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17장. 운명Ⅱ(6)
왕비의 연회는 재밌지 않았다.
적어도 드레스 사이에 파묻혀 눈동잘 숨기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레온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내가 알기로 잭 후작가의 영애들께선 이미 출가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위로 셋 있는 언니들은 그렇습니다.”
“그럼 하나 남은 막내따님이란 말인가요? 후작께서 무척이나 아끼시겠군요.”
“듣자 하니 몸이 좀 좋지 않으셨다고.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셨나요? 힘겹진 않으시고요?”
게다가 모든 여인들이 이것저것 물어대는 탓에 레온은 적의를 삼켜야만 했다.
아주 쓸데없는 이야기나 주고받는 통에 점점 표정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나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레온은 모르겠지만 오늘 연회는 중요한 자리였다.
새 왕가에 호의적인 귀족 부인들은 벌써 몇 달 전부터 오늘만을 기다려온 이들도 있었다.
“한데 어찌 후작 부인도 없이 혼자 왔단 말입니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후작 부인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신 모양이지요?”
“소식은 들었죠. 여섯이던가, 일곱이던가?”
“그렇게 많으니 맞지 않는 분도 있는 게 당연합니다. 괜찮아요.”
아름다운 딸들을 뒤에 숨긴 귀족 부인들이 이제는 신이 나서 레온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물론 사실도 아닌 데다 아르히 잭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레온도 반기는 입장이었기에 전혀 타격은 없었다.
“소중한 분이니 두고 온 것이겠죠. 어쩌면 오늘 내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르잖아요?”
레온이 생긋 웃으며 조곤조곤 상냥한 말투로 답했다.
며칠 전 일어났던 문제를 애써 없는 취급하던 귀족들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잖아도 아직 풀려나지 못한 귀족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평생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곤욕 한번 치러보지 않은 이들이기에 아직 왕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을 것이다.
언제 또다시 이 바닥에서 울고불고 기어 다닐지 모른다는 의심과 분노가 뒤섞여서 말이다.
“전 그럼 이만.”
레온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다. 아닌 척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여전히 제게 달라붙어 있는 게 느껴졌다.
‘기회를 봐서 나가야 하는데.’
이런 식이라면 자리를 비우는 횟수마저 확인당할 지경이었다.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이곳을 빠져나가 왕이 숨겨놓은 비밀 통로로 가야 하는 입장에선 매우 불필요한 관심이었다.
‘그래도 지켜보는 감시 인원이 많지는 않아.’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면 모를까, 연회장 분위기는 지난날을 만회하려는 듯 제법 풀려 있었다.
왕비의 곁을 지키는 기사들을 제외하고 무장한 병사는 그 수가 지난번과 비교해 현저히 적었다.
게다가 모든 출입문을 폐쇄했던 것과 달리 오늘 연회장의 문은 모두 개방되어 있었다.
왕의 침실로 갈 수 있는 왕비의 정원 쪽 입구도 다행히 열려 있었다.
“레이디? 여왕 폐하께서 뵙자 하십니다.”
그때 잘 차려입은 왕비의 시녀가 레온에게 다가왔다.
오해했다고 생각할 수도 없게 이름을 제대로 불러대는 통에 레온은 어느새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시선이 날아들었다. 그 앞을 차지하고 있던 부인들을 제치고 레온이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던 왕비의 앞으로 향했다.
왕비는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누구 하나 속삭이는 목소리도 없이 레온이 왕비에게 인사를 올리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왕비 폐하를 뵙습니다.”
레온이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숙이자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반짝이는 체인이 작은 소리를 내며 빛을 반사시켰다.
왕비가 유심히 그런 레온을 바라보았다.
체격이 좀 왜소한가 싶지만 곧은 자태와 부드러운 피부가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얼핏 보이는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보는 눈을 즐겁게 만들 만큼 빼어났다.
“잭 가문의 여식이라고?”
“그렇습니다.”
“폰네시의 옛 영주 가문이로군. 그 땅에 대해 잘 알고 있겠구나.”
“…나고 자란 곳이니 모를 수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이런 이야기를 하자고 불러들인 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이런 쪽으로 눈치가 없는 레온이라지만, 연회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드러난 감정들은 모두 엇비슷한 느낌이었다.
왕비가 가문을 운운하며 미묘하게 찌푸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흠… 올해 네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겉으로 보기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지만 확인은 반드시 필요했다.
‘아르테미스의 나이?’
서른이 훌쩍 넘었다는 건 확실했지만, 올해로 정확히 몇 살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레온이 아티쿠스의 나이까지 곱씹어보며 속으로 셈을 할 때였다.
“그게….”
“나이는 알아서 무얼 하시게요.”
단번에 모든 시선을 사로잡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있었다.
당당한 걸음걸이에 이 자리에 위치한 그 누구도 중요해 보이지 않는 거만한 눈빛.
왕비의 표정이 밝아진 것까지 조합해보니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펠릭스 데로니스.’
하일 데로니스의 유일한 자식이자 새 왕가의 후계자인 펠릭스 왕세자였다.
“어차피 중요한 가문도 아닌데 질문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가 레온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왕비의 곁을 차지했다.
헝클어진 머리칼이나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옷차림이 누가 봐도 오기 싫은 곳에 끌려나온 꼴이었다.
왕비가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직 앞에 있는 레온에게 명했다.
“…이만 돌아가도 좋다.”
“예, 왕비 폐하.”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코앞까지 다가온 왕세자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레온이 인사를 마치고 곁에 서 있는 펠릭스에게도 예의를 차리기 위해 드레스를 정돈할 때였다.
“……!”
그를 마주하자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레온이 그대로 두 눈을 감고 휘청거렸다.
“어머….”
“이를 어쩌죠?”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누구도 레온을 붙잡아주지 않았다.
몸을 지켜줄 호위 기사도, 손발을 대신해줄 가신도 하나 없는 상황에서 눈엣가시를 챙겨줄 이는 이곳에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봐.”
펠릭스가 그런 레온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웅성거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레온은 심장을 쥐어짜는 고통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이제 숨까지 부족했다. 목 끝 가까운 곳까지 치미는 두려움에 레온이 덜덜 떠는 순간이었다.
“괜찮나?”
펠릭스가 손을 뻗어 주저앉은 레온을 일으켰다. 하지만 레온의 귓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이렇게 폭주하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존재감을 드러냈다.
괜찮지 않다. 아마 괜찮지 못할 것이다.
놈과 맞닿는 순간 온몸에 남아 있던 기운이 역류하는 것처럼 폭발적으로 레온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
“…으윽!”
더는 버틸 수 없다. 참아지지도 않았지만 이 이상은 한계였다.
정신을 앗아가는 지독한 고통에 레온이 그대로 펠릭스의 가슴팍에 고꾸라졌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거부할 수 없는 익숙한 기운.
‘…라피스!’
이 강력한 힘은 분명, 라피스의 기운이었다.
***
깜깜한 바닷속에 한참이나 빨려 들어간 듯 착각이 일었다.
레온은 아직까지 느껴지는 생경한 고통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가리던 화려한 장식은 푹신한 소파 옆 어딘가에 잘 놓여 있었다.
‘…쓰러진 건가.’
몸 안에 남아 있는 라피스보다 강한 기운을 마주했다.
가장 강력한 상태, 마치 갓 태어난 인어의 영혼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역시 라피스를 가지고 있었어.’
데로니스 놈들이 검은 사냥개들과 연관이 있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왕세자 놈에게서 그 기운을 읽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역시 그들의 힘은 라피스였다.
반만년 역사가 깊은 가이아 왕조를 무너뜨리고 금세 반역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천 역시 라피스였던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긴 어디고.’
울렁거리는 파도 위에 있는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레온이 천천히 숨을 몰아쉬고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먼발치에서 웅웅거렸다.
연회장과 멀지 않은 곳에서 레온은 벌써 두 시간째 쓰러져 있었다.
‘…왕비의 정원?’
주변을 모두 비추는 맑은 거울이 천장을 뒤덮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무성한 풀과 꽃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유리벽은 이곳이 왕비의 정원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레온이 어지러움을 꾹 참고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나가자 푹신한 풀이 밟혔다.
매일같이 왕비가 공들여 살핀다는, 세계 각국의 귀한 식물이 주변을 모두 채우고 있었다.
‘여기가 정원이라면… 이건 기회잖아?’
레온이 정원 너머 견고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문을 바라봤다.
저곳에 왕의 침실이 있다. 그 아래층엔 크라운 캐슬의 모든 곳과 연결된 비밀 통로가 마련돼 있었다.
레온의 목적지도 그곳이었다.
‘누구 보는 눈이….’
레온이 발길을 옮기기 위해 주변을 살필 때였다.
“깨어났군.”
정원 한쪽, 높은 나무 위에서 줄곧 레온을 지켜보던 왕세자 펠릭스가 훌쩍 뛰어내렸다.
레온이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을 가려주던 장식은 챙겨 들지 못했다.
펠릭스가 그런 레온을 보며 입가를 뒤틀어 비웃었다.
“관심을 받고 싶어 기절까지 연기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야?
하지만 반박할 필요 없다.
“내가 눈치 못 챌 줄 알았나?”
오늘 연회에서 왕비가 마음에 드는 영애들을 점찍으려 했다는 사실은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언젠가 이 왕가를 이어받을 왕세자의 짝을 찾기 위해 무능한 귀족 여인들을 불러들인 사실도 전부.
“근데 너무 노골적으로 들이대면 재미가 없는 법이거든.”
펠릭스가 손을 뻗어 레온의 가냘픈 턱을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레온은 여전히 그의 시선을 피해 연회장 주변을 살폈다.
연회가 무르익을수록 그곳을 지켜보는 눈길이 늘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지 모른다. 선택을 좀 해야겠는데.
“아름답게 생기긴 했지만 네 가문은 도움이 전혀 안 되거든.”
탐스러운 머리칼과 조화로운 이목구비는 펠릭스의 마음에도 제법 드는 편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가문이다.
무능하고 별 볼 일 없는 잭 후작 가문은 이 왕국을 유지하는 데 전혀 필요치 않았다.
“그래도 노력이 가상하니 어울려줄까?”
여전히 비웃음을 담은 채 펠릭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이제 레온은 그의 팔에 붙잡혀 안기다시피 몸을 기댄 상태였다.
왜 자꾸 미친놈이 꼬이는지 모르겠지만, 레온은 그를 바라봤다.
이처럼 가까운 곳이라면 푸른 눈동자 따위는 보이지도 않을 거다.
“개소리하지 마.”
“…뭐?”
레온이 온 힘을 다해 펠릭스를 밀어냈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맞닿을 거리에서 몇 발자국 밀려난 그가 상황을 눈치채고 인상을 찌푸렸다.
좀 놀아줄까 싶었더니.
이제 펠릭스는 웃지 않았다. 다만 조금 전보다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네가 감히 나를 밀어내?”
이런 취급은 익숙하지 않다.
아버지가 반역에 성공한 이후부터 줄곧 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만 해온 몸이었기에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다.
펠릭스가 거칠게 뺨을 내려치려 할 때였다.
레온이 곧장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펠릭스는 지금 제 품에 안겨 있는 게 누군지 잠시간 고민해야 했다.
“뭐 하는 짓이지?”
당황하긴 했지만 이제야 약자답게 행동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미소 지었다.
이런 도발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이렇게 놀자고?”
말보다 행동이 빠른 타입인 건가.
펠릭스의 서늘한 손길이 천천히 레온의 머리칼 사이로 스며들 때였다.
레온이 펠릭스를 꽉 끌어안고 목에서 잭 가문의 가보를 끊어냈다.
“아니.”
레온이 온 힘을 다해 붉은 단검으로 펠릭스의 등을 깊게 찌르고 속삭였다.
“이렇게 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