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106화 (106/133)

106화

18장. 처형식(1)

툭, 단검이 떨어졌다.

후작가의 가보를 끊어낸 게 무색하리만큼 돌아온 결과는 참혹했다.

“…지금, 무슨 짓이지?”

검은 펠릭스의 몸을 꿰뚫지 못했다. 무언가의 단단한 것에 가로막혀 바닥을 나뒹굴 뿐이었다.

놈은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할 시간까지는 없었다.

“…감히.”

상황을 모두 파악한 펠릭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가 품에 안긴 레온을 거칠게 밀어내고 뺨을 올려쳤다.

버티고 있을 수도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단숨에 바닥에 쓰러진 레온이 손을 뻗었다. 단검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네가 감히 나를 공격해?”

하나 그럴 수 없었다.

펠릭스가 검을 짓밟았다. 그러곤 곧장 걸음을 옮겨 쓰러진 레온의 목을 틀어쥐었다.

고개를 들고 펠릭스를 바라보자 그의 눈에서 일렁이는 분노가 모두 보였다.

금방이라도 숨통을 집어삼킬 듯 불거진 핏발이 그의 이마에서 펄떡거렸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지? 아니, 얼마 전 일은 모두 너희 가문이 일으킨 일이었나?”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는 가문의 여인이 이런 일을 꾸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크라운 캐슬에서 위협을 당하다니. 불과 삼 일 전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든 무리가 있었다.

감히 이 왕가에 반기를 든 무리가 이 서대륙에 남아 있단 소리였다. 주제넘게도.

“이건 반역이다.”

이 땅의 유일한 왕은 하일 데로니스고, 자신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하나뿐인 왕세자였다.

왕가의 피를 위협했으니 손을 잘못 놀린 것만으로도 충분한 반역이었다.

펠릭스가 격분하여 다시 한번 주저앉은 레온의 뺨을 내려쳤다.

레온은 맞은 곳보다 가슴 안이 더 뜨거워 울컥, 피 섞인 침을 내뱉어야만 했다.

“널 당장 끌고 가겠어. 감히 너 따위가 날 위협했으니 죽음으로 죗값을 받아내 주마!”

웃기지도 않는다. 죽음으로 죗값을 되받겠다니.

레온이 입가를 닦았다. 새하얀 손등 위를 붉게 물들인 자국을 보니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고작 위협 한 번 당했다고 엄살 부리지 마.”

그 위협 한 번에 전부를 빼앗긴 사람들이 있다.

단검이 아니라 수많은 검에 베여 죽어서도 죽지 못한 이가 있단 말이다.

“반역이라고 했어?”

이제 레온은 더 이상 눈을 내리깔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분노를 담은 푸른 눈으로 레온이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죄 없는 이들을 죽이고 반역을 저지른 건 바로 네놈들이 아니던가?”

반역 전쟁으로 전부를 잃은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태어난 게 죄인 아이들이었다.

그들의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모든 시간을 빼앗아버린 게 바로 데로니스 놈들이었다.

“그건 대의를 위한 일이었어!”

“변명하지 마. 그저 왕좌에 눈멀어 벌인 짓인 줄 모를 줄 알고?”

대의를 위한 소의 희생 따위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놈들이 가장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짓밟은 건 같은 인간들뿐이 아니다.

인어족은 열 몇밖에 남지 않았다. 그건 바다의 멸망이었다.

“네놈들이 대체 무슨 권리로!”

무엇 하나 빼앗기지 않은 놈의 징징거리는 헛소리 따위 더 이상 들어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레온이 두 손을 뻗어 녀석의 목을 틀어쥐었다. 펠릭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밀어낼 수가 없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강한 살기가 펠릭스의 온몸을 짓눌렀다.

“…컥!”

뜨겁다. 목에 닿은 레온의 손이 너무 뜨거워서 온몸이 불타버릴 것만 같았다.

펠릭스가 발버둥 쳤다. 뒤로 물러나기 위해 몇 번이고 풀 바닥 위에서 미끄러졌다.

“기다리고 있어.”

그러나 자비 따위는 없었다. 레온은 도망치는 펠릭스를 끝까지 쫓았다.

몸속에 흐르는 용의 피가 살기를 담고 분노를 토해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탈할 수 있는 피의 힘이었다.

“내 복수는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레온의 손아귀에서 발버둥 치던 펠릭스가 그 폭발적인 힘에 결국 기절했다.

꼼짝없이 쓰러진 펠릭스를 보며 레온이 치마를 걷어 올려 숨겨놓은 푸른 검을 꺼내 들었다.

“약해빠진 놈.”

***

인기척이 느껴졌다.

레온이 침착하게 복도 끝의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얼마의 차이로 그곳을 지나가는 데로니스군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서두르는 게 좋겠어.’

왕비의 정원과 이어진 문을 통해 왕가의 사저까지는 몰래 진입했지만 문제는 여기부터다.

이곳은 왕과 왕비의 침실이 위치한 곳이었다. 크라운 캐슬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

만일에 대비해 건물 그 자체로도 요새화되어 있는 만큼 이곳을 지키는 이들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옷이 크지는 않네.’

레온이 목을 갑갑하게 만드는 단추 몇 개를 뜯어냈다.

반대편 유리 창문에 비친 레온은 이제 다시 남자의 옷을 입고 있었다.

‘데로니스 놈들이 곧 펠릭스를 찾아낼 거야.’

그는 왕비의 정원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다.

레온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흐트러진 놈의 옷이 원래 제 옷인 듯 레온과 잘 어울렸다.

다만 긴 머리칼, 아르테미스의 긴 짙은 남색 머리칼은 왕세자의 옷과 어울리지 않았다.

“…….”

푸른 검을 들고 있는 손끝이 덜덜 떨렸다. 펠릭스는 레온의 손이 맞닿은 것만으로도 기절했다.

지독한 용의 살기를 터뜨린 여파는 레온의 몸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금 전부터 온몸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가슴이 들끓었을 뿐.

피가 몰려 있는 심장부터 분노가 차올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힘은 라피스도 이길 수 있구나.’

아니, 어쩌면 라피스를 지니고 있기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레온이 손을 들어 제 가슴께를 문질렀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운 상처가 계속해서 존재감을 내뿜었다.

“…어쩔 수 없지.”

레온이 겨우 푸른 검을 들었다.

그러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남색 머리칼을 투둑, 잘라냈다.

발치에 긴 머리칼이 흩어졌다. 이제 다시 아르테미스로는 돌아갈 수 없다.

드레스도 벗어 던진 마당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더는 시간이 없어.”

변복을 했어도 들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레온과 펠릭스는 그 체격부터 외모까지 닮은 게 하나도 없었다.

눈썰미 없는 병사 한둘 정도는 넘길 수 있다 쳐도 이곳에서 왕세자 행세를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지금부턴 내 힘을 믿어보는 수밖에.’

라피스를 지닌 몸과 그 안에 흐르는 용의 피가 있으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가자.”

레온이 푸른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짧게 심호흡하며 복도를 걸었다. 마주치는 놈들과는 이제 맞붙어 겨룰 생각이었다.

***

덴버그 내 반란군 임시 기지.

“이봐… 거기 아무도 없소?”

사이먼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그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두꺼운 천으로 시야를 차단당해 눈치채지 못했지만 조금 전부터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떠들거나 움직이는 소리, 하물며 숨을 내쉬는 기척조차 없었다.

“진짜 나만 두고 가버렸다고?”

이곳을 지킬 사람 한 명 놔두지 않을 정도로 긴박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대체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사이먼은 그들이 떠나기 전 나눈 대화를 엿들었다.

어쩐 일인지 아버지인 휴고 우딘이 왕의 눈 밖에 난 모양이었다.

총 소집령으로 서대륙의 온 귀족을 불러들인 이 자리에서 처형까지 당한다니.

‘아버지를 구하겠다고 했지?’

다행인 건 이곳에 모인 놈들이 휴고 우딘을 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이었다.

사이먼은 숨을 골랐다. 몸통을 꽉 조여 놓은 탓에 숨을 쉬어도 쉬어도 호흡이 모자랐다. 손끝도 좀 저린 것 같고.

‘날 여기 붙잡아둔 것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인가?’

실제로 붙잡히기 전 마주했던 상황은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모습을 숨겼으나 무장한 병사들이 모조리 제 거처를 급습하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실을 되새겨도 머릿속에 남는 정보는 그런 게 아니었다.

사이먼은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았다.

‘잭 후작가의 수상한 녀석들은 몬데이어 공작가 놈들이었어.’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을 엿듣게 됐다.

‘워렌이라고 했지?’

루시오 공작을 운운하며 떠들어댄 이름들은 사이먼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자는 루시오 몬데이어가 레온에게 처음으로 주었던 기사다.

‘늙은 여인은 유모였을 테고, 그 외에도 남자 두 명이 더 있었지.’

사이먼은 가문에서 추방당한 그 날부터 늘 폰네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가문으로 돌아갈 날을 항상 꿈꿨으므로 폰네시 궁성에 사는 사람보다 더욱 관심 있게 그들에게 집착해댔다.

‘아마 한 명은 부집사 놈일 테고.’

은백색 머리칼은 없었지만 아마 나머지 놈이 레온 몬데이어였을 것이다.

‘근데 어째서 나의 아르테미스와 함께 있던 거지?’

사이먼이 미간을 모았다.

아름다운 아르테미스가 왜 그들과 함께 있었는지 모르겠다.

“…설마!”

나의 아르테미스에게 반한 건가? 흑심이 있는 거야?

“이런 젠장!”

레온 그 자식이 아르테미스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노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원치 않는 여정에 함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사이먼은 팽팽 돌아가는 바쁜 머릿속을 정리할 새도 없이 바닥을 기었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놈들이 이곳에 있다. 아름다운 아르테미스도 이곳에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아르테미스의 외모는 누구라도 반할 천상의 외모였다.

레온 몬데이어가 그녀를 노리는 거라면 용서할 수 없으리라.

‘더 이상 후작가 따윈 필요 없어.’

아버지 역시 새 왕의 눈 밖에 나버렸다면 더는 도움이 되는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 이곳엔 이 서대륙에서 제일가는 권력을 쥔 인물이 있다.

“왕께 고하겠어. 이 모든 진실을!”

레온 몬데이어가 크라운 캐슬 내에 있고, 반란군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전하기만 하면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후작가의 후계자가 아니라 크라운 캐슬에서 한자리를 해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르테미스가 내 곁에 돌아오겠지! 멸문한 공작가의 후계자 따위보다 내가 더 멋질 테니까!”

모르면 몰랐을까 아르테미스의 아름다움을 엿본 이상 그녀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누가 와도 양보할 수 없다.

“넌 내 거야, 아르테미스!”

사이먼이 미친 사람처럼 웃어젖히며 바닥을 기어 제 얼굴을 가린 천을 벗겨냈다.

몇 번이고 바닥에 머리를 찧고 쓸어 피가 고일 정도였다.

“으, 으으으!”

아무에게도 줄 수 없다. 사이먼이 정신을 놓고 웃어대며 주변을 살폈다.

머리 위에서 피가 흘러 한쪽 시야가 엉망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칼… 칼은 어디 있지!”

사이먼에겐 이제 인생의 목표가 있었다.

레온 몬데이어에게 억지로 끌려간 자신의 정혼자를 구출해내는 것.

그 원대한 일을 끝마치기 위해 왕을 알현해야 하는 것.

“절대 포기하지 않겠어… 나의 아르테미스!”

사이먼이 눈앞의 도끼를 향해 돌진했다. 피를 본다 해도 상관없었다.

아르테미스만 가질 수 있다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