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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02화 (102/133)

102화

17장. 운명Ⅱ(3)

크라운 캐슬 내 지하 제한 구역.

브라운이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데로니스군을 마주 보고 있었다.

‘잘 생각해야 해. 공자님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우딘 후작의 곁에 서 있었으니 심문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곳에 모인 귀족들도 이번 사건이 고작 폰네시의 다 저물어가는 후작이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절차대로 후작을 잡아가고, 곁에 있던 이들을 하나둘 조사해대자 점차 의심이 피어나고 있었다.

‘내가 잭 후작가의 신원을 얻어 쓴 걸 들킬 순 없어.’

브라운은 우딘 후작과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나눈 조사 일 순위 대상이었다.

게다가 메모를 건네받는 모습을 들켰을지도 모른다.

브라운은 종이를 연못가에 던진 지 오래였다.

“네 이름은 뭐지?”

데로니스군 병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브라운을 탐색하고 있었다.

아직 일행들이 덴버그를 빠져나갔을 리는 없을 터.

괜히 잭 후작가의 거짓 신원을 운운하며 일행들을 이 일에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차라리 이 크라운 캐슬에 몰래 잠입한 죄인이 되는 게 낫다.

설령 레온에게 돌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우딘 후작과는 무슨 사이지?”

진즉에 잡아들여 몸수색을 펼쳤지만 신원 확인서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가문을 특정할 수 있는 소지품도 전혀 없었다.

특색 있는 외모도 아닌 데다, 귀족 가문의 가신인지 복장으로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이거… 얼결에 진짜 범인을 잡은 것 아니야?’

의심스러운 놈이다. 신입 병사가 두 눈을 빛냈다.

형식적인 절차였기에 일이 쉽게 끝날 줄 알았는데, 어쩌면 공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번뜩였다.

“이봐.”

놈이 좀 더 적극적으로 브라운의 주변을 뱅뱅 돌았다.

“보아하니 귀한 가문의 자제 같지는 않고.”

놈은 모르겠지만 디카르테 가문 역시 역사가 깊은 훌륭한 가문이었다.

“호리호리한 몸은 검 한번 쥐어보지 못한 것 같군?”

검술은 진작 배우고도 남았다. 검을 쓰는 것보다 머리를 쓰는 게 더 익숙할 뿐.

“흠…, 신원 확인서도 없어, 말도 안 해. 너 이러다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수가 있다고.”

왕가는 이미 범인을 잡아들였다. 잠시간 눈을 빛냈던 신참 병사가 설설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짜인 판에 괜한 변수를 던졌다가 겪게 될 화 같은 건 아직 경험치 없는 제가 견뎌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충 이름이라도 말해. 네놈을 풀어줄 테니.”

그러나 브라운은 그런 행운 따위는 전혀 믿지도 않았다.

“누구 마음대로?”

“에, 에스델 님!”

삼엄한 분위기의 제한 구역 문이 열리고 키가 훌쩍 큰 여기사 에스델이 나타났다.

‘큐어 가문이로군.’

그들은 서부 지역 이그리아를 다스리는 대영주 가문이었다.

슐츠의 타린 가문과 더불어 데로니스를 이 왕좌에 앉힌 주요 반역 세력이기도 했다.

“나가봐.”

“예, 에스델 님.”

신참 병사가 싹 입을 닫고 깍듯하게 고개 숙여 사라지고 없었다.

브라운은 미동 없이 에스델의 두 눈을 바라봤다.

채도 높은 녹안에 짙은 흑갈색 머리는 큐어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브라운은 레온 몬데이어, 폰네시의 후계자 곁을 지키는 부집사였다.

공자만큼 유명하진 않았지만 레온을 노리던 이들이라면 얼굴을 알고 있을 만도 했다.

“글쎄요.”

만일에 대비해 브라운 역시 변복을 했다.

짙고 곱실거리는 갈색 머리칼을 숨기기 위해 내내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검문소에서 마주쳤다면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브라운의 눈가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에스델은 유심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수많은 귀족과 그의 가신들을 모두 살폈으니 기억하지 못할 거야.’

게다가 그녀는 주로 귀족 부인들이나 그들의 여식을 담당했다.

마차 앞에서 워렌과 함께 몸수색을 받았던 자신을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브라운이 좀 더 당당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숨기는 게 있는 사람은 불안함에 지배받는 법.

레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당당해야만 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아. 신원 확인을 거부하다니.”

에스델이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꼭 기분 나쁜 안개처럼 브라운의 발치부터 불쾌함으로 물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좀 해봤지.”

“…….”

“네가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또 무엇을 숨기려 하는지.”

이제 에스델은 브라운의 등 뒤에 있었다.

“네가 우딘 후작의 추방당한 두 번째 아들일 가능성도 있겠지.”

비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후작과는 코빼기도 닮지 않았는데.”

에스델이 브라운의 머리칼을 확 잡아챘다. 고개가 뒤로 꺾여 이제 브라운은 저를 내려다보는 에스델과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윽.”

“사이먼 우딘이 덴버그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그자가 잡힌다면 네놈의 정체도 좀 더 확실해질 거야.”

에스델이 아주 가까이 브라운에게 고개를 내렸다.

금방이라도 맞닿을 것처럼 숨과 숨이 얽혀들었다. 찌푸려지는 인상에 그녀가 미소 지었다.

“내게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가설이 있는데 들어보겠어?”

무엇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쉽게 참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브라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검을 가졌고, 여차하면 사람을 쉽게 베어낼 수 있는 무자비함도 있었다.

“레온 몬데이어.”

에스델의 머리칼이 얼굴에 쏟아졌다. 그녀가 브라운의 귓가에 독안개 같은 목소릴 흘려냈다.

“난 네가 레온 몬데이어의 사람 같거든.”

서서히 목을 졸라오는 손길에 브라운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숨이 쉬어지질 않는다. 기꺼이 죽음을 각오했으나 못내 지키지 못한 약속이 브라운의 입술에 피를 맺히게 만들었다.

“그러니 지켜볼까? 내 말이 맞을지, 아니면 단순한 착각일지.”

에스델이 거세게 브라운의 머리를 테이블 위에 짓눌렀다.

단번에 고개가 꺾인 브라운이 겨우 숨을 토해냈다.

“너무 걱정하진 마. 네 정체가 뭐든 넌 결국 죽게 될 테니까.”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바보 같은 일을 용납할 순 없다.

에스델이 손을 털어내고 바깥에 서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놈의 입을 막고 죽지 못하게 감시해. 내가 죽이러 오기 전까지.”

“예!”

시끄러운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어쩌면 진실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브라운은 처음으로 손을 떨었다.

***

연회가 시작되었다.

“난 케니라고 합니다.”

“그래? 나도 케니인데.”

“뭐라고요?”

“보시다시피 정체를 숨겨야 해서 말이야.”

“말이 돼? 당신 대체 누구야?”

“아르테미스의 호위 기사?”

“그건 나거든?”

“그래, 우리 둘 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하자고.”

에드먼드가 대충 케인의 손을 맞잡고 악수를 마무리했다.

같은 신원을 얻어 쓴 두 사람의 통성명이 의미 없이 끝나고.

“가자.”

모든 준비를 끝마친 레온이 방을 나섰다.

급한 상황에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우와.”

떡 벌어진 케인의 입을 보며 에드먼드가 그를 비웃었다.

케인이 눈에 불을 켜고 그를 노려봤다.

“데로니스군 옷을 입고 있으면 행동거지에 신경 쓰는 게 좋지 않겠어?”

“당연합니다! 연회장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을 테니 허튼짓을 벌일 거라면 관두는 게 좋을 겁니다!”

“허튼짓이라면 뭐, 이런 거?”

에드먼드가 짓궂게 케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케인의 얼굴이 머리칼만큼이나 시뻘겋게 변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레온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거라면 효과가 확실했다.

“케인, 브라운을 발견하면 그 즉시 크라운 캐슬을 빠져나가.”

레온이 케인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장난 뒤에 감정을 숨겼지만 케인도 내내 브라운이 걱정되던 차였다.

“그럴게요. 제 역할은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래, 내 걱정은 마. 죽지는 않을 테니까.”

“예?”

“어서 가.”

어떻게 살아남을지는 걱정하지 않는다.

레온이 제 심장께에 아직 남아 있는 흉터를 매만지다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왕비와 귀족들이 모여 있을, 사건의 발생지였던 크라운 캐슬의 연회장이었다.

“지금부턴 너 혼자 해야 해, 아르테미스.”

귀족 부인과 그의 여식들을 제외하고 호위 기사나 가신은 아성 내에 진입할 수 없었다.

보통 왕의 집무실이나 연회장 등 주요한 시설은 모두 아성 내에 위치했는데, 수로 타워의 제어 시설물 역시 그곳에 있었다.

아성에 출입할 수 있는 건 왕비의 연회에 초청받은 귀족들뿐.

“잊지 마. 반드시 왕의 침실로 가야 해. 발코니로 나가 바로 밑층으로 뛰어내려.”

그곳에 지하 비밀 공간으로 가는 입구가 있었다.

가는 동안 어떤 고난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해보지도 않고 포기할 순 없는 노릇.

“내가 거기 있을게.”

연회장까지 동행할 수는 없지만, 바깥을 이용해 접근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반란군은 오래도록 크라운 캐슬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성벽의 비밀 통로 따위는 이 성의 주인보다 잘 알고 있으리란 자신감이 있었다.

“세 번째 종이 울리는 순간까지 기다릴게. 만일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너 혼자 가. 가서 수로를 반드시 무너뜨려.”

에드먼드가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약속한 지점은 거기까지였다. 누구 하나 그곳까지 다다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갈게.”

레온이 묵직한 드레스를 붙잡았다. 작은 보석이 알알이 박힌 반짝이는 체인으로 얼굴을 가리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드먼드가 레온을 불러 세웠다.

“아르테미스.”

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중요한 말이 남아 있나 그를 바라보자 에드먼드가 빠르게 다가와 목 근처 가까이 고개를 내렸다.

“너 정말 아름답다.”

귓가에 닿은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한참이나 맴돌았다.

레온이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키지 않게 조심해.”

“…뭘?”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이라면 어디서나 눈에 띌 테니까.”

에드먼드가 활짝 미소 짓고 얼어붙은 레온에게서 발길을 돌렸다.

아무 일도 없던 척 휘휘 손을 흔들어대는 꼴에 레온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저 자식,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해댄다니까!’

가뜩이나 집중해야 할 판에 속을 왜 저렇게 뒤집어 놓는지 모르겠다.

레온이 쓸데없는 감정을 버려두고 연회장 출입구로 다가갔다.

그곳을 지키던 데로니스군이 검과 창을 고쳐 쥐고 다가오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폰네시에서 온 잭 후작의 여식 아르테미스 잭입니다.”

문 앞을 지키던 병사가 초대 명단을 확인하고 곧 고개 숙여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십시오.”

불과 삼 일 전 폭동이 일어났던 곳에 스스로 돌아오다니.

레온이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천천히 화려한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

“…….”

진한 남색 빛깔의 머리칼이 우아하게 허리 끝에서 찰랑였다.

얼굴은 가렸지만 그 안에 언뜻 보이는 고운 피부와 수려한 이목구비가 먼 곳에서도 눈에 띄었다.

겁에 질려 모여든 귀족가의 여인들이 숨을 참았다.

그간 이런 사교 모임에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으니 누군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저렇게 아름다운데 존재조차 몰랐다니.

몇몇 귀족 부인들이 곁에 서 있는 딸의 손을 잡고 제 등 뒤에 숨겼다.

그래, 다들 피하는 게 좋을걸?

‘나 오늘 여기 깽판 치러 왔거든.’

레온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데로니스를 무너뜨리기 위해 찾아온, 너무도 위험한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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