”

신이 나서 떠들어대던 데칸이 헤리스를 노려보았다.

그래봤자 악명 높은 범죄일 뿐이다. 아이들을 잡아 내다팔고 바깥 물건을 훔쳐 생활을 영위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네놈은 모를 거다. 태어난 곳이 고작 마다비아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헤리스 타린이 어떤 놈인지는 가진 것 없는 자신이 더 잘 알았다.

타린 가문은 아주 먼 옛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늘 이 땅 위에 군림하는 귀족 가문이었다.

그들이 무슨 공으로 호의호식했는지는 알 바 없다. 하지만 그저 태어났다고 권리를 독식하는 건 어이없는 일이다.

“적어도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지.”

“그래서 아이들을 납치해 팔아넘겼나? 기회를 주겠다고?”

헤리스가 단박에 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땅에 발을 딛자마자 얻어 마신 술로 인해 데칸의 얼굴이 시뻘겠다.

아니, 어쩌면 분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십오 년 동안 갇혀 있던 곳을 벗어났다는 기쁨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래! 적어도 내가 팔아넘긴 그 아이들은 이 마다비아를 벗어났지. 새로운 신분을 얻어 인맥을 쌓을 기회를 얻었단 말이야!”

“가짜 신분으로 뭘 할 수 있지? 제 인생도 아닌 훔친 신분으로 무슨 꿈을 꾸느냐고!”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으르렁거렸다.

결국 또 말리는 건 피타의 몫이었다.

“아주 본인들이 앙숙이라고 소문을 내세요. 동네방네 더 떠들어 보시라고요.”

“앙숙은 무슨!”

“이깟 놈과 나를 동일 선상에 놓지 마라, 피타!”

헤리스가 멱살을 털어냈다. 데칸도 구겨진, 볼품없는 옷을 매만지며 감정을 모두 드러냈다.

에휴, 피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밥도 먹고 사람도 모아 슐츠까지 간단 말인가. 눈앞이 깜깜했다.

“그래도 근방에 정체를 숨긴 데로니스 놈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두 분 다 자중하시고 조심하세요.”

헤리스가 내키지 않는 모양새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칸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무리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저쪽, 내가 늘 가던 곳이 아직 있구만!”

누리끼리한 그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데칸이 냉큼 싸구려 여관 앞으로 향했다. 보름에 한 번씩 어린놈을 잡아들일 때마다 으레 먹고 마시던 익숙한 풍경이 그대로였다.

“아직까지 연락을 주고받는 부하 놈이 있어. 아마 이곳에 있을 테지?”

데칸이 손을 비비며 문을 열어젖혔다. 헤리스와 피타도 그 뒤를 따랐다.

안쪽은 시큼한 묵은내가 났다. 관리가 오래도록 안 됐는지 사람은 있지만 본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데칸이 주변을 살폈다. 있어야 할 녀석들도, 알고 있는 모습들도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

“…….”

세 사람이 주변을 살폈다.

이런 곳에서 숙박을 하는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어째 영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테이블에 앉아 소식지를 읽거나 에일을 들이마시는 이들 중 방금 전 이곳을 찾은 세 명을 의식하지 않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무언가 이상해.’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같다.

데칸은 제 할 일에 몰두한 그들을 보며 예전 언젠가, 워렌을 끌어들였던 그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분위기였다.

모든 게 완벽히 짜인 공간 속에 각자의 역할대로 움직였던 그때 그 느낌.

“가는 게 좋겠어.”

모두 가짜다. 이들은 싸구려 여관의 손님도, 더 이상 음식이 나올 일 없는 형편없는 요릿집의 손님도 아니었다.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모여 있건 엮여봤자 좋을 게 없다.

세 사람이 빠르게 이동하는 순간 문 옆을 지키던 한 남자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목표물은 회수했나?”

“뭐?”

“공작의 머리를 회수했냐고.”

공작?

세 사람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놈이 다시 한번 은밀하게 물었다.

“…공작이라면, 누구를….”

“뭐? 몬데이어 공작 말이야.”

망토 속에서 검을 쥐고 있던 헤리스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봐, 너희들 설마.”

놈의 인상이 지독하게 구겨졌다.

드르럭 소리와 함께, 어느새 뒤편에 자리한 모두가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덴버그에 다녀온 정보원들이 아닌가?”

그들 모두 완전 무장한, 데로니스 왕국의 반란군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