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16장. 새 삶(2)
도대체가 안락한 폰네시를 떠나고 나서부턴 늘 이런 식이다.
“정체를 드러내선 안 되니 어쩔 수 없잖아요.”
피타가 속삭이며 위로했지만 그래 봤자다.
일행들은 낡고 허름한 여관 방구석에 갇혀 반란군의 감시를 받는 중이었다.
“물! 여기 물 좀 달라고!”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인간이 하나 있다.
“사람을 가둬뒀으면 응당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야? 어?! 물 줘!”
탈옥한 지 약 삼 일 만에 도로 갇혀 버렸으니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
데칸이 팔자 좋게 드러누워 물을 찾아댔다. 정말 미친놈이다.
헤리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이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두통의 근원이기도 했다.
“그러다 칼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일까.”
데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힐긋, 헤리스를 바라봤다.
“누가 칼 달랬나? 물 달랬지.”
“허튼소리 그만하고 닥쳐라, 데칸.”
“저놈들 표정 못 봤수? 말실수를 해 아주 골치가 아픈 상태던데.”
“말실수를 했다고 우리 쪽에서 실수를 해도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만 좀 하세요, 데칸.”
“시끄럽다, 꼬맹이! 저놈들은 우릴 죽일 수 없어!”
틀린 말은 아니니 딱히 대꾸할 거리가 없었다.
“우릴 보자마자 새로 온 사람인 걸 알더군. 이 마다비아에 살고 있는 자유인들을 모두 파악한 게 틀림없어!”
반란군은 일행들이 이곳에 새로 모습을 드러낸 자임을 분명 알고 있었다.
그들의 오해가 단순한 추측이 아니란 건 헤리스도 느꼈다.
“그런 주요 임무를 홀랑 말해버린 게 의심스럽긴 하죠.”
“당연하지!”
공작의 머리를 회수했냐고 물었다. 보통 그만한 정보를 묻기 전엔 확인이 필수일 터.
“어디서 우릴 지켜보고 있던 걸까요?”
“내 말대로 이 마다비아의 자유인들을 모두 알고 있거나!”
해안선을 따라 밀항하는 모습을 어딘가에서 살펴보고 있던 거라면 이해가 쉬워진다.
“우리가 누군지 확인하기 전까진 살려둬야 할 거다. 그러니 그만 쫄라고, 꼬맹이!”
데칸이 껄껄거리며 다시 팔자 좋게 물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피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 양반의 심기를 건들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시선을 돌리니 그는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는 것 같다. 헤리스는 줄곧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리 쪽에서 그들을 죽일 이유는 충분하지.”
놈들은 절친한 친구이자 하나뿐인 주군인 루시오를 언급했다.
그것도 아주 충격적인 문장 속에 그 이름을 뒤섞어서 말이다.
“분명 머리라고 했지.”
“예, 저도 들었습니다.”
“…머리를 회수했냐고 물었어.”
몇 번을 묻는 건지 모르겠다. 데칸도 대꾸하려다 쩝, 입맛을 다시더니 입을 다물었다.
헤리스의 표정은 분노나 슬픔보다 공허함에 가까웠다.
그가 무엇을 잃었는지, 루시오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마다비아의 분위기가 변했어. 놈들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은 모양인데.”
데칸이 남 얘기하듯 벌렁 드러누워 다리를 까딱거렸다.
“우릴 순순히 떠나게 둘 것 같진 않은데. 이제 어쩌겠수, 기사 양반?”
도와주기로 약속하긴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못 도와준다면 약속을 안 지킨 게 아니라 못 지키는 게 되는 거니까.
“뭐, 나야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이거지.”
데칸이 별생각 없이 떠들어댈 때였다.
“…어, 어엇!”
그가 통통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상황에 낙담하던 피타가 헛숨을 잘못 들이마셔 켁켁거릴 정도로 아주 재빠른 몸짓이었다.
“저기!”
천장에 누군가가 있다. 그가 손가락으로 구멍 난 천장을 가리켰다.
“어떤 쥐새끼 같은 놈이 우릴 훔쳐보고 있었다고!”
“뭐, 뭐라고요?”
피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헤리스가 다 드러난 목조 뼈대를 타고 단숨에 천장까지 튀어 올랐다.
그의 몸짓이 너무 빨라서 벽에 계단이라도 나 있는 줄 오해할 뻔했다.
“대체, 누가….”
피타가 휘둥그레 상황을 살피는 동안 위쪽에선 짤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데칸이 눈을 좁게 뜨고 먼지가 우수수 떨어지는 천장을 살폈다.
“아, 아악! 놔, 놔주세요! 이거 놓으라고, 제발!”
으으아아악!
비명과 함께 별안간 하늘에서 홀쭉한 남자 하나가 떨어졌다.
데칸이 재빨리 쓰러진 놈의 뒷목을 잡아채고 포박하기 시작했다.
그는 삼 일 만에 도로 붙잡힌 분노를 놈에게 모두 풀어내고 있는 듯했다.
“아파, 아프다고!”
“…뭐야, 이 목소린?”
“…데, 데칸?”
“너 통나무… 아니냐?!”
통나무라고?
의문은 등 뒤에서 터져 나왔다.
피타가 금세 바닥으로 뛰어내린 헤리스와 시선을 교환했다.
“아는 사이인가?”
통나무라 불린 남자가 겁먹은 표정으로 데칸을 살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사이라면 조금 덜 맞을 수 있지 않을까?
천장까지 맨손으로 올라온 저 덩치 큰 남자는 정말이지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을 만큼 엄청난 악력의 소유자였다.
“음?”
두 사람이 데칸의 대답을 기다렸다. 통나무도 눈물을 글썽이고 애절하게 그를 바라보던 때였다.
“내 아이를 죽인 원수도 아는 사이라면… 그렇다 말해야겠지.”
하지만 그리 반가운 만남은 아니었다.
“아이를… 죽였다고요?”
데칸이 싸늘한 눈빛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오랜 시간 감옥에 갇힌 분노보다 더 큰 무언가가 그 탁한 눈동자 안에 일렁거렸다.
***
일이 벌어진 건 이십 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데칸은 마다비아의 쓰레기로 뒤덮인 해안가를 성큼성큼 걸어가며 별일 아니라는 듯 땀을 닦아냈다.
“끄집어내 봤자 엔드해에 잠긴 내 아이만 불쌍하지. 더 돌아볼 것도 없는 얘기야.”
“근데 그런 자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원수라면 원수잖아요.”
너무 별것도 아닌 일로 감정을 털어내는 통에 더욱 걱정이 앞섰다.
피타의 물음에 데칸이 낄낄거렸다.
“자유인들은 과거에 살지 않아. 과거에 잘못했다면 현재에 되갚는 수밖에 없지.”
“예?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 지난 일은 되돌릴 수 없는 것 아니겠어?”
그야말로 멋진 철학이었다.
피타는 처음으로 호오, 하고 입을 모아 데칸에게 엄지를 들어보였다.
“게다가 원수라면 그보다 더 한 철천지원수가 내 앞에 있기도 하고.”
“개소리 말고 걷기나 해, 데칸.”
“하여간 재미없다니까? 내가 언제 개소리를 했다고!”
“닥쳐라, 데칸!”
세 사람은 현재 통나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자신을 풀어준다면 반드시 보답하겠다는 말과 함께 반란군 기지로 돌아갔다.
놈이 풀려난 직후, 세 사람도 그 싸구려 여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인생은 참 각박하군. 옳고 그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선택의 연속이니 말이야.”
강렬한 햇빛이 엔드해와 맞부딪혀 지독하게 눈부셨다.
헤리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저 먼 곳에 위치한 해안가 동굴을 바라보았다.
통나무와는 그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반란군의 기지 앞이었다.
“데칸! 왔는가!”
“그래, 통나무. 알려준 길로 오니 금방 도착했지.”
“두 탈영병도 어서 오시오!”
“흠, 흠흠.”
피타가 멋쩍게 목을 풀었다.
신분을 밝힐 수 없는 두 사람은 데로니스에 충성을 맹세한 길라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해 탈영한 병사쯤으로 정해진 터였다.
“정의감이 있다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은 요즘 세상에 쉽게 보기가 어렵지. 자, 어서 따라들 오라고!”
하늘에 닿을 듯 높이 깎아지른 해안가 절벽 아래, 깊은 동굴로 통하는 울퉁불퉁한 길이 있었다.
통나무는 기지로 향하며 시키지도 않은 이야기를 떠벌렸다.
“내가 탈영병이 있다고 하니, 어떤 놈들인지 궁금해하더군.”
“특이한 놈들일세.”
부지런히 따라잡으며 데칸이 콧방귀를 뀌어댔다.
명령에 불복하고 무리를 벗어난 탈영병들을 반기다니.
“왜, 떠나는 길에 감옥에 갇힌 죄수를 외면하지 못할 만큼 성심이 곱다고도 설명을 덧붙였거든.”
“성심이 고와? 너 그렇게 얻어터지고도 그 말이 나오디?”
“하하하하하! 훔쳐 들은 건 내 잘못이니 어쩔 수 없지!”
헤리스가 다시 한번 미간을 모았다. 정말이지 두통이 이는 대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파도가 찰박거렸다. 물에 미끄러질 뻔한 피타가 겨우 비명을 참았다.
“말이 나온 김에. 뭘 엿듣고 있던 거냐, 통나무?”
“너희가 어떤 놈인지 확인이 필요했지.”
“멋대로 착각해 놓고 의심부터 때리다니 마다비아답구만.”
“우리 마다비아에 밀항하는 자가 많긴 하지만, 시기도 맞고 인원도 맞은 건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라….”
슬슬 다른 반란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통나무가 가다 말고 뒤돌아서 일행들에게 당부했다.
“우리 마다비아는 이미 오래전 반란군의 거점이 되었어.”
“뭐? 누구의 무슨 뭐가 돼?”
“데로니스 왕조에 역심을 품은 반란군들의 거점이 되었다고.”
더 이상 이곳은 무법 지대가 아니었다.
세상의 상식이 통하지도, 약자가 나보다 더 약한 자를 탈하고 부조리가 넘치는 죽어 있는 땅도 아니었다.
이곳은 이제 하나의 사회였다.
마다비아의 자유인들은 반란군과 함께 데로니스의 몰락을 기대했다.
“만남을 주선하는 건 내가 지킬 수 있는 약속이지만,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선 대장의 뜻에 따르겠어.”
“대체 내가 알고 있던 마다비아는 어디로 간 거야?”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어, 데칸. 뭘 기대하는지는 몰라도 그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나아져? 마치 무언가에 세뇌라도 당한 것 같군. 미친놈들!”
데칸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런 걸 기대하고 돌아온 게 아니다.
도대체 십오 년간 이곳 마다비아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피타가 흥분한 데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튼 지금은 별 도움도 안 되는 감정으로 상황을 그르칠 필요가 없었다.
“자, 이쪽으로.”
통나무가 다시 길을 잡았다.
데칸은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 뒤를 억지로 따랐다.
피타와 헤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얼굴에 감도는 감정이 긴장이라는 것만 빼면.
“대장과 만남을 약속했네. 뒤에 보이는 자들은 오늘 새벽 이곳에 밀항한 길라의 탈영병들이고.”
데칸이 뭐라 소리치려는 걸 피타가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반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도 좋다는 신호였다.
“네 눈엔 나도 탈영병으로 보이냐? 어? 내 출신은 마다비아라고!”
“대장에겐 너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지. 자, 따라와!”
“하여간… 정말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군!”
데칸이 씩씩거리며 어둡고 서늘한 동굴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헤리스의 눈빛엔 날이 서 있었다. 입구부터 높은 곳으로 향하는 길 곳곳에 제대로 훈련받은 반란군이 몇이나 서 있었다.
겨룬다면 이길 수 있을까?
맨손으로 제압할 만한 수준의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니었다. 느껴지는 기세가 그랬다.
“이봐, 대장! 아까 말한 탈영병과 마다비아 출신의 죄수 데칸을 데리고 왔다!”
통나무가 의기양양하게 데칸을 돌아봤다.
“어때, 제대로 설명했지?”
“…개놈 자식!”
죄수라니. 가뜩이나 첫인상이 중요한데 아주 망하라고 저주를 퍼붓는 거나 다름없었다.
데칸이 짧은 팔을 들어 통나무의 등짝을 후려갈기려는 찰나였다.
“이런, 반란군을 공격하면 적으로 간주하는데 그래도 되겠나?”
얼굴 반쪽에 깊은 흉을 가진 장년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라고 하는 게 좋을 텐데.”
왜냐면.
반란군은 적에겐 가차가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