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97화 (97/133)

97화

16장. 새 삶(3)

“배편은?”

“지금 상황에선 쉽지 않아. 총 소집령에 뱃길도 막혀 버렸어.”

레온이 등 뒤로 묶인 손을 꼼지락거렸다.

자신을 에드먼드라 소개한 놈은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대로 입을 막고 레온을 임시 기지로 끌고 들어왔다.

소리를 지르는 건 레온에게도 위험 부담이 따르는 일이었다.

작은 반항은 있지만 어렵지 않게 내부로 들어오고 나자 곧장 묵직한 천에 얼굴이 가려졌다.

정말 간신히 숨만 쉴 수 있을 정도였다.

‘크라운 캐슬에서 그런 일을 벌여놓고 무사히 빠져나가길 기대한 거야?’

웃기지도 않는 놈들이다.

시야가 가로막힌 상태에서도 놈들의 대화는 가까운 거리에서 아주 잘 들렸다.

특히, 에드먼드의 그 재수 없는 목소리는 확실히 구분이 갔다.

“그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말해봐.”

정보원이 곤란한 듯 눈썹을 늘어뜨리고 레온을 콕 가리켰다.

아무렴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아가씨라 하더라도 중요한 문제에 대해 털어놓자니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우리 아가씨는 신경 쓰지 마. 루시오 공작을 돌려받기 위해 위험까지 무릅쓴 용사이신걸.”

지금 놀리는 거지, 저 새끼?

피가 통하지 않아 차가워진 손으로 레온이 주먹을 힘 있게 움켜쥐었다.

가능만 하다면 가장 아픈 고통을 주고 싶을 정도로 열이 받았다.

“길라에서 일이 생겼어.”

“그래, 애초에 그곳에 배편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길라라고?

익숙한 영지명이 들리자 레온이 대화를 귀담아듣기 시작했다.

“길라에 파견한 정보원과 연락이 닿지 않아 알아보니….”

떠들어대는 놈의 목 깊은 곳에서 침음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그곳에 붙잡힌 폰네시의 포로들이 모조리 살해당했대.”

“…뭐라고? 살해를 당해?”

“그래,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나타난 모양인데… 그 후로 경비가 삼엄해졌어.”

잡아온 포로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죽고 시체로 남았다.

총 소집령이 아니었다면 서대륙 전체에 소문이 퍼지고 남았을 만한 사건이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수많은 감시를 뚫고 길라에 진입하기도, 또 몰래 밀항을 준비하기에도 어려움이 따랐다.

“이런… 모두 죽었다고?”

“그래, 약 오십여 명이 모두 도살당했어. 정말 잔악무도한 놈의 소행이야.”

살해를 당했다니. 레온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암살자일 거야. 드디어 움직이는 건가?’

지난 탄일 축제 때 제 목숨을 노리고 폰네시에 왔던 그놈.

검은 투구를 쓴 사냥개 놈이 뒤를 쫓고 있다.

어쩌면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단검에 심장이 꿰뚫렸으나 멀쩡히 살아 있다는 소식에 놈도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을 터였다.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낸 건 없고? 의심 가는 쪽이라도.”

“아직 거기까진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혹시 몰라 길라 쪽을 살펴보는 중이야.”

“…제길.”

에드먼드가 곤란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언제나 불안을 몰고 온다.

“그래, 그쪽 연락책과는 서신을 끊고 상황이 잠잠해질 때까지 더 살펴보도록 해.”

정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초 예상했던 길라를 통해 마다비아로 복귀하는 그림은 더 이상 꿈꿀 수 없게 됐다.

육로상 곧장 마다비아로 향한다면 꼬리가 붙을지도 모르는 일.

거점이 들키는 것만큼 피하고픈 상황은 없기에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길라 루트를 포기하는 게 나았다.

“성에선 어떻게 된 거야. 왜 내문이 폐쇄되지 않은 거지?”

일이 꼬이려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이 모양이다.

에드먼드가 습관적으로 연초를 피우기 위해 가슴 안쪽에 손을 넣었다가 멈칫했다.

그러곤 레온을 살폈다. 한구석에 죽은 듯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생각이 가셨다.

“시간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어. 병력 소집을 지체시킬 하나뿐인 방법이었다고.”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고는 설명했는데.”

“역시 배반한 건가. 귀족 놈들.”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그곳에 모여 있던 귀족들 중에도 반란군이 있던 건가?

귀 기울여 이야기를 듣던 레온이 머릿속으로 그럴 만한 가문을 추려보기 시작했다.

폰네시와 우호적이었던 영지나 도시는 셀 수 없을 정도다.

다만, 그레이트 대협곡으로 나뉘지 않은 서대륙 내 중앙, 서부 지역은 한계가 있었다.

데로니스군이 덴버그를 장악하며 주변부 모두를 집어삼켰기에 반대 세력으로 남기엔 위험이 따랐다.

‘가능성이 있는 건 고작 동북부 쪽뿐인데…. 누가 있지?’

혹한 끝 무렵의 여파로 북부는 이번 총 소집령에서 논외였다.

게다가 그들은 늘 독립국처럼 폰네시만을 따랐기에 하일 데로니스를 주적으로 대했다.

생각은 자연히 동부 쪽으로 옮겨갔다.

‘길라의 크루네 가문은 아닐 테고.’

연회장에서 봤듯 월랜드의 군주도 가능성은 적었다. 그렇다면….

“아르테미스, 몬데이어 공작의 머리는 우리가 모셔갈 거다.”

레온의 생각이 깊어질 무렵, 에드먼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더 이상 폰네시는 안전하지 않아. 우린 그곳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얼마 가지 않아 레온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이 벗겨졌다. 등 뒤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밧줄도 금세 끊어지고 없었다.

레온이 황급히 눈을 깜빡거렸다. 푸른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시선을 내리깔자 에드먼드가 물러섰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

그 역시 나서서 적을 만드는 타입은 아니었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레온이 망토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

이 어두운 민가 내부 어딘가에 루시오가 있다.

‘이들은 아버지를 욕보이려는 게 아니야. 그건 다행이지만….’

그들이 머리를 회수한 건 반란군으로서 루시오의 행보에 깊은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새 데로니스 왕국이 크라운 캐슬을 차지하고 난 후, 그들과 반대 세력으로서 목소릴 내어준 건 폰네시가 유일했다.

‘그렇다 해도… 여기서 내 정체를 밝힐 순 없어.’

적이 같다고 해서 계획도 같다고 볼 순 없다.

레온이 유심히 에드먼드의 표정을 살폈다.

녀석이 짙은 흑발을 쓸어 넘기곤 말했다.

“잭 후작가가 폰네시 땅에 욕심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알아.”

아르히 잭은 그저 가문을 유지하는 것만 신경 쓸 뿐이었다.

그 넓은 땅의 새로운 주인이 되고 싶다거나, 새 왕의 눈에 들어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픈 마음 같은 건 하나도 없는 놈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 반란군에 뜻이 없다는 것 역시 확실하지.”

“…뭐?”

“그런데도 내가 네 말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레온이 자각했다.

폰네시에 머무르는 이들에게 반란군이 접근하지 않았을 리 없다.

‘이미 아르히 잭과 이야기를 다 끝냈던 거야. 뜻이 맞지 않는 걸로 결론을 내렸겠지.’

그 말은 이 거짓말이 들통 날 가능성이 무척 크다는 것이었다.

레온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르히 잭과 뜻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찾아올 만한, 납득 가능한 확실한 이유.

“난… 사랑하고 있어.”

“갑, 자기?”

에드먼드가 매서운 눈을 크게 뜨고 한참이나 대꾸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은 받는 쪽에서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폰네시의 후계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나의… 공자님을 말이야.”

“지금… 레온 몬데이어를 말하는 거야?”

“그래, 이건 아버지의 뜻과는 관계없는 일이야. 오직 내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인 거지.”

과연,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법이다.

여기저기서 반란군이 납득한 듯 탄식을 터뜨렸다.

레온은 후드 아래 표정을 숨길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이 기세를 몰아붙였다.

“그분이 모든 걸 잃고 어디 계시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이 정도 도리는 해야 하지 않겠어?”

“그 정도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지만 두 사람 나이 차이가….”

“사랑에 나이는 관계없는 법이야. 그것도 몰라?”

레온이 버럭 화를 냈다.

생사의 기로에 서서 시들어가고 있을 진짜 아르테미스에겐 미안했지만 살기 위해선 방법이 없었다.

“그만 무례하게 굴어, 에드먼드.”

“그래, 그 정도 이유라면 앞뒤가 안 보일 만도 하지.”

“하지만 이곳은 너무 위험하니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소.”

“어쩌면 성 내부가 더 위험할 수도 있지. 이봐요, 아가씨. 가신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더 들어볼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허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배반당한 거라면 그들이 이곳 위치를 알렸을 가능성도 있어.”

“그래,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반란군이 내내 쭈그려 앉아 있던 레온을 조심스레 일으켰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이걸로 됐다. 이만 되돌려 보내는 게 여러모로 문제를 키우지 않는 일이었다.

“자, 그럼 이만….”

그들이 억지로 레온을 내보내려 할 때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에드먼드가 손을 뻗어 레온의 팔목을 붙잡았다.

“잠깐.”

찾고자 하면 방법은 언제든 생기기 마련.

“그 정도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우릴 도울 수도 있나?”

“…뭐?”

“현재 귀족들 역시 크라운 캐슬 내부에 붙잡혀 있어. 이대로 덴버그를 빠져나가기란 서로에게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두 힘을 합친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에드먼드가 힘 있게 레온을 잡아끌었다. 아무리 어두운 곳이어도 이 정도 거리면 눈이 보이고 만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어째서 당신들을 도와야 하지?”

레온이 그를 밀어냈다. 전혀 밀리지 않았지만 다시 한번 힘껏 에드먼드의 가슴을 밀어낼 때였다.

숨죽여 창밖을 살피던 반란군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러곤 침착하지만 빠르게 상황을 알렸다.

“밖에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옵니다!”

“적인가?”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주변을 살피고 있던 우리 군이 모두 쓰러졌습니다.”

“아가씨를 되찾으러 왔군.”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방금 전까지 호의적이던 반란군이 모두 주변을 둘러싸고 검을 뽑아 들었다.

“으아아아악!”

짧은 비명과 함께 입구를 지키던 놈들이 나자빠졌다.

툭툭, 검집으로 몸을 내려치는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붙잡힌 손목이 아팠다. 거세게 쥐어 잡은 그 손을 내려다보던 레온은 어느새 주변을 지키고 있는 놈들이 물러났다는 걸 알았다.

“아르테미스.”

워렌이었다.

“아티쿠스!”

“…아티쿠스?”

워렌이 겨누어진 모든 검을 힘으로 밀어내고 레온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시 놀란 듯 보이던 에드먼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 위험한 곳에 레이디를 혼자 두고 다니면 쓰나.”

“되찾으러 왔으니 그 손 놔.”

“글쎄,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던 참이라.”

기회를 노리던 반란군이 워렌에게 검집을 겨누었다.

그들에게 레온이 붙잡혀 있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워렌이 결국 순순히 공격 자세를 풀었다. 붙잡고 있는 레온의 손도 놔야만 했다.

“적이 아니란 걸 확인했으면 더 이상 무례하게 굴지 마.”

“우리 뜻에 따라준다면.”

“…협박하는 건가?”

“거래하는 거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아주 유용한 거래.”

등 뒤 가까운 곳에서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러다 정말 들킬 듯했다.

하는 수 없이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덴버그를 빠져나가는 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좋아. 알겠으니까 이것 좀 놔.”

여전히 에드먼드에게 안겨 있다시피 붙잡힌 레온이 그를 밀어냈다.

좀 전과 달리 에드먼드는 예의를 차려 다시 한번 정중하게 인사를 남기고 물러났다.

레온이 곧장 워렌에게 돌아가자 반란군이 검을 거두었다.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나중에 설명해줄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레온이 한숨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기다리고 있던 에드먼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재수 없어.’

레온은 왠지 놈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기분에 화가 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