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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00화 (100/133)

100화

17장. 운명Ⅱ(1)

“잭 후작가에 새로 온 행정관이라고?”

붙잡힌 이후 브라운은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일가가 모두 붙들린 다른 귀족들과 달리 혼자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사람들이 내뱉는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브라운은 정보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 침묵과 경청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예, 우딘 후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일 게 있나. 다 저물어가는 허울뿐인 귀족.”

하지만 그것도 끝이다.

브라운이 휴고 우딘, 즉 우딘 후작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브라운은 능숙하게 감정을 숨긴 채 그의 곁을 지켰다.

공자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신분을 빌려 쓴 잭 후작가와는 오래 전부터 가깝게 지내는 가문이라 행동거지에 더욱 조심성이 필요해졌다.

“난리로군. 새 후작 부인과 후작의 자제들께선 무사하신가?”

“예, 다행히도 붙잡히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셨습니다.”

“그것 정말 다행인 일이야.”

지금이야 귀족들만 따로 연회장 옆 대기실에 격리돼 있지만, 하루 전에 마주한 난리는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붙잡힌 반역 세력이 모두 목숨을 끊었다. 작은 정보 하나라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에 크라운 캐슬이 피로 물들었다.

“그 연약한 아르테미스가 그런 끔찍한 광경을 안 봤으니 정말 다행인 일이지….”

우딘 후작이 먼 곳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브라운은 아르테미스의 이름이 나오자 한껏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이곳을 빠져나간 뒤 가장 위험한 사람을 꼽으라면 우딘 가문의 사람들일 터.

‘조심해야 해. 공자님의 정체를 들킬지도 몰라.’

아르테미스의 병세까지 걱정할 정도라니.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아티쿠스의 외모 변화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참, 며칠 전 사이먼에게서 서신이 왔더군.”

후작이 고개를 돌려 갈색 머리의 사내를 바라봤다.

사이먼이라니. 점차 퇴로가 막히는 기분에 브라운이 꿀꺽, 침을 모아 삼켰다.

“작은아드님 말씀이시군요.”

“아들이었던, 놈이지.”

의심이 깃든 눈빛은 아니었지만 눈썹 사이를 좁게 모으는 게 무언가 의아한 점이 있는 듯했다.

후작이 예리한 눈으로 한참이나 브라운을 살폈다.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왔더군.”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잭 가문에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던데.”

“예?”

이번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제아무리 대단한 브라운이라도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매번 넘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알아두어야 할 소식은 없는 건가, 행정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근래에 후작 가문에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만.”

“그래? 그거 이상한 일이로군. 그놈이 내게 연락할 정도라면 분명 뭔가 일이 있었을 텐데.”

사이먼은 가문에서 내쫓긴 후 쥐 죽은 듯 납작 엎드려 살았다.

폰네시 쪽으로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무서운 휴고 우딘의 압박에 충실히 따른 것이다.

“그놈이 망상증은 있지만 멍청한 놈은 아니거든.”

친척집의 양아들로 보내졌어도 핏줄은 핏줄 아닌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으면 재정적인 지원이 영영 끊길 것을 알아챈 사이먼은 시키는 대로 가문과 연은 끊고 잘 살아왔다.

적어도 이번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새 후작 부인을 들이시긴 했지만….”

“그래, 그 소식도 의문이었지. 마지막 부인을 끝으로 더는 식구를 늘리지 않겠다고 나와 이야기를 한 적이 있거든.”

그 역시 브라운의 입장에선 뒷목이 서늘한 이야기였다.

곰곰이 상황을 곱씹던 우딘 후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렴, 이런 상황에 잭 가문에 일어난 재미있는 일 따위가 도움이 될 리 없었다.

“혹시 몰라 그 아이를 이 덴버그에 불렀네만, 크라운 캐슬 근처엔 얼씬도 말라 일러둔 게 잘된 일일지 몰라.”

“…아드님을 부르셨습니까? 이곳 덴버그에요?”

“그래, 평소와 다른 짓을 하니 놈을 만나볼 필요성을 느꼈지.”

물론 그 모든 건 귀족 회의와 폰네시의 새 주인이 정해지고 난 뒤 생각해볼 일이었다.

“지금은 놈을 만나기는커녕… 내가 여길 나갈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어.”

우딘 후작이 중얼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지난밤 몇몇 귀족 가문이 이곳을 나선 이후, 막을 수 없는 불안감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주변을 에워싼 데로니스군의 수는 점점 많아지고, 체력은 떨어져 갔다.

붙잡힌 이후부터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상황이라 배곯을 일 없던 귀족들의 상태는 점차 나빠져만 갔다.

“이보게, 행정관. 내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건.

“예, 후작님.”

일평생을 통틀어 가장 위험한 일이 들이닥칠 것 같다는 본능적인 직감이 온몸을 지배한다는 것.

“내가 만약 잘못된다면… 반란군에게 이 메모를 전해주게.”

그가 브라운에게 급하게 찢어 쓴 메모 하나를 건넸다.

“예?”

자세히 물어볼 틈도 없이 곧이어 수많은 데로니스군이 들이닥쳤다.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여기사가 보기에도 날카로운 대단한 검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반드시 전해야 하네. 이 서대륙의 운명은 여기서 끝나선 안 되니까!”

그들이 한 사람을 노리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휴고 우딘이 마지막 힘을 다해 여기사 에스델에게 달려들었다.

그래봤자 두 손이 묶이고 먹은 것도 없는 늙은이의 몸짓은 너무도 느리고 보잘것없었다.

“이자를 붙잡아라!”

에스델의 고함이 화려한 천장을 뒤흔들었다.

삼삼오오 모여 겁먹은 귀족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수많은 병사들이 우딘 후작을 붙잡아 만인 앞에 꿇어앉혔다.

“폐하를 시해하려 한.”

드디어 모든 죄를 뒤집어쓸 가문이 정해졌다.

“우리 서대륙의 반역자다.”

***

몇 번 입었다고 화려한 드레스가 몸에 익숙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먼저 마차에 올라 있던 에드먼드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한 번만 더 레이디 타령을 해댄다면 마차에서 내쫓겠어.”

마음 같아선 검으로 찔러 죽여주겠다느니, 부채로 양 뺨을 내려쳐 수치를 주겠다느니 하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귀족 영애로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레온이 이를 꽉 깨물고 마차 위에 올라타 에드먼드에게 경고했다.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동행일 뿐이니, 선 넘지 말도록 해.”

레온이 서둘러 부채로 얼굴을 가리곤 시선을 돌렸다.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워렌에게 당부할 것이 있었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아.”

그만 들릴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이 덴버그를 무너뜨려. 내 걱정은 말고.”

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목걸이 하나를 건네며 똑같이 당부했다.

“가운데를 열어 줄 끈을 잡아당기면 검날이 나옵니다. 작은 단검이지만 필요한 순간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럴 일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푸른 검을 잃었을 때 사용할 만한 무기는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래, 케인과 브라운이 나타나면 잘 부탁해.”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레온이 에드먼드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말이 한번 울자 곧이어 마차가 크라운 캐슬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

“…….”

내부엔 오직 침묵뿐이었다. 궁금한 것은 없었다.

이미 수차례 반란군으로부터 수로를 제어하는 시설물의 위치를 전해 들었고, 해야 하는 일도 분명히 알고 있었으니까.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기엔 떠맡고 있는 역할이 중요했다.

레온이 무표정한 얼굴로 눈에 익은 바깥을 살폈다. 이전과 달리 크라운 캐슬로 향하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도로엔 귀족들이 도망가고 병사들이 추적하며 엉망이 된 잔해가 가득했다.

“왜 사랑하게 된 거야?”

“…응?”

뜬금없는 소리에 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에드먼드는 줄곧 그런 레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온 몬데이어.”

서늘해 보이는 두 눈이 이내 미소를 담았다.

눈 밑을 차지한 작은 점이 휘어졌다.

“폰네시의 후계자 말이야. 같은 영지에 산다는 접점 말고는 만날 기회도 많지 않았을 텐데.”

마차가 덜컹거렸다. 레온이 쏟아지려는 모자를 붙잡고 눈을 깜빡거렸다.

에드먼드가 팔을 뻗었다. 잡을 것이 없는 내부여서 위험했다. 레온이 고맙다 중얼거리곤 그 팔을 조심히 붙잡았다.

“이유 같은 건 없어. 중요하지도 않고….”

“음, 뭐 얼굴을 보고 반한 건가? 이 서대륙에 둘도 없는 미남자라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

“그, 그래. 잘생긴 얼굴을 좋아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어?”

혹시 무얼 눈치챈 건가 싶어 레온이 눈을 굴렸다.

다행히 에드먼드는 바깥 상황을 주시하느라 이쪽엔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레온이 팔을 놓고 드레스를 정리했다. 부채도 접어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내 마음도 마음이지만 누구라도 그런 대우를 받는 루시오 공작을 봤다면 똑같이 했을 거야.”

이미 죽어 아무것도 머무르지 않는 몸이겠지만, 남아 있는 건 그것뿐이다.

루시오가 이 세상에 살았다는 증거는.

“내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셨잖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어.”

무언가를 위해 일생을 다 바친 사람의 말로가 그런 식이어선 안 된다.

적어도 제 욕심으로 무고한 생명을 수없이 탈하는 하일 데로니스 같은 놈에게 짓밟혀서는 더더욱.

“그래,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분에게 적이 많은 만큼 도움을 받은 사람도 많으니.”

에드먼드가 금세 수긍했다.

게다가 이번 일을 돕기로 한 이상 서로를 의심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몰아붙이려던 의도도 없었고.

“더는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제를 구했어.”

“뭐?”

미안한 만큼 에드먼드가 루시오와 관련된 사실을 더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이번 일만 잘된다면 모든 시신을 수습할 수 있어. 그분의 영면식을 치러드릴 수도 있을 거고.”

“그게 정말이야?”

그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수많은 바퀴가 굴러가고 그 뒤를 따랐던 말발굽에 의해 해자 위 다리가 몹시 상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레온의 모자가 흘러내렸다. 감춰둔 짙은 남색 머리칼이 찰랑였다.

‘안 돼. 눈이 보이겠어.’

푸른 눈동자만큼은 절대 들켜선 안 된다.

레온이 재빨리 부채를 집어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런, 길이 정말 험하….”

모자를 주워주기 위해 에드먼드가 손을 뻗을 때였다. 순간 마차가 다시 한번 돌부리를 밟고 심하게 덜컹거렸다.

기울인 에드먼드의 몸이 순식간에 레온 쪽으로 넘어갔다. 레온이 반사적으로 손을 내뻗었다. 그가 한 품에 안겼다.

“위험…!”

잠시 공중 위에 머물렀던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며 멈추어 섰다.

묵직한 드레스 자락이 흔들리며 꽃잎처럼 이리저리 흩어졌다.

목 가까운 곳에서 에드먼드의 숨결이 느껴졌다.

레온이 두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채기도 전에 에드먼드도 두 눈을 떴다.

“…….”

마주 닿은 레온의 심장 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어떻게 이토록 생생이 느낄 수 있는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에드먼드가 재빨리 고개를 떼어낼 때였다.

“방금 전 일은 사과하지. 의도가 아니었어. 그러니까 내 말은….”

이대로 그를 바라본다면 숨겨온 비밀이 들키고 말 것이다.

레온이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모로 쓰러지려는 그녀를 이번엔 에드먼드가 재빨리 팔을 뻗어 받아냈다.

“…아르테미스?”

레온이 정신을 잃은 척 미동 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바라보는 에드먼드의 시선에 가슴이 쿵쿵거렸다.

들킬까 두려운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미치겠네….”

적어도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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