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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01화 (101/133)

101화

17장. 운명Ⅱ(2)

사과를 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결례를 범한 건 분명한 일이다.

위협을 가하기 위해 품에 안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매우 사적인 접촉이었다.

‘근데 왜 계속 이러고 있지?’

게다가 그렇게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후, 그녀는 줄곧 품에 안겨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그 상황에 기절할 만큼 연약하지 않다는 건 진작 파악했다.

품에 기대 안겨 있는 지금도 아마 눈을 언제 떠야 하나 타이밍을 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르테미스.”

아무래도 도와줘야겠지.

에드먼드가 제 품에 안긴 레온에게 속삭였다.

“이제 곧 검문소에 도착할 텐데.”

고운 눈썹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이대로 내게 안겨 있다면 서대륙에 소문이 퍼지고 말걸.”

도톰한 아랫입술에도 힘이 들어갔다. 바라보던 에드먼드가 웃음을 참았다.

“잭 후작가의 하나 남은 여식이 호위 기사와 밀회를 즐기다가 들키고 말았다고.”

이 미친놈이.

레온의 미간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찌푸려졌다.

에드먼드가 시치미를 떼고 놀림의 종지부를 찍었다.

“사랑하는 임의 귀에 소문이 들어가길 원하는 게 아니라면 어서 일어나.”

벌떡.

품에 안겨 가만히 듣고 있던 레온이 곧장 몸을 일으켜 손부채질을 해댔다.

아무렇게나 놓아둔 모자를 집어 쓰고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에 에드먼드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잠시 어지러워서 그랬을 뿐이야. 오해하지 마.”

“그래, 오해할 게 뭐 있겠어.”

목소리엔 웃음이 뒤섞여 있었다.

“불편한 드레스를 입고 허리를 꼿꼿이 세울 바에야 내 품에 기대는 게 더 편한 건 나라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

“놀리지 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을 뿐이니까.”

“그랬던 거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떠드는 것보단 차라리 솔직한 게 더 먹히는 법이다.

레온이 모자에 달린 레이스 뒤에 시선을 숨기고 에드먼드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직전 일로 괴롭히지 않았다.

“병사들이 보여. 준비해, 아르테미스.”

에드먼드가 미소를 거두고 건네받은 신원 확인서를 꺼내 들었다.

에스델은 보이지 않았지만 검문소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레온이 치마 안쪽, 다리에 숨겨놓은 푸른 검을 잘 확인하며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잭 후작가의 넷째 영애 아르테미스 잭 아가씨의 마차입니다. 왕비 폐하의 초대를 받아 크라운 캐슬을 찾았습니다.”

“잠시 몸수색을 해야 하니 문을 여시오.”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에드먼드가 마차를 나섰다.

그러곤 들고 온 잘 손질된 검을 제출하고 얌전히 몸수색을 받았다.

안쪽을 바라보는 병사들이 의아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여시종은 없소?”

“난리 통에 두고 왔습니다.”

“…하면 스스로 몸수색을 하시오.”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매 끝과 치맛자락, 겹겹이 겹쳐 입은 외투를 모두 벗어 보이고도 모자까지 벗어 아무것도 없음을 증명해야 했다.

겉옷을 벗자 자태가 드러났다. 푸른빛 드레스는 화려하고 수려했다. 감싸고 있는 몸의 곡선을 그대로 나타내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에드먼드는 그곳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쓰며 병사들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 목걸이를 좀 봐야겠는데.”

“가문의 가보를 함부로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레온이 단호하게 답했다.

아르히 잭으로부터 받아낸 잭 가문의 가보이자 워렌이 챙겨준, 만일에 대비한 작은 무기였다.

“장신구 하나까지 간섭할 거라면 초대하지 말았어야지.”

레온이 부채 뒤에 얼굴을 숨기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병사들의 미간도 걷잡을 수 없이 일그러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난 지 삼 일.

왕과 왕비는 왕가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과 쓸데없이 터져 나오는 풍문에 지나치게 예민했다.

“내가 돌아가야 만족하시겠소?”

오늘 밤 있을 연회만큼은 온전히 진행되어야 한다.

그 누구의 방해도, 불안감이나 불쾌함이 크라운 캐슬의 담을 넘어가서도 안 되는 것이다.

“됐소. 돌아갈 때 무기를 받아 가시오.”

결국 다른 말 없이 마차를 가로막고 있던 병사들이 비켜섰다.

에드먼드가 여유롭게 손을 내밀어 레온이 내리길 기다렸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마차와 마부는 더 이상 크라운 캐슬 안에 진입할 수 없다는 것.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레온이 에드먼드와 함께 내문으로 향했다.

웅장한 크라운 캐슬은 여전히 푸른 하늘 아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이번엔, 반드시 무너뜨려 줄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에드먼드, 하나 물어볼 게 있어.”

연회에 앞서 초청받은 귀족 부인과 영애들은 각각 크라운 캐슬 내에 위치한 손님용 사저에서 대기하게 됐다.

초대에 응한 순간부터 목숨 줄이 다시 그들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것임을 여기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불응할 수도 없다. 그 순간 데로니스 왕가에 불복한 것이 되어 반역의 무리로 낙인찍힐 테니 말이다.

“얼마든지. 궁금한 게 뭔데?”

두 사람 사이엔 애프터눈 티 세트가 보기 좋게 내어져 있었다.

물론 레온도, 에드먼드도 데로니스 놈들이 대접한 음식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너는 그들에게 무엇을 빼앗겼지?”

어째서 반란군이 되었냐는 물음이었다.

“만일 오늘 연회 이후 허락이 떨어진다면 너희 반란군 몇몇 정도는 우리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큰일을 해내기 전 그가 얼마만큼 데로니스 왕가를 증오하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하일 데로니스가 우릴 군말 없이 보내준다면 이런 일을 벌일 필요가 없는 거잖아?”

수로 사업은 새 왕이 왕권을 잡고 처음으로 공들인 일이었다.

주변 경계가 삼엄한 것은 당연한 일. 아무리 내부 지리에 익숙하고 모든 계획이 완벽하다 하더라도 위험이 따르는 일임은 분명했다.

“그래, 만일 그런 상황이 온다면 이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겠지.”

에드먼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행운이 찾아오진 않을걸. 너도 알다시피 하일 데로니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귀족들을 붙잡아두려 할 거야.”

“아마 그렇겠지.”

왕비의 연회를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 역시 그런 수순이었다.

“물밑에서 진상을 밝혀내고, 표면적으로는 본보기 삼은 귀족을 공개 처형하면서 흐트러진 분위길 잡아내려 할 거야.”

그 가문이 잭 후작가가 아니란 보장은 없었다.

브라운과 케인이 크라운 캐슬 내에 있다는 사실이 레온 역시도 못내 마음에 걸렸다.

레온이 인상을 찌푸리자 에드먼드가 분위길 환기시켰다. 사기를 꺾을 의도는 없었다.

“내게 무얼 빼앗겼냐고 했지?”

에드먼드가 못살게 괴롭히기만 하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 안에 고인 주황빛 따뜻한 차는 온기를 잃어 흰 표면에 진한 자국을 남겼다.

“아무것도.”

“…뭐?”

“아무것도 잃지 않았어. 가져본 적도 없으니까.”

그는 분명 웃고 있지만 그 감정은 가짜였다.

마주 보고 있는 레온은 느낄 수 있었다.

폰네시와 루시오를 잃었을 때, 처음 거울 속에서 마주한 제 자신의 얼굴이 꼭 그랬다.

“반란군 내 수많은 이들도 그래. 태어남과 동시에 고아가 된 아이들이 태반이지.”

전쟁의 참혹함은 그런 데 있다.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는 아이들이 태어나며 짊어져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탄생은 죄악이고, 가정의 공백은 지옥이었다.

무언가를 손에 쥐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아이들 대부분은 스무 해가 넘는 세월 속에 반란군으로 자라났다.

“내 불행을 빌미로 너희를 위험에 빠뜨리진 않아.”

크라운 캐슬 내에 잠입이 가능한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니 만일 빠져나갈 수 있다면 너는 가족들에게 돌아가도 좋아, 아르테미스.”

하일 데로니스가 모든 귀족을 적으로 돌리진 않을 것이다.

그도 결국 각지 영주들의 도움이 필요한 서대륙의 왕일 뿐이니까.

잭 가문이 이번 일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게 밝혀지면 무리는 이 덴버그를 무사히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네게 데로니스 놈들을 무너뜨리고 싶은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에드먼드의 짙은 눈동자가 레온을 마주했다.

귀하게만 자라온 병약한 귀족 아가씨가 그런 이유가 어디 있겠냐고 답할 차례였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걸 꿰뚫어보는 듯한 에드먼드의 눈빛에 레온이 드레스 자락을 움켜쥘 때였다.

“…….”

쾅쾅쾅!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다급한 손길에 두 사람이 시선을 돌렸다.

“아르테미스, 가만히 있어.”

에드먼드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뒤쪽으로 손을 뻗어 레온을 제지하고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서서히 문 쪽에 다가갔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게다가 이런 다급함은 반갑지 않은 신호였다.

“누구냐.”

에드먼드의 차가운 목소리가 미지의 인물에게 닿았다.

잠시간 쾅쾅거리던 손길이 멎었다. 레온도 인상을 찌푸렸지만, 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구지?’

아직 왕비의 연회가 시작되기까진 시간이 남아 있었다.

주요 귀족도 아닌 변방의 다 저물어가는 후작가의 여식을 찾아올 만한 이는 전혀 없었다.

적어도 이 크라운 캐슬에서.

“…….”

에드먼드가 지체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불확실한 상황 하나를 더 늘리는 것보단 빠르게 확인하는 게 이득이었다.

그러자 문 앞에 귀를 대고 있던 누군가가 빠르게 검을 뽑아 들었다. 데로니스군의 전투복을 입은 병사였다.

“아르테미스!”

에드먼드가 재빨리 레온의 앞을 지켰다.

공격 자세를 취한 데로니스군이 그 목소리에 다급하게 전투모를 들어 올렸다.

압도적인 덩치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새빨간 머리. 레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 고, 공주님!”

케인!

하마터면 본명을 부를 뻔했다.

레온이 실수하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고 그에게 달려 나갔다.

에드먼드가 붙잡을 새도 없이 아주 빠른 발걸음이었다.

“공주님이라고…?”

케인이 팔을 뻗어 달려온 레온을 붙잡아 주었다. 아직 이런 드레스를 입고 달리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여기 내가 있단 건 어떻게 알고?”

“우선 들어가세요. 들어가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아는 사이가 분명했다.

에드먼드가 자리를 비켜서며 재빨리 문을 닫아 그곳을 지켰다.

“자, 이제 말해봐. 어떻게 된 거야? 행정관은?”

케인이라면 분명 브라운을 구출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 것이다.

아직까지 그와 관련된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어 애가 타던 참이다.

“그것 때문에 왔습니다. 보시다시피 데로니스군인 척하고 있어 아가씨가 연회에 참석하신단 소식을 들었거든요.”

귀족들이 묵는 공간을 찾아내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낯선 목소리가 튀어나와 좀 당황하긴 했지만….

저놈은 대체 누군데 우리 공자님이랑 같이 있는 거지?

“…설명하자면 길어.”

“예, 그럼 급한 불부터 좀 끄자고요.”

케인이 숨을 고르고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휴고 우딘 후작이 이번 일을 모두 뒤집어쓸 것 같습니다.”

이번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될 가문이 정해졌다.

잭 가문과 가까운 관계지만 안타까움에 이처럼 급하게 달려오진 않았을 터.

레온이 숨을 몰아쉬고 물었다. 푸른 눈동자엔 어떤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행정관도 끌고 갔어?”

“…예.”

그를 구하기 위해 대기실 내 진입했지만, 이미 브라운은 에스델에게 끌려간 지 오래였다.

“신원 확인서를 버렸어요.”

케인이 찢어진 브라운의 신원서를 내밀었다.

“…이대로 정체를 숨긴다면 모든 죄를 뒤집어쓸지도 몰라요.”

확실한 신원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빠져나올 구멍이 없다.

‘…약속해 놓고.’

그가 선택한 게 다른 그 무엇보다 제 안전임을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레온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참았다.

정말이지 말도 안 듣는 충직한 부집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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