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99화 (99/133)

99화

16장. 새 삶(5)

“데칸이라고 했나? 이곳 마다비아 출신이라고.”

반란군 대장이 거대한 암석 테이블에 기댄 채 물었다.

묻기는 하지만 누가 데칸인지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의 매서운 눈동자는 가장 작은 데칸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렇소만?”

일을 그르칠 생각은 없었지만 대답이 그렇게밖에 나오지 않았다.

데칸이 퉁명스럽게 툭, 말을 내뱉고도 한참 동안 대장 놈을 바라보았다.

“기 싸움을 걸어오는군. 역시 마다비아인다워.”

“뭐?”

듣고 있자니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마다비아인답다고?

“네놈이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뒤편을 지키고 있는 반란군 병사들이 데칸을 예의 주시했다.

여차하면 공격을 감행할 듯 무기를 고쳐 쥐는 것을 보며 통나무가 툭,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됐어, 통나무. 이런 오해야 지난 십 년 동안 지독하게 받아왔지.”

이 마다비아를 거점으로 삼고 스며들길 십 년.

그동안 자유인들의 반발과 의심스러운 시선에 익숙해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봐, 데칸.”

반란군 대장이 그의 앞으로 향했다.

이곳저곳 흉이 진 그 얼굴은 한평생 검을 잡은 헤리스도 두려움을 느낄 만큼 주름이 깊었다. 그건 삶의 굴곡이었다.

“네가 알던 고향을 빼앗아 미안하게 됐다.”

그가 상처 깊은 손을 내밀었다.

내내 심술궂은 표정으로 서 있던 데칸도 예상치 못한 행보였다.

“…알긴 아는군.”

“듣자 하니 십오 년간 감옥에 있었다고. 그간 연락을 하고 지낸 동료는 없는 건가?”

“있었지. 분명 있었어.”

“그래?”

“그래, 마다비아가 이렇게 됐다는 꼴을 전해주진 않았지만 말이야.”

그 대답에 통나무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다비아가 반란군의 거점으로 변했다는 건 세상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되는 사실이었다.

“네가 나고 자라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라 실망할 순 있겠지만.”

반란군 대장이 데칸의 두 눈을 똑똑히 바라봤다.

“이곳 자유인들에게도 새 삶이 생겼어.”

“…새 삶이라고?”

“그래.”

오래도록 손쓸 수 없는 상태였던 이 쓰레기 소굴에 새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 건 십 년 전 일이었다.

가이아 왕조가 무너지고 데로니스 대공이 서부와 남부의 대영주와 함께 손을 잡아 반역을 일으킨 지 스물세 번째 해가 지났다.

지독한 삼 년 전쟁이 끝난 후.

데로니스 세력은 가이아 왕조의 유일한 지지 세력인, 동북부 폰네시의 몬데이어 공작에게 휴전을 제안했다.

“그러는 동안 루시오 공작께선 수많은 동맹 세력을 모으고 데로니스와 맞설 힘을 키웠지.”

제아무리 대단한 몬데이어라도 수적 열세를 이겨낼 방법은 많지 않았다.

루시오는 데로니스와 맞서기 위해 수많은 가문을 지원하고 그들과 관계를 쌓아갔다.

“그러면서도 공작은 훗날을 위해 반드시 세력이 양분되어야 한다고 믿었지.”

가이아 왕조를 복위시키기 위해선 폰네시, 단 하나의 세력이 구심점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공작께선 모두가 인정할 만한 또 다른 구심점을 찾아내 우리 반란군을 만들었다.”

듣고 있던 헤리스의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그의 곁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오래도록 지켰지만 이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하는 불편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죽은 이를 찾아가 해답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

“이제는 공작께서 우려한 게 무엇인지 안다.”

헤리스가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반란군 대장이 엔드해가 모두 보이는 넓은 절벽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잠시간 파도치는 절벽 아래를 바라봤다.

루시오 몬데이어가 걱정한 일은 현실이 되었다.

“소유한 영지, 이 서대륙의 땅은 언젠가 반드시 데로니스 놈들에게 빼앗길 거란 사실을 알고 계셨던 거야.”

데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이 마다비아를 장악한 게 루시오, 그 몬데이어 공작의 뜻이란 소리를 그리 장황하게 떠들어대는 거요?”

허울 좋은 소리로 듣기 좋게 포장했을 뿐, 결국 반란군이 이 마다비아를 점령한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폰네시가 넘어갔으니 이제 다음은 마다비아 차례겠군!”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만 떠들어대라, 데칸!”

더는 듣고 있을 수 없다. 통나무가 성큼성큼 다가가 데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피타도 손을 뻗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데칸이 아니라 그를 붙잡은 통나무를 막아서는 손길이었다.

“네놈이 뭘 알아. 네가 없는 십오 년 동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뭘 아냐고!”

“그만해도 좋다, 통나무.”

“이놈에겐 설명할 필요 없습니다. 이곳에 몰래 잠입했고, 알아선 안 되는 정보를 알게 됐으니 우리 법대로 처리하시죠.”

“가관이군! 우리 법이라니! 우리에게 법 따위가 존재했더냐, 통나무!”

나고 자라 평생 그리워하던 고향이 정반대로 뒤바뀌었다.

데칸은 이제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고래고래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여긴 마다비아가 아니야! 네놈들도 데로니스와 다르지 않아!”

이 변화를 받아들이기엔 지난 십오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마다비아를 그리워했다.

사람들이 아무리 손가락질해도 데칸은 이곳에서 경험했던 모든 게 결국 제 인생을 구성하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곳에 사는 자유인들에게서 무얼 빼앗아간 거지? 우리에게서 무엇을 훔쳐냈냐고!”

이곳은 무엇 하나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없던 제 삶이 유일하게 뜻대로 굴러가는 곳이었다.

데칸이 망연자실해 울퉁불퉁 물이 고인 바닥에 주저앉았다.

화가 나 씩씩거리던 통나무도 그 모습에 입술을 씹었다.

그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른다.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데로니스 놈들은 누군가를 찾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마다비아를 조금씩 점령해 왔다.”

“…뭐?”

“그게 네가 알고 있는 마다비아였지.”

놈들은 조금씩, 조금씩 이 마다비아에 악을 심어놓고 자유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희망 따윈 꿈도 못 꾸도록, 또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찾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던 중 너와 네 패거리들이 변화를 일으켰고 악의 고리가 끊어졌지.”

강한 자가 약자를 무너뜨리고, 그 약자가 더 약한 자의 삶을 빼앗는 굴레가 끊기고 말았다.

지배 없이 마다비아를 장악하길 바랐던 놈들의 목표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

“그 중심이던 네가 사라지고 난 후 놈들은 본격적으로 이곳에 쳐들어왔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것을 불태울 것처럼 곳곳에 불을 지르던 그때, 반란군이 마다비아를 찾았다.

“우린 그 누구의 삶도 빼앗지 않아.”

그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길 바랐을 뿐이다.

“더 이상 아무도 삶을 빼앗기질 않도록 말이야.”

반란군은 데로니스 놈들의 반역으로 모든 것을 빼앗긴 이들이 모인 조직이었다.

이미 잃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아직 빼앗기지 않은 것은 지켜낼 수 있다.

반란군은 데로니스 놈들을 몰아내는 전투를 매일같이 했다. 일 년이 넘도록 힘겨운 시간이었다.

“이봐, 데칸.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잘하는 걸 하고 살아.”

통나무가 주저앉은 그에게 손을 내뻗었다.

“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염탐하고, 다른 이들은 물건을 훔쳐오지. 사람을 해치진 않지만 그렇다고 개과천선한 건 아니야.”

“…뭐라고?”

“우린 능력대로 제값을 받고 살아가. 난생처음이라고,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느낌!”

“…….”

“잃은 건 아무것도 없어, 친구.”

통나무가 데칸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끔찍했던 시간을 겪고 난 후 마다비아의 자유인들은 그간의 진실을 모두 전해 듣게 됐다.

“그리고 선택했을 뿐이야. 이들과 함께 뜻을 모으기로.”

잃을 뻔한 순간 이곳이 지켜야 하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지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힘을 키우기 위해 반란군과 공생하기로 선택했다.

“…진정 그랬다고?”

이곳이 넘어간 게 아니라니.

데칸이 안도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반란군 대장이 그 험악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자, 오해가 풀렸다면 우리 소개는 이쯤 하도록 하고.”

그의 형형한 눈빛이 나머지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길라의 탈영병들께 물어볼 것이 좀 있지.”

데칸이 언제 울었냐는 듯 코를 훌찌럭, 닦아냈다.

거짓말이 들키면 안 되는데. 그의 퀭한 눈은 불안하게 두 사람을 살피고 있었다.

“저희는 말단 병사라 원하시는 정보를 알고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한발 빠르게 밑밥을 깐 피타가 으쓱하며 다가오는 반란군 대장을 마주했다.

그 옆에 우뚝 서 있는 헤리스는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모습을 감추기 위해 애썼다.

‘루시오와 긴밀한 관계라면 나를 모를 리 없어.’

마주쳐선 안 된다.

그가 다가온 반란군 대장의 발치를 내려다볼 때였다.

“공작의 머리를 회수하기 위해 길라에 배편을 마련해 두었을 텐데.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일이라면.”

“그곳에 들이닥친 살수 말이야. 그 일로 우리 반란군의 회항길이 막히고 말았어. 모두 덴버그에 갇혀 버렸다고.”

제2, 제3의 퇴로를 분명 마련해 두었으나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다는 데 있다.

“대체 누가… 폰네시의 병사들을 그토록 잔혹하게.”

폰네시를 노린 것이라면 반란군에겐 적이나 다름없다.

총력을 다해 데로니스 놈들을 물리쳐도 모자랄 판에 또 다른 적이 생긴 거라면 정보가 필수였다.

“길라를 떠나기 전, 놈과 마주쳤나?”

피타가 눈알을 굴려 헤리스를 바라봤다.

폰네시나 루시오와 관련된 일이니 선택권은 그에게 있다.

“놈에 대해 알아내야 해.”

반란군 대장이 넓은 테이블 위에 서대륙 지도를 빠르게 펼쳤다.

그러곤 한가운데 수도 덴버그에 위치한 크라운 캐슬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놈이 덴버그로 향하는 걸 막아야 해.”

“막는다고?”

“그래, 놈에 대해 알아낸다면 발길을 묶어둘 수도 있겠지.”

“왜 막아야 한단 말이오?”

이해할 수 없다.

“놈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소속을 알아낼 수 있을 텐데. 어째서 막아설 생각이지?”

지도에 닿아 있던 그의 시선이 헤리스에게 옮겨갔다.

반란군 대장은 대답 없이 그의 자리로 돌아가 검은 천에 둘둘 감긴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헤리스가 피타를 제 등 뒤에 숨겼다. 무얼 하려는지 몰라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눈치껏 데칸도 피타의 등에 몸을 숨기고 험악하게 미간을 모았다.

어쨌다 저쨌다 말이 많더니 결국 이런 식이냐!

“누군지도 모르는 놈이 덴버그에 기어들어 가는 꼴은 봐줄 수 없지.”

그가 검은 천에 둘둘 감겨 있던 헤리스의 검을 암석 테이블에 내던졌다.

“그곳엔 레온 몬데이어가 있으니까.”

“…뭐?!”

“헤리스 타린, 네놈도 공자를 노리고 있겠지?”

해안 동굴이 무너질 것처럼 진동했다. 그건 아래서부터 수많은 장정이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였다.

반란군 대장이 검을 뽑아들었다. 몬데이어 공작가의 검은 통나무가 일찌감치 저 먼 곳으로 들고 튄 지 오래였다.

“하나 너는 어디에도 가지 못할 것이다.”

루시오 몬데이어의 등에 칼을 꽂은 배반자.

“네놈은 여기서 죽을 테니까!”

반란군 대장이 헤리스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등 뒤에선 완전 무장한 반란군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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