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17장. 운명Ⅱ(5)
“처음부터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함부로 주둥이를 나불거린 형벌은 가볍지 않았다.
반란군 병사들은 사이먼의 입을 틀어막고 묵직한 천까지 뒤집어씌워 주방 한쪽에 놈을 처박아 두었다.
“아티쿠스 잭 역시 우리 반란군의 일원이오.”
예상치 못한 정보였다. 아티쿠스 잭이 반란군의 일원이었다니.
“…하면 아르히 잭은? 후작 역시 반란군의 일원입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그때부터 일이 좀 틀어지기 시작했지요.”
아티쿠스는 어려서부터 우딘 가문에서 자랐다.
우딘 후작을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형제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덕에 반란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참, 우딘 가문 역시 우리 반란군과 뜻을 함께하고 있소.”
휴고 우딘은 가문의 힘을 스스로 되찾고 싶어 했다.
다만, 의미 없는 분란을 일으키거나 약한 가문을 짓밟아 덩치를 불리는 치사한 수법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는 보기 드물게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지.”
선대 어른들이 폰네시에 남기를 선택한 건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하나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일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권리만 누리는 것은 도둑질이나 다름없다.
폰네시에 머물며 생산성 없이 삶을 소모하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늘 루시오 공작에게 힘을 보태며 살아온 것이지요.”
폰네시에 머무르는 한 최선을 다해 제 몫을 해내길 바랐고, 루시오와 함께 가이아 왕조의 복위를 도왔다.
세력이 폰네시에만 집중되길 원치 않는 루시오의 뜻을 존중해 왕가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지난 한평생을 모두 바쳤다.
그런 집안에서 형제들과 어울려 살았으니, 아티쿠스가 영향을 받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르히 잭은 전혀 모르는 것 같던데.”
“그럴 수밖에. 반란군과 관련된 모든 사실은 세상 밖에 알려져선 안 되는 비밀이었고, 아티쿠스 역시 입이 무거운 편이었거든.”
다만, 애지중지 막내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눈에는 작은 변화라도 이상한 법이었다.
“그 후로 잭 후작이 아티쿠스를 집에 불러들이고 감금했다오. 우리도 못 본 지 삼 년은 됐지.”
“끔찍한 소리로군.”
워렌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생판 모르는 어린아이를 납치해 아들 대신 훈련병으로 세울 때부터 알아본 집착이었다.
해도 해도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딘 후작이 일을 그르친 것도 당연한 일이지.”
그는 병력의 결집을 지연시키기 위해 내문을 잠그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었다.
다만 잭 후작가의 일원으로 신분을 숨긴 레온과 일행들이 나타나며 계획은 엉망이 되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더니, 그게 레온 공자님일 줄이야.”
이와 관련된 사실을 알아차린 건 모든 상황이 마무리된 후였다.
아르테미스라 불리는 여인이 루시오의 머리를 되찾기 위해 나타나고, 또 그 뒤를 찾은 워렌이 제 이름을 아티쿠스로 밝히면서 말이다.
“다 알면서도 공자님을 크라운 캐슬에 보낸 겁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겠소? 그분의 도움 없인 진입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왕비의 연회가 아니었다면 성문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워렌이 밀려오는 두통에 질끈 두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에드먼드의 실력은?”
“느낀 바대로 우리 중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자, 그럼 이제 우린 좀 서두르는 게 좋겠소.”
이미 처형장이 설치되었다는 소식은 워렌에게 전해들은 지 오래였다.
반란군 병사들이 잠시간 내려두었던, 잘 손질된 무기를 집어 들고 밖을 살폈다.
“우딘 후작을 구해야겠소. 우리와 함께하시겠소?”
레온이 무사히 빠져나오기 위해선 작은 소란이 필요할 것이다.
워렌이 상처 깊은 그 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워렌이 다이아 스틸로 만든 묵직한 검을 들었다.
목적지는 크라운 캐슬이었다.
***
“헤리스 타린은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마다비아의 해안 동굴 내 반란군 거점.
피타가 숱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헤리스의 앞을 막아섰다. 반란군 대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함께 죽길 바라는가?”
그들의 적의감이 이젠 피타에게로 옮겨갔다.
적을 감싸는 일을 눈감아줄 만큼 상황이 좋지 못했다.
“이자는 루시오 공작을 배반하고 그 등에 검을 내리꽂은 놈이다.”
가장 큰 구심점을 잃은 반란군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뜻을 함께하는 가장 큰 별이 지고 말았으니, 헤리스 타린의 목을 산 채로 잡아 뜯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정도란 말이다.
“나는 길라의 후계자 피타 크루네입니다.”
“…뭐라고?”
반란군에게 제압당한 헤리스의 두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데칸은 그 뒤에서 한숨을 푹, 내쉬고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애써 숨겼더니만 스스로 정체를 드러낼 줄이야.
“함께 죽겠단 말을 그런 식으로 하는 건가? 길라가 가장 먼저 데로니스 놈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건 네놈이 가장 잘 알 텐데.”
예상치 못한 정보였으나 그게 검을 거둘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진 못했다.
반란군 대장이 한 발자국 가까이 피타에게 다가갔다.
“오해입니다.”
“오해?”
“우리 길라는 폰네시의 후계자, 레온 몬데이어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믿지도 못할 개소리를 지껄여댄다. 길라 영주가 수많은 병력을 이끌고 덴버그로 향한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자리를 비워 폰네시 포로들이 모두 죽어버린 걸 네가 모른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살자가 나타났으나 평소 길라의 병력이 온전했다면 그처럼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피타가 도리어 반란군 대장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까딱 숨만 잘못 쉬어도 목에 날이 맞닿을 정도였다.
“적에게 접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적의 편이 되는 법이니까.”
“…뭐?”
“지금은 검과 적기를 들 타이밍이 아니란 뜻입니다.”
월랜드의 군주가 길 문을 열어준 이상 데로니스 세력의 진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뒤편에서 길라가 치고 맞서 싸운다 하더라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병력은 우세했다.
“가장 빠른 복수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오래도록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상해 왔기에 내릴 수 있는 결단이었다.
길라의 영주 막심 크루네는 데로니스 병력이 폰네시를 무너뜨리는 것을 보며 곧장 왕을 향해 서신을 보냈다.
“우리 가문은 길라 영지를 포기했습니다.”
“뭐라고?”
“…하일 데로니스에게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크루네 가문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행동했는지는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폰네시 땅을 되찾기 위해서.”
서대륙 내의 가장 중요한 거점을 하일 데로니스에게 바친 건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피타의 눈동자엔 아버지의 신의를 증명할 뜨거움이 일렁이고 있었다.
반란군 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길라의 영주가 영지를 포기했다니. 그 땅을 포기하고 폐허가 된 폰네시를 얻기 위해 움직일 거라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크루네는 항상 올바른 것을 향해 전부를 겁니다. 난 그런 아버지의 뜻을 평생 배워왔고.”
피타가 손을 뻗어 반란군 대장의 검을 움켜쥐었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피가 뚝뚝, 젖은 동굴 바닥에 한 방울씩 고이기 시작했다.
“나와 헤리스 타린은 레온 몬데이어를 위해 뜻을 함께합니다.”
오직 레온을 위해.
폰네시를 잃은 그 아이에게 다시 전부를 되찾아주기 위해.
“하니 내 목숨을 걸고 헤리스 타린의 결백을 증명하겠습니다.”
발치에 고인 피는 점차 덩치를 부풀리고 있었다.
“만일 의심되는 행동을 한다면 그때는 기꺼이 내 목을 내어드리지.”
결국 한참이나 피를 보고서야 반란군 대장이 검을 거두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은 거짓으로 꾸며낸 게 아니었다.
길라의 뜻을 전해들은 이상 이대로 헤리스 타린의 목을 취하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이놈!”
헤리스를 향한 검이 모두 거두어졌다.
데칸이 빠르게 통나무에게 달려가 놈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검을 내놔! 네놈이 뭐라고 이걸 갖고 있어?”
몬데이어 공작가의 검이다.
데칸이 한 번 더 통나무의 얼빠진 뺨을 쳐대고 헤리스에게 돌아왔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검을 내미니 헤리스가 무거운 손짓으로 제 것을 되찾아 들었다.
“이게 무슨 난린지.”
데칸이 두 사람을 살폈다.
피타는 이제 피 묻은 손으로 헤리스를 부축하고 있었다.
성치 않은 다리로 오래도록 꿇어앉아 있었으니 아마 걷기가 힘들 것이다.
“충직한 부하를 두었군.”
난리 통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졌다.
반란군 대장이 주변을 메웠던 병사들을 물리고 턱을 매만졌다.
“상하 관계 같은 게 아니거든요, 우리는.”
속도 없는지 피타가 미소 지으며 반란군 대장에게 대꾸했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큰 비밀을 털어놓았는지 모르겠다.
헤리스가 저를 부축하는 피타의 귓바퀴를 꼬집었다. 마주하는 눈길엔 장난스러움이 그득했다.
“아주 말하고 싶어 죽겠는 것처럼 줄줄 쏟아내던데.”
“어쩔 수 없잖아요. 경이 죽는다면 레온을 만나도 제 면이 안 선다고요.”
이제 피타는 완전히 헤리스를 믿고 있었다.
여정을 함께하는 동안 그가 폰네시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또 루시오를 지키지 못해 얼마나 자책하는지 그 모습을 모두 지켜봤다.
그건 꾸밀 수 없는 진짜였다. 같은 마음을 가진 피타는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어쩔 거요? 레온인지 뭔지 공자가 덴버그에 있다는데.”
데칸도 눈치껏 빈 헤리스의 어깨에 파고들었다.
그러고 보니 레온이 그곳에 있다. 그간 행방을 찾지 못해 애쓰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레온의 위치를 파악한 겁니까?”
피타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반란군 대장에게 물었다.
그가 답을 아끼지 않고 모두 설명해 주었다.
“사이먼 우딘이라는 자 곁에 우리 반란군이 붙어 있었지. 우딘 가문도 우리와 뜻을 함께하거든.”
입이 가벼운 편이고 정신이 온전치 않은 놈이니, 혹시라도 반란군과 관련된 이야기가 새어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럴 것을 대비해 놈의 곁에 사람을 붙여둔 게 다행인 일이었다.
사이먼이 서신을 통해 잭 가문을 운운했고, 잭 아티쿠스의 정체를 알고 있는 반란군은 거기서 힌트를 얻어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레, 레온이 여장을 했단 말입니까?”
“오호, 우리 서대륙에서 제일가는 외모라더니. 그 얼굴로 여장한 모습이 제법 궁금하군.”
“지금 그게 중요해요? 데칸, 닥치세요!”
“뭐라고? 이 꼬맹이가 오냐오냐했더니!”
헤리스가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반란군 대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공자님의 곁에 일행들이 전부 함께하고 있소?”
“오히려 늘었다면 모를까, 내가 알고 있는 이들은 모두 함께지.”
그렇다는 건 워렌이 레온의 곁에 남아 있다는 소리였다.
“이제 어쩌겠나, 헤리스 타린? 덴버그로 가는 길은 꽉 막혔는데.”
그 물음에 티격태격하던 피타와 데칸도 헤리스를 살폈다.
슐츠는 애초에 레온을 찾기 위한 목적지였다.
공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으니, 굳이 그곳까지 갈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내 얼굴은 너무도 알려졌어.”
루시오의 등에 검을 내리꽂았단 죄명까지 뒤집어썼으니, 지금 당장 레온의 곁으로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찾아가면, 반드시 들킨다.
“몰랐다면 모를까, 그분을 찾아냈으니 우리가 안전하게 보호해 이곳으로 모셔오지.”
반란군 대장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당분간 이곳에 있어도 좋아.”
헤리스가 내밀어진 그 손을 한참 바라봤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오해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켜켜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레온 몬데이어 앞에서 그런 미약한 감정은 불필요한 것들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
헤리스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손 사이로 레온을 지키겠다는 모두의 의지가 분명히 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