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17장. 운명Ⅱ(4)
운명적인 만남을 뒤로하고 얼마나 애타게 아르테미스를 마음에 품었는지 모른다.
사이먼이 고급 여관 꼭대기 층 침대에 누워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는 아직까지 아르테미스와 사랑에 빠진 사이란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버지께서 날 이곳에 부르셨으니, 분명 일이 잘 풀려가는 거야.”
뉴홉에서 그렇게 아르테미스를 떠나보낸 후 사이먼은 곧장 아버지인 휴고 우딘에게 서신을 썼다.
잭 후작가에 재미있는 변화가 생긴 것 같으니 부디 만나달라는 요청이었다.
‘아버지도 다시 날 불러들이려면 빌미가 필요하셨겠지.’
답신이 올 거라곤 기대도 안 했는데, 우딘 후작은 기다렸다는 듯 사이먼과 약속을 잡았다.
총 소집령이 있는 날, 바로 수도 덴버그에서 만나자는 명이었다.
“만에 하나 아버지가 폰네시의 주인이 된다면?”
덴버그에 속속들이 모여든 귀족들이 노리는 건 단 하나, 바로 대영지 폰네시의 주인이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인 휴고 우딘이라고 그 일을 바라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딘 가문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옛적부터 그 땅을 통치한 역사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저 폰네시에 살았을 뿐이지. 몬데이어 공작가를 위해서 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어쩌면 폰네시의 영주 가문을 가장 시기 질투한 게 두 후작 가문일지도 모른다.
그 땅의 원래 주인이지만 목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숨어 살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린 총 소집령에 빨리 응했잖아? 새 왕의 마음이 풀어졌을지도 몰라.”
정당성이나 전통성이나 모두를 따져 봐도 폰네시의 새 주인 자리는 우딘 가문이 제격이었다.
사이먼은 벌써부터 폰네시를 손에 넣은 듯 입꼬리를 올려 실실 웃고 있었다.
“잭 후작가가 수상한 짓을 하는 모양이니, 이참에 그놈들 뒤를 캐보는 거야.”
달로스로 향했을 테니 추적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꼬투리 잡힐 만한 짓을 하고 있는 거라면, 그걸 빌미로 잭 가문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가문이 폰네시의 유일한 주인이 되겠지?”
물론 아르테미스만큼은 구제해야 할 것이다.
“오래도록 나 한 사람만을 기다려 주었으니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러주겠어.”
폰네시, 그 석벽의 성에서 식을 올린다면 아르테미스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미소가 드리워질 것이다.
사이먼이 잊히지 않는 아르테미스, 아니 레온의 얼굴을 떠올리며 침대 위를 팡팡 굴러다녔다.
정말이지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제 곧 내 아내가 되겠지만…. 정말 보고 싶군.”
참을 수 없다. 사이먼은 설렘으로 가슴 어딘가가 간지럽게 들끓는 것을 느꼈다.
“음?”
그나저나 조금 전부터 바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상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와 새가 지저귀는 소음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제 생각에 골몰하는 게 유일한 취미였기에, 사이먼은 그 누구보다 주변의 모든 것에 예민했다.
사이먼이 몸을 일으켰다.
헤실거리던 웃음을 지우고 창가 가까이로 다가서니 과연 주변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뭔가 수상한데.’
의심은 곧 확신으로 뒤바뀌었다. 사이먼이 눈동자만 굴려 근방 골목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통제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인위적인 고요가 주변을 뒤덮었다.
‘병사들인가? 평상복을 입었지만 울룩불룩 튀어나온 무기는 숨길 수 없겠지.’
겉모습만 꾸며댄다고 본 목적을 숨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이먼은 창문 아래 이곳을 슬슬 에워싸고 있는 여럿의 인기척을 확인했다.
그들의 목표는 이 여관이었다. 그리고 사이먼은 그들이 노리고 있는 인물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지? 아버지께서 보낸 자들은 아닐 텐데.’
명맥만 유지하는 후작가에 이만한 병력이 있을 리 없었다.
사이먼은 크라운 캐슬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아버지 휴고 우딘이 붙잡혔다는 것도, 그들이 추방당한 둘째 아들인 자신의 뒤를 캐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젠장.”
수신호를 주고받는 게 눈에 띄었다. 그들은 망상증 환자를 노리는 데 크게 공들이지 않았다.
수많은 병력을 끌고 온 것만으로 사이먼을 쉽게 잡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 것이다.
‘그냥 당하고만은 있을 수 없지!’
사이먼이 재빨리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곤 놈들이 여관 안으로 진입하는 타이밍에 맞춰 창문 밖으로 나섰다.
여관 꼭대기에 방을 구한 건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고자 함이었다.
아버지가 좋은 뜻으로만 불러들였다 기대하기엔 추방당한 몸으로써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항상 최악에 대비해야 한다. 사이먼은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사이먼이 곧장 지붕을 타고 여관 꼭대기로 기어올랐다.
발아래에선 평상복을 입은 병사들이 들이닥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뛰어내려야 하나? 옆 건물은? 여기서 어떻게 가야 하지?
등 뒤로 땀이 삐질 흐르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아주 바빴다.
수만 가지의 가능성과 시끄러운 소리들로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심장이 펄떡거렸다.
“놈을 찾아라!”
“놓쳐선 안 돼!”
쾅, 문을 부수는 소리가 이어졌다. 짐을 뒤지고 방금 전까지 그곳에 머물렀던 침대를 헤집는 소리도 이어졌다.
사이먼이 어쩔 줄 몰라 지붕 위에서 꼼짝도 못 할 때였다.
“이보시오!”
“아잇! 깜짝이야!”
그들 틈에 뒤섞여 있던 누군가가 재빠르게 지붕 위에 올라와 사이먼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망칠 테니 어서 나를 붙잡으시오!”
“뭐, 뭐라고? 당신이 누군 줄 알고 따라가?”
“시간 없어! 어서!”
두 눈이 휘둥그레진 사이먼이 그 손을 잠시간 바라봤다.
이제 발밑에선 창문이 삐거덕거리며 시끄럽게 열리고 있었다.
잡지 않으면 붙잡힐 것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이먼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눈 깜짝할 새 하늘을 날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추락이었다.
***
그 시각.
덴버그 내 킹덤힐.
크라운 캐슬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서 워렌은 몸을 숨긴 채 그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문 근방을 정돈하고 있어.’
크라운 캐슬로 향하기 위해선 광장 주변 오르막길을 한참이나 올라야 했다.
그 오르막을 따라 백성들은 가판을 깔고 물건을 팔기도 했으며, 왕가와 관련된 여러 정보를 나누기도 했다.
상당한 인파를 지나고 한참을 올라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곳이 바로 크라운 캐슬이었다.
한데 조금 전부터 주변이 통제되는가 싶더니, 그곳을 채우고 있던 인파가 모두 사라졌다.
데로니스군이 의도적으로 주변을 비우고 삼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처형장을 준비하는 거야.’
성 정문 앞엔 한눈에 보기에도 살벌한 처형대가 바로 세워졌다.
반란군의 예측대로 하일 데로니스는 귀족들 중 이번 사건의 주동자를 만들어냈다.
처형이 앞당겨지면 크라운 캐슬에 진입하기도 쉬워질 터.
안에서 작전을 준비 중인 레온을 위해서라도 반란군의 도움이 절실했다.
워렌이 곧장 뒤돌아 그들이 머무는 임시 기지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며칠간 머물렀다고 이제 덴버그의 숨은 길도 전부 눈에 익었다.
‘다들 어디 있지?’
금세 기지에 도착한 워렌이 주변을 살폈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반란군이 보이지 않았다.
워렌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발소릴 숨기고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상가 창고로 들어설 때였다.
“잭 후작가의 사람들이 가짜 같다고?”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워렌이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빛이 새어나오는 문 뒤에 몸을 숨겼다.
“나는 잭 후작가와 오래 전부터 인연이 깊은 우딘 가문의 차남이오! 그들 중 아티쿠스란 녀석과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몸이지!”
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께름칙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워렌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도 뉴홉에서 마주쳤던 우딘가의 미친 녀석일 것이다.
“그놈이 이상하단 건 진작 눈치챘지. 우리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니까!”
사이먼이 가벼운 주둥일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뉴홉에서 만난 이야기와 그들이 달로스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던 점,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제 정혼녀임을 떠들어대는 소리였다.
“대체 나를 구해놓고 왜 이렇게 감금시키는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가진 가장 비싼 정보를 알려 주었으니 이만 살려주시오. 어? 아버지를 만나게만 해준다면 내가 폰네시 궁성의 한편을 내어 드리리다!”
반란군 병사들의 표정이 숨길 수도 없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입만 열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 통에 놈과 제대로 된 대화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 소리를 떠들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봐.”
그때 사이먼 앞에 마주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던 반란군이 손을 들었다.
짙은 수염으로 얼굴을 모두 가린 그가 굳은살 박인 손으로 사이먼의 주둥아리를 틀어막았다.
“너, 이 사실을 또 누구에게 말했지?”
사이먼의 광기 어린 눈동자에 잠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반란군이 거세게 놈의 턱을 움켜쥐었다.
“머리 굴릴 생각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해. 또 누구에게 이 이야길 나불거렸냐고.”
턱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영영 아르테미스에게 사랑을 속삭이기는커녕 침조차 못 넘길 미래를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섰다.
사이먼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인 휴고 우딘에게 비슷한 뉘앙스를 담은 서신을 보내긴 했지만, 지금 한 이야기는 처음 꺼내보는 것이었다.
“정말이야?”
“그, 그렇소.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니까?”
“그것참, 다행이군. 다른 놈에게도 허튼소리를 했다면 당장에라도 목을 그어버렸을 텐데.”
꿀꺽.
사이먼이 등 뒤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에 눈도 깜빡하지 못하며 반란군의 미소를 마주 보았다.
“앞으로도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숨어서 대화를 듣고 있던 워렌이 의문스럽게 눈썹을 모았다.
모든 정보를 귀하게 다루는 반란군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가볍게 넘길 리 없었다.
게다가 입단속을 시키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다. 어째서?
“뭐야… 이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는?”
사이먼이 겁을 상실한 채 놈들의 여유로움에 의문을 표했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놈들이 수상했다.
“알고 있었어?! 잭 가문이 가짜인지?”
만에 하나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이미 전했다면 제가 나설 자리를 잃고 만다.
사이먼이 광분하려는 찰나,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반란군 병사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머무는 임시 기지의 쪽문을 향해서였다.
“그래, 알고 있었지.”
반란군 병사가 손을 뻗었다. 워렌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덜컥, 문이 열리며 반란군 병사가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워렌에게 똑바로 말했다.
“우린 이분들을 지켜야 하거든.”
루시오 몬데이어를 위해서라도.
“다시 인사를 나누어야겠지요, 워렌 경?”
그가 손을 내밀며 활짝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