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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98화 (98/133)

98화

16장. 새 삶(4)

“사랑하고 있다고 했어.”

“…누구를요?”

덴버그 내 반란군 임시 기지.

작전 회의 중인 그들 몰래 어두운 복도에 나와 있던 레온이 워렌에게 손짓했다.

“나.”

누가 들을까 봐 귀 가까이 다가가 속삭이자 이해 못 한 눈동자가 돌아왔다.

레온의 고운 미간 사이가 잔뜩 좁아졌다. 그제야 이해한 듯 워렌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아르테미스가, 레온 몬데이어를?”

“응, 그거 말곤 설명할 만한 이유가 없었어.”

“…믿습니까, 그들이?”

레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타인이 믿는지 안 믿는지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재주까지는 없다. 그저 이해하고 넘어가길 바라는 수밖에.

“안 믿어도 의심밖에 더 받겠어? 그래도 지금은 우리가 필요하니까 믿는 척할 거야.”

이 틈에 일행들을 되찾아 덴버그를 빠져나가야 한다.

“기사단장은 못 봤지?”

“예, 도착한 날부터 살폈지만 덴버그에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크라운 캐슬에서도 못 봤고요.”

“슐츠에도 소식 없고?”

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헤리스의 행방이 묘연하다.

분명 새 왕을 찾아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을 줄 알았는데.

“슐츠에 그와 절친한 자가 한 명 있습니다. 그자라면 소식을 알고 있을 거예요.”

어차피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

그동안 헤리스가 제 고향에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도 컸다.

“지금은 여길 빠져나가는 것부터 집중하자.”

“예.”

“바깥 상황은 어때? 데로니스군의 움직임은?”

주변이 놀라울 만큼 고요했다.

“모두 크라운 캐슬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갔다고?”

“예, 주변에 남아 있는 병력은 고작 열다섯쯤 됩니다.”

“…수상한데.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왜 철수했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뒤가 아주 구렸다.

분명 이 도시 전체를 뒤져서라도 뒤쫓아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레온이 워렌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남매 둘이 사이가 무척 좋은 것 같네.”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작전 회의가 모두 끝났는지 에드먼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쪽으로 와. 우리 계획을 설명해 줄 테니.”

넓은 지도 한 장을 둘둘 말아 제 어깨를 톡톡, 쳐대는 모습에 레온이 후드 속에서 입술을 삐죽였다.

“명령은 사절이야.”

“그렇게 들렸어? 권유였는데.”

“헛소리.”

“화내지 말고. 자, 이쪽으로.”

불빛이 약한 촛불 하나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흔들거리지 않도록 다리를 잘 고정하고 에드먼드가 나무 테이블 위에 넓은 지도를 펼쳤다.

크라운 캐슬이 위치한 덴버그, 서대륙의 중앙 수도가 그려져 있는 지도였다.

“우리 정보원이 확인한 결과, 이 수로를 기준으로 크라운 캐슬이 있는 상류 구역은 완전히 폐쇄됐어.”

에드먼드가 톡톡, 덴버그를 가로로 관통하는 수로를 가리켰다.

상류와 하류를 구분하는 거대한 규모의 수로 타워 출입문을 모두 걸어 잠갔다.

“크라운 캐슬 보안 강화를 위한 조치라고는 하는데 우릴 잡으려는 거겠지. 이곳에 가둬서.”

“나갈 방법이 전혀 없는 거야?”

“작정하고 봉쇄한 구역을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글쎄.”

“우리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잠시 말을 아꼈던 에드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이제 크라운 캐슬을 가리켰다.

“현재 이곳에 붙잡혀 있는 귀족 및 그의 가신들은 대략 오십여 명 정도.”

혐의가 없는 귀족들을 여태껏 붙잡고 있는 이유는 빤했다.

“죄인을 만들려는 거야.”

모든 계획은 성공했다.

하일 데로니스가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는 모습도 보았고, 그 수많은 귀족들에게 전해야 할 이야기도 모두 내뱉었다.

“왕가의 후계자가 살아 있다고 했지.”

“그래, 분명한 사실이야.”

연기가 지독하고 아비규환의 상태였지만 그곳에 있던 레온도 똑똑히 들었다.

그게 사실이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귀족들 마음에 한 조각 불신이라도 던져두었다면 그게 훗날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모르는 일.

“놈은 이번 일을 뒤집어씌울 가문을 정할 거야. 반란군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을 테니까.”

“병력을 모두 철수시킨 건 그런 것 때문일까?”

“그래, 수색은 계속되겠지만 은밀히 움직이겠지. 그러는 동안 안에선 주동자가 정해질 거고.”

하일 데로니스는 똑똑한 자였다.

오히려 이번 일을 귀족들을 억누르는 본보기로 삼을 수도 있다.

에드먼드와 반란군은 그런 하일 데로니스의 성향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냈다.

“그놈은 분명 이 모든 일을 공개적으로 진행하게 될 거야.”

반역 가문을 추려내고 그들에게 죄를 묻는 것 역시 공개적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컸다.

“또 왕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예정된 모든 일정을 다 소화하려고 들겠지.”

총 소집령에서 일어난 말도 안 되는 사건으로 왕의 권한이 떨어져선 안 될 것이다.

억지로 얻어낸 자리인 만큼 새 왕은 왕권에 집착했다.

“내일 저녁, 예정대로 왕비의 연회는 반드시 열려.”

에드먼드가 후드를 뒤집어쓴 레온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네 도움이 필요해.”

기껏 빠져나왔지만 다시 크라운 캐슬로 돌아가야 한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그곳으로.

“부탁해, 아르테미스.”

***

새벽이 되자 레온과 워렌이 약속대로 메리가 머무르고 있는 여관으로 되돌아갔다.

전날 크라운 캐슬에서의 난리는 마치 없던 일인 듯 상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시 광장을 채우는 통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한 사람도 없네. 데로니스군 말이야.”

혹시 몰라 주변을 경계하며 왔지만, 마주친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계단을 밟고 올라온 레온이 곧장 문을 열었다. 밤새 잠도 못 자고 두 사람을 기다리던 메리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가씨!”

“…무사했구나. 정말 다행이야.”

레온도 손을 뻗어 메리를 안아주었다.

한숨도 못 잤는지 온갖 먼지가 묻은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오는 동안 따라붙은 자는?”

“전혀요. 이 차림으로 돌아다녀도 거들떠도 안 보던걸요.”

의심스럽지만 다행인 일이다.

레온이 손을 뻗어 벨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녀석이 그르릉거리며 뺨을 비비댔다.

“브라운과 케인은?”

“아직…. 다른 가문의 소식을 들어보니 붙잡힌 자들 중 일부는 풀려난 모양이던데요?”

“그래, 들었어. 오늘 새벽 풀려났다고?”

“예, 왕이 진상을 규명하는 중이래요.”

이곳 여관 안에 머무르는 몇몇 귀족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나저나. 레온이 휙 뒤돌아 워렌을 바라봤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지 모르겠다.

“나 옷 갈아입을 건데.”

“정말 가실 겁니까? 저도 없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어딜 가신다고요?”

이미 다 끝난 얘기다.

호위 기사로서 걱정이 되는 건 막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긴 싫다.

게다가 이 덴버그를 빠져나갈 걱정도 해야 하고.

“두 사람을 믿지만 정작 여기에 갇혀 있으면 무슨 소용이야. 우린 슐츠로 가야 하잖아.”

반란군의 정보에 의하면 데로니스군의 전 병력은 상류 지역을 가로막고 있는 수로 타워에 배치되어 있었다.

죄를 뒤집어쓸 가문이 정해지고 공개 처형이 집행된다면 보안 강화를 이유로 그들이 움직일 것이다.

그 전에 반드시 빠져나가야 한다. 이 덴버그를.

“지금 크라운 캐슬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나뿐이잖아.”

“…설마, 왕비의 연회에 가시게요?”

“응, 메리. 나 혼자 갈 거야.”

예정대로라면 오늘, 폰네시의 새 주인을 정하는 귀족 회의가 이어질 예정이었다.

가문의 수장이 왕과 대면하는 동안 왕비는 귀족 가문의 여인들을 초대했다.

잭 후작가의 새 안주인 몽브리텔 부인과 아르테미스 잭 역시 초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런… 어째서 일이 그렇게 된 거예요?”

차마 함께 가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짐이 될 바에는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는 게 낫다.

메리의 물음에 레온이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설명해 주었다.

“반란군이 있어. 그들이 아버지를 평안한 곳으로 모실 거야. 난 그들을 돕기로 했고.”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메리에게 모두 털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왕궁에 돌아가서 무얼 하시는데요? …너무 위험하잖아요.”

적진에 돌아가는 일이니 걱정이 앞설 만했다. 레온 역시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법이 있어. 수로를 개방할 거야. 덴버그 전체에 물이 넘치도록.”

새 왕이 크라운 캐슬을 차지하며 가장 먼저 시작한 건 수로를 개설하는 사업이었다.

물이 귀한 중앙 지역의 편의를 위한다는 이유였지만, 그레이트 대협곡의 수위를 조절해 폰네시 침략을 노렸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방류를 시키시겠다고요?”

“응, 수로 타워를 무너뜨릴 거야.”

그렇게 되면 하류 지역까지 물이 넘치는 것은 물론, 그곳에 밀집되어 있는 병력 대부분의 발을 묶어둘 수 있게 된다.

“우린 그 틈에 지하 수로를 통해 그레이트 대협곡까지 넘어갈 거고.”

계획은 완벽했다. 오랜 시간 크라운 캐슬을 조사해온 반란군이 이 일에 동행하기로 했다.

‘그게 에드먼드 놈이라는 게 문제지만… 어쩔 수 없지. 놈의 얼굴을 아는 자는 없을 테니까.’

워렌은 아티쿠스의 신분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잭 가문이 일에 휘말린다면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건 레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가 되면 난 나로 돌아가면 돼.”

에드먼드의 옷을 입고 이 긴 머리칼을 치우기만 하면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반란군이 이곳을 지켜줄 거야. 워렌이 성 밖에서 날 기다릴 거고. 그러니 걱정하지 마, 메리.”

레온이 손을 뻗어 메리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어째 눈을 뜬 그 순간부터 걱정만 시키는 것 같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

“케인과 브라운이 나타나면 내 상황을 알려줘.”

“…예, 아가씨.”

“성에서 만나면 내가 꼭 데리고 올 테니까 걱정 말고.”

메리가 겨우 무거운 입꼬리를 들어 올려 미소 지었다.

걱정은 앞서지만 보탠다고 레온에게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다.

결국 메리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럼 전 지금부터 아가씨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왕비의 연회에서 누구도 의심할 수 없도록.

“…그렇게까지?”

“당연하죠. 이럴 줄 알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준비해 왔답니다.”

“응?”

폰네시를 떠나기 전 잭 후작이 건네준 귀한 드레스였다.

메리가 우쭐거리며 옷장으로 다가갔다.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그 나무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자 안에는 아름다운 푸른빛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아르테미스 아가씨의 스무 번째 탄일 드레스래요.”

성인이 되는 해의 드레스는 아무리 가난한 집안이라도 공들여 준비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물며 후작가의 영애, 그것도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했던 막내딸의 스무 해 드레스는 그 아름다움이 남다를 만했다.

“아가씨의 진짜 나이가 스무 살이 되는 날, 이보다 더 아름다운 드레스를 준비해 드릴게요.”

메리가 레온만 들릴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 그럼.”

그녀가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를 귀족 가문의 영애로 만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워렌 경,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셈이죠?”

방해꾼은 이만 나가 주어야 했다.

아직 그에게 비밀을 알려주고픈 마음은 없을 테니까.

메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레온도 빼꼼, 고개를 내밀어 문가에 서 있는 워렌에게 시선을 주었다.

점점 드레스를 입은 공자의 모습이 익숙해진다. 머릿속에선 말도 안 되는 상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밖에서 지키겠습니다.”

워렌이 짧게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섰다. 허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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