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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08화 (108/133)

108화

18장. 처형식(3)

한동안 연회장 바깥 내부 정원에서 험악한 고성이 오가며 주의를 끌었다.

연회장에 모여 있던 귀족 아가씨들이 고개를 쭉 내밀고 그곳을 훔쳐보느라 아주 바빴다.

“맙소사, 대체 누가 저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야?”

“어째서 여인의 옷을….”

“잠깐, 저 드레스는 그 아가씨의 것 같지 않아?”

“누구? 아, 확실히 본 적이 있는 드레스인데… 설마!”

어서 몸을 가릴 걸 가지고 오라고 길길이 날뛰는 왕세자는 아직까지도 드레스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이깟 드레스, 당장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체통을 지키라는 왕비의 명에 차마 알몸으로 머무를 수 없던 탓이다.

“그 아가씨라면 왕세자 저하와 함께 있는 것 아니었어?”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대체 무슨 일이지?”

레온이 연회장에서 쓰러지고 난 후 곧장 왕세자의 품에 안겨 사라졌기 때문에 이곳에 모인 귀족 아가씨 대부분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중이었다.

레온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외모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매력이 있었고, 왕세자 역시 그런 레온에게 홀라당 넘어간 것처럼 보였다.

거만하기 짝이 없기로 소문난 왕세자가 친히 레온을 챙겨 은밀한 곳으로 사라졌으니 그렇게 오해할 만도 했다.

“아무튼 저 지경이 된 걸 보면 좋은 결말은 아니었던 게지요.”

“게다가 찾아내 반드시 죄를 묻겠다는 왕비 폐하의 분노도 있었고요.”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잦아들 때쯤 왕세자의 시종장이 휘황찬란한 옷가지를 들고 나타났다.

빽빽한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옷을 내려놓자마자 불같은 펠릭스의 호통이 이어졌다.

“자, 이제 모두 연회장으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결국 데로니스군이 상황을 정리하고 나섰다.

언제까지 이 난리 통을 유지할 수는 없다.

“부인과 아가씨들을 모시고 어서 연회장 안 보안을 유지해라.”

“예!”

상급 병사의 명에 모여 있던 데로니스군 대부분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 틈에 뒤섞여 있던 케인도 받은 명대로 서둘러 움직였다.

펠릭스의 머리칼이라도 더 훔쳐보기 위해 기다리는 아가씨들을 향해 길을 안내했다.

“자, 이쪽으로 오시고요.”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뿐이지만 케인은 몸에 밴 기사도로 능숙하게 할 일을 해냈다.

이제는 익숙해진 아르테미스의 이름이 분노를 담은 왕세자의 입을 통해 몇 번이나 터져 나왔다.

그는 당장 레온을 찾아내라며, 이런 수치를 준 이를 가만두지 않을 것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연회장 근처를 수색하던 데로니스군이 처음 왕세자를 발견했을 때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졌다.

내부 정원은 왕비가 특히 공들여 키우는 귀한 식물이 자라고 있는 곳이다.

그런 만큼 누구도 쉽게 발길을 옮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좋아하지 않는 왕세자만이 그곳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펠릭스가 그런 곳으로 레온을 데려갔으니 주변을 서성이던 병사들은 눈치껏 시선을 끊었다.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했더니만…. 역시 우리 공자님이셔.’

뒤늦게 소식을 들은 케인이 그곳을 찾았을 땐, 연못가 옆 수풀 한가운데 드레스를 입고 쓰러진 누군가가 발견된 후였다.

‘우리 공자님을 만만히 보면 큰코다친다고.’

작고 왜소하다고 함부로 덤볐다간 맨살이 발리다 못해 뼈까지 헤집어질 가능성이 컸다.

모두의 기대 혹은 걱정과 달리 풀숲에 쓰러져 있는 건 왕세자 펠릭스였다.

채 잠기지도 않는 드레스를 몸에 걸치고도 모자라 얼굴엔 달콤한 향내를 맡은 개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확인할 새도 없었다.

펠릭스는 깨어나자마자 분노했고, 연회장 안에 있던 왕비가 도착해서 진정시킬 때까지도 눈이 뒤집혀 있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야.’

레온은 그곳을 무사히 빠져나간 것 같았다.

설명해준 계획대로 그곳을 통해 왕가의 사저로도 무사히 진입했을 것이다.

다시 연회장 안에 모여든 귀족들을 보며 케인이 슬슬 주변 눈치를 살폈다.

모두가 제 몫을 해내고 있으니, 이제 자신 역시 브라운을 찾아 이곳을 탈출해야만 했다.

‘수송용 말 훈련장 어딘가에 있다고 했지.’

브라운은 그곳에 붙잡혀 있었다.

누군가가 그를 되찾기 위해 침입할 것을 의식해서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데로니스군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조합해보면 브라운은 확실히 그곳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

‘여차하면 말을 타고 도망쳐도 되겠지만…. 그곳엔 사냥개들이 있다고 했어.’

넓은 성이라 해도 짐승 우리가 여러 군데에 마련되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쉽지 않은 작전이 될 수도 있다. 애초에 훈련장은 이곳에서 정반대, 성벽 외곽 부근까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어떤 핑계를 대고 갈 수 있을지 케인은 눈앞이 막막하기만 했다.

“폐하께서 킹덤힐로 이동하신다.”

그때 등 뒤에서 상급 병사가 나타났다.

그는 일반 병사들과 달리 새카맣고 두꺼운 가죽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방수 처리가 되어 있는지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번뜩거리는 묵직한 재질이었다.

“곧 있으면 반역자의 처형이 집행된다. 모두 준비한 대로 주변 경계를 강화하고 백성들을 통제하도록 해라.”

“예!”

“연회장 안에 모여 있는 귀족들도 모두 그곳으로 이동한다.”

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 이례적으로 킹덤힐 앞에서 처형이 집행될 터였다.

‘기회다!’

이거라면 이곳을 벗어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케인이 속으로 환호를 잠재우며 각 잡힌 모습으로 상급 병사의 말을 경청했다.

머리를 보호할 만한 금속으로 된 전투모는 케인의 붉은 머리를 감춰주기에 충분했다.

“자, 그럼 해산!”

상급 병사의 명령에 따라 데로니스군이 각자 맡은 소임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케인은 어느 쪽으로 갈까 하다가 우선 귀족들 편에 서기로 했다.

그들과 함께 이동하는 게 같은 데로니스군의 눈을 속이기도 훨씬 쉬웠다.

‘광장으로 이동시키는 중에 외곽으로 빠지면 될 거야.’

그곳에 도착해 감시하는 눈들을 어떻게 속일지는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었다.

케인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랜 시간 잘 단련된 몸은 남들보다 몇 배나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벌써 연회장 쪽에 다다를 때였다.

뒤편에서 누군가가 따라붙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케인이 곧장 멈추어 섰다.

몸을 돌려세우기도 전에 따라붙던 이가 어깨를 뒤틀었다. 케인이 녹안을 질끈 감았다.

“자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냉철한 표정을 한 상급 병사가 케인의 앞에 섰다.

그의 시선이 케인이 입고 있는 전투복에 닿았다.

“왕의 호위단이 향할 곳은 오직 한곳뿐일 텐데.”

호위단이라니. 설마… 구분을 해놓은 건가?

“네 정체를 밝혀라.”

그의 눈빛에 케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낭패였다.

***

감금 생활이 지루할 거라고 예상했던 건 아니다.

무슨 방식으로든 불편함을 겪게 되리라 막연히 상상했을 뿐.

“폐하께서 처형장에 도착하면 그 즉시 귀족들도 그 앞에 끌려가겠지. 아, 끌려간다는 표현은 내 개인적 바람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거라네!”

으하하하하!

휴식을 취하는 말의 콧바람 소리와 몇몇 정체 모를 짐승이 위협하는 소리를 빼곤 이곳에 울려 퍼지는 유일한 소리였다.

브라운은 바위를 가져다 놓은 것 같은 성의 없는 석재 의자에 앉아 철창 밖 인물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거 아나? 이번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귀족들을 추적하기 위해 우리 군이 무척이나 바쁠 거란 걸. 아주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니고 있을 테지.”

이곳을 지키는 병력은 종이 세 번 울릴 때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외벽을 빙 둘러 지켰다.

아무리 관리해도 축사 특유의 가축 분뇨 냄새는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대개 통풍이 잘 되도록 큰 창을 내어놓는 것과 달리 이곳 사육장은 사방이 꽉 막혀 있었다.

높은 천장 가까이에 연달아 나 있는 다섯 개의 유리 없는 창이 유일한 환풍구였다.

‘악취는 적응됐지만 저자는 좀 수상한데.’

붙잡혀온 후로 여러 번의 교대 끝에 그가 이 앞에 나타난 건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시간마다 죽상으로 나타나는 다른 병사들과 달리, 그는 시간 때우기 딱 좋다는 듯 앞을 지키며 쉬지 않고 수다를 떨어댔다.

게다가 어찌나 입이 가벼운지 중요한 정보라 할 수 있는 왕의 동선이나 데로니스군의 작전 현황 등도 마구 떠들어댔다.

“참참! 게다가 더 충격적인 소식이 있지. 연회장 한구석에서 우리 펠릭스 왕세자 저하가 발견됐는데 어느 차림이었는지 알고 있나?”

“…….”

“하긴 계속 여기 갇혀 있으니 알 리가 없지. 내가 알려주겠어!”

브라운은 여전히 침묵과 경청을 택했다.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가 떠들어대는 게 혼란을 빚어내기 위한 교란이래도 상관없다.

그 정도 변별력은 사람을 수도 없이 많이 상대해본 브라운에겐 확실히 있었다.

“글세, 어느 귀족가의 아가씨 드레스를 입고 발견되었는데… 그걸 벗지 못해 길길이 날뛰는 탓에 왕비 폐하께 혼이 나 아주 볼만했다지? 크흐흐흐!”

수상하다. 확실히 이상했다.

브라운은 말을 하는 도중 간간이 이곳을 흘끔거리는 그의 행동을 보며 확신했다.

“이봐요.”

어느 곳에도 묶여 있지 않은 브라운이 그에게 다가갔다.

데로니스군은 브라운이 절대 탈출할 수 없을 거라 자만했는지 손발 따위 묶어두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은 항상 데로니스군이 지키고 있는 곳이고, 여차하면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길러온 사냥개를 풀어내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당신.”

브라운이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대꾸도 없이 여태껏 무시하던 것과는 다른 행동이었다.

병사가 조금 긴장한 듯 눈알만 돌려 브라운을 살폈다.

“조금 전부터 나더러 들으라고 계속 떠드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놈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에서 답을 읽은 브라운은 점점 더 확신을 얻었다.

“창을 쥐는 법으로 상대가 공격을 취할지 방어를 택할지 알아낼 수 있다는 거, 전술을 배웠으니 나보다 잘 알겠죠.”

브라운이 턱으로 그의 창을 가리켰다.

늘 공격을 우선하는 데로니스군은 창의 중간 부분을 오른팔 앞쪽에 위치하게 잡고 있었다.

어느 누가 접근하더라도 긴 창으로 거리를 유지해 공격하겠다는 게 드러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 세 번. 내 앞에 나타날 때마다 매번 왼손으로 짧게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건 창의 머리 부분으로 적의 뒷목을 잡아끌어 단거리에서 공격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당신 허리춤에 숨겨놓은 단검으로 목을 그어 공격할 테고.”

그는 다른 데로니스군과 달리 왼손엔 창을, 오른편 허리춤엔 단검을 숨기고 있었다.

놈이 미동도 없이 창을 움켜쥐었다. 브라운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낮게 내리깔렸다.

“마치 우리 폰네시 병사들처럼….”

그건 침묵의 기사단이 주로 적을 제압하는 방식이었다.

창병도 근거리 전투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수십 년 전 기사단장 헤리스가 고안해낸 방법이기도 했다.

“당신….”

계속해서 정보를 알려주는 것도, 적의가 드러나지 않는 것도.

브라운이 확신을 담아 은밀히 물었다.

“은백의 그림자들,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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