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18장. 처형식(2)
처형장이 마련됐다.
레온은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로 왕이 현재 킹덤힐 앞 광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놈이 자리를 비웠으니 한결 수월하겠어.’
하나 레온은 방심하지 않았다.
최대한 다수와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하며 한 사람, 한 사람씩 푸른 검으로 그들의 등 뒤를 노렸다.
검술과 힘에선 부족할지 몰라도 지니고 있는 무기가 압도적이었다.
다이아 스틸은 세상에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강철이다.
아무리 무장한 병사라 해도 일반인이 버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문제는… 나한테도 버겁다는 건데.’
레온이 손에 움켜쥔 푸른 검을 바라봤다. 푸른 검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용의 살기를 죄 붙잡아 검에 가두어 날이 몇 배 이상 무겁게 느껴졌다.
‘너무 뜨거워….’
게다가 쥐고 있을 수 없을 만큼 바짝 열이 오른 느낌이었다.
그만큼 용의 살기를 내뿜는 건 레온에게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이유는 모른다. 사실 이 피에 대한 이야기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다.
사실을 밝혀줄 루시오는 이미 죽어 반란군의 손에 있고,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 기사단장 헤리스 타린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래도 조금만 버티자. 이제 바로 앞이니까.’
레온이 뻐근한 심장을 다독이며 정면을 응시했다.
왕이 자리를 비운 덕인지 데로니스군의 경비는 그리 삼엄하지 않았다.
빈방을 지키는 것보다 지난번 습격에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게 그들에게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레온이 주변을 경계하며 서둘러 왕의 침실로 달려갔다.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왕세자의 신발은 이미 복도 어딘가에 나뒹굴고 있을 터였다.
‘여기다!’
매끈한 석재로 이루어진 문은 레온 혼자선 열 수도 없을 만큼 무겁고 거대했다.
하나 양옆에서 이 문을 열어줄 시종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레온이 온 힘을 다해 문을 열어젖혔다.
들인 공에 비해 초라하게 작은 빛 하나가 들어갈 만큼만 문이 열렸다.
레온이 재빨리 몸을 욱여넣었다.
닫힌 문 뒤에 몸을 기대고 숨을 몰아쉴 땐 얼굴이 온통 새빨개져 있었다.
‘역시 아무도 없어.’
왕이 자리를 비웠으니 누구라고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불손한 목적이 있는 레온은 예외였다.
‘저기인가?’
레온이 발코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을 나서면 그 아래 크라운 캐슬의 숨겨진 방과 연결된 출입구가 나오게 된다.
그곳은 지난 가이아 제국 시절 트레톨라 왕가가 만들어 놓은 왕의 대피처였다.
크라운 캐슬의 곳곳과 연결되는 비밀 통로이자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대체 여길 어떻게 알아낸 거지?’
고개를 쭉 빼 아래를 살폈다.
왕의 거처답게 외부에선 절대 쳐다볼 수도 없게 사방이 높은 성채로 꽁꽁 가려져 있었다.
반란군이 이곳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지금 고민할 건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내려가지?’
왕의 침실을 뒤지면 아래층 비밀 공간과 연결된 정식 출입구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게다가 수월하게 열리리란 보장도 없었다.
그렇다고 뛰어내리는 게 해답은 아니었다.
높은 천고를 자랑하는 캐슬답게 고작 한 층 아래였지만 아득한 높이였다. 무조건 다칠 수밖에 없는.
‘잘 생각해보자. 내가 해낼 수 있으니까 에드먼드가 이 일을 권유했을 거야.’
이제 곧 있으면 세 번째 종이 울린다.
정각마다 울리는 종은 에드먼드와 헤어진 뒤 이미 두 번이나 이곳 크라운 캐슬에 울려 퍼졌다.
‘그는 날 여자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마….’
워렌처럼 멋지게 뛰어내리는 방식을 기대했을 것 같진 않고, 케인처럼 능숙하게 벽을 타고 내려가는 걸 상상했을 것 같지도 않다.
레온이 불빛 따윈 닿지도 않는 발코니 가장 구석에 서서 한참이나 주변을 탐색했다.
그러자 외부 벽을 밝힐 때 걸어두는 횃불 거치대가 보였다.
‘이거라면 붙잡아볼 수도 있겠는데.’
문제는 그 거치대가 층과 층 사이, 그러니까 왕의 발코니와 아래층 비밀 공간 중간에 놓여 있다는 점이었다.
그곳에 손을 뻗기 위해서는 반드시 난간 틈 사이로 빠져나가고도 엎드려야만 가능할 정도였다.
‘좋아, 해보자.’
체구가 작고 왜소한 레온의 경우 좁은 난간 틈 사이로도 몸을 밀어 넣는 게 가능했다.
아마 센느의 덴이나 용맹한 벨을 제외하곤 누구도 불가능할 것 같은 방법이긴 했다.
레온이 손을 탁탁 털어내고 바닥에 엎드렸다.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먼지가 내려앉은 거치대가 눈앞에 겨우 보였다.
‘조금만 더!’
아마 드레스를 입었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얇은 틈 사이를 빠져나오기 위해선 레온도 온 발버둥을 쳐야만 가능할 정도였다.
거의 떨어질 정도로 몸을 밀어 넣고 나서야 겨우 손이 닿았다.
레온이 거치대를 꾹 붙잡고 낙하하듯 발코니를 빠져나왔다.
힘이 조금만 부족했다면 그대로 추락해 척추를 다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으, 으읏!”
체구가 작은 덕에 손쉽게 거치대에 매달렸지만, 문제는 단련 한 번 해보지 않은 몸에 근력이 남아 있을 리 없다는 데 있었다.
레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저 벽에 딱 달라붙어 있는 와중에 레온이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드먼드가 와 있나 살피려는 순간, 레온의 한쪽 손에서 완전히 힘이 빠져나갔다.
슬슬 흠집 하나 남지 않은 손바닥에 강한 고통이 머무르기 시작했다.
더는 버틸 수 없을 만큼 온 힘을 다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성큼성큼 걸어와 고민도 하지 않고 레온의 손을 붙잡았다.
“쉿!”
레온은 심장이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가슴 전체가 울렁거려 상대가 누군지 확인도 않고 그 손목을 간절하게 붙잡았다.
상대는 단숨에 레온의 손을 잡아 올려 발코니 안으로 이끌었다.
잡아당기는 힘에 레온이 그대로 난간을 넘어 엎어졌다. 그러곤 배은망덕하게도 구해준 이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에드먼드?”
“그래, 널 구해줄 게 나뿐이지 누가 또 있겠어.”
그가 고개만 빼꼼 들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쩌다 보니 자세가 매번 이런 식이다.
레온이 서둘러 그의 품을 벗어나 의미 없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에드먼드는 그보다 주변을 살피는 게 우선이었다.
“들어가자. 아무도 없어.”
“언제부터 와 있던 거야?”
“네가 위층에서 어떻게 내려올지 고민하기 직전에?”
“다 보고 있었으면서 그냥 뒀어?”
“내가 위층까지 올라가서 공주님처럼 안고 내려올 순 없으니까. 그나저나, 아르테미스.”
두 사람이 속삭이며 비밀 공간에 들어섰다.
내부엔 빛이랄 게 하나도 없었다. 완전한 어둠을 맞이하기 전 에드먼드가 달빛에 비친 레온의 모습을 살폈다.
“너, 머리칼이….”
“아, 이거.”
레온이 제 옷을 내보였다. 아름답고 풍성하던 드레스는 어디 가고 화려한 남성의 옷이었다.
“왕세자 옷을 좀 훔쳤거든. 어울리는 머리여야만 했고.”
마음 같아서야 가발을 벗어 던지고 본래 머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은백색 머리칼은 이 서대륙에서도 흔치 않았다.
게다가 푸른 눈까지 들킨다면 제 정체를 특정하기가 무척이나 쉬워진다.
“변장 좀 해봤어. 들키면 안 되니까.”
에드먼드는 별말이 없었다.
다만, 집요하게 그만 좀 쳐다봤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시선엔 면역이 없다. 레온이 퉁명스러운 대답을 찾아대다가 먼저 뒤돌았다.
다행히 에드먼드도 손목을 붙잡는다거나 잔소리 같은 말을 쏟아내진 않았다.
“아르테미스, 이걸 봐.”
대신 그는 친절하게 이 비밀 공간의 지도를 보여주었다.
“이곳은 크게 네 갈래로 통하는 길이 존재해.”
위급 상황 시 왕의 탈출을 도와야 하는 곳인 만큼 크라운 캐슬의 곳곳과 연결되어 있었다.
“우선 킹덤힐.”
크라운 캐슬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외부 언덕이었다.
근접한 곳에 사는 백성들조차 정체를 모르는 곳에 출입구가 나 있었다.
지금 나간다면 그 앞 광장에 설치된 처형장까지 직행할 수 있었다. 물론 하일 데로니스가 있는 곳으로 갈 마음은 없었지만 말이다.
“여긴 예배탑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고, 또 이쪽은 성 후면 요새와 연결돼 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갈래 통로 중 가장 길게 늘어져 있는 곳이 두 사람이 향해야 할 오늘의 목적지였다.
“왕가의 영면소와 연결된 곳.”
“영면소?”
레온이 지도를 보던 눈 그대로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궁금증이 묻어난 그 얼굴에 에드먼드가 표정을 굳히고 답했다.
“하일 데로니스는 영면소를 파괴하고 그곳에 물을 채워 넣었어. 수로 제어소도 그쪽에 있고.”
숨길 마음도 없었지만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인간들이 믿어대는 신의 사상에 의하면 영면소는 그 어떤 악랄한 자라도 반드시 신성하게 여기는 공간이었다.
엔드해에 묻힌 영혼들을 위로하는 공간이자, 그들이 이곳에 살았던 시간을 존중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그런 곳에 물을 채워 넣었다고?”
“뭐, 그 덕에 우리가 탈출 계획을 세울 수 있던 거니까.”
에드먼드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레온도 평정심을 되찾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로 타워를 무너뜨린 후 그곳에 준비된 물길을 타고 성 밖으로 탈출해야만 했다.
크라운 캐슬의 역사가 깊은 만큼 그곳을 채우는 영면소의 길이 역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수많은 영혼을 물 아래 가둬놓고도 탈출로를 거기에 만들다니.’
어찌 보면 참으로 용감한 자였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만행이어서 그렇지, 대담한 생각을 해낸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서두르자. 곧 있으면 처형장이 시끄러워질 거야.”
“설마 집행을 방해할 셈이야?”
“잡혀간 게 우리 반란군이거든.”
“뭐? 누가 잡혀갔는데? 혹시….”
“네 가문 행정관은 아니니까 안심해.”
반란군이 휴고 우딘을 구출할 거란 사실을 일러주며, 에드먼드는 레온의 표정이 시시각각 안심으로 물드는 것을 확인했다.
“그나저나 아르테미스, 밖에서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응?”
두 사람이 물길이 차오른 영면소 구역으로 향하며 다시 속닥거렸다.
“왕세자가 너를 찾겠다고 길길이 날뛰던데.”
“…그놈이 벌써 깨어났어?”
이럴 줄 알았으면 검집으로 머리라도 더 내려칠 걸 그랬다.
“그놈의 눈에 들기라도 한 거야?”
에드먼드가 능글맞게 어깨를 밀어대며 물었다.
“장난하냐?”
“그럼 왜 그리 애타게 찾는데?”
“뭐… 왕세자의 옷이 좀 필요해서 손을 썼거든.”
“그놈을 홀라당 벗겨 놓기라도 했어? 도대체 어떻게?”
“벗긴 건 아니고. 아니, 벗긴 것도 맞는데 다시 옷을….”
“설마 너… 네 드레스를 입혀놓은 거야?”
“응, 알몸보단 그쪽이 더 창피할 테니까.”
레온은 그 말을 하면서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도록 신경 썼다.
비록 놈에게 드레스를 입혀주느라 시간을 좀 할애하긴 했어도 코를 깨부수는 것보다 더 통쾌함이 밀려드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아마 사는 동안 평생 소문에 시달려야 할걸.”
“…큭! 널 적으로 두지 않아 다행이다.”
어두운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에드먼드는 내내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레온도 마음 한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크라운 캐슬에서도 웃고 떠들 수 있다니.
아주 잠시였지만 레온은 그런 사실이 신기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