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18장. 처형식(4)
그 시각, 마다비아.
해저 동굴 깊숙한 곳에 풍부한 해산물 요리가 마련되었다.
멋들어진 테이블이나 고급 식기는 아니었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정겨운 것들이 세 사람 앞에 놓였다.
“빵 부스러기를 모아다가 먹고 남은 우유에 치댄 밀죽이 아니라니! 근 몇 년 만에 처음 먹어보는 근사한 식사겠어!”
데칸은 슬슬 이곳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아직 새로운 마다비아를 다 둘러보진 못했지만 모두가 잘 지낸다고 하니 더없이 다행이었다.
일부러 나쁜 척을 하고 평생 살았어도 배곯아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차마 외면하지 못했던 그의 심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우리 군을 정식으로 소개해주지.”
반란군 대장 제이드가 세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그게 적의를 풀어내는 데 좀 도움이 되지 않겠나?”
그는 좀 전에 들끓었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헤리스와 피타를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손짓 몇 번에 곧 포도주가 내어졌다.
아직 하늘이 푸르스름한 시간이었지만 먹고 마시는 데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야기 나눌 게 많을 듯하니 여독은 이 한 잔으로 풀어내는 게 좋겠군.”
그가 두 사람에게 포도주를 건넸다. 데칸은 누가 따라주지 않아도 이미 세 잔을 마셔 넘긴 후였다.
헤리스가 피타의 몫까지 잔을 받아주었다. 깨끗한 천을 손에 둘둘 감고도 피가 새어 나오는 중이다.
그런 손으로 잘도 받겠다고 헤실거리자, 헤리스는 한숨이 나오는 걸 참아내야 했다.
“우리가 정체를 숨기고 이곳에 잠입한 것부터가 시작이지. 그쪽들 탓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한결 편하군.”
“자, 그럼.”
헤리스와 반란군 대장 제이드가 함께 포도주를 마셔 넘겼다.
피타도 입을 가득 채웠던 생선 요리를 훌떡 삼키고 포도주로 입을 적셨다.
“길라에서 만난 암살자에 대한 정보는 따로 없나?”
헤리스가 먼저 물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겪었지만 내세울 만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그저 기세를 숨기고 폰네시 병사들이 죽어가는 소리를 뼛속 깊이 새기는 것밖엔 해낸 일이 없었다.
“그자는 공자님을 노리고 있어.”
분명 폰네시 병사들에게 레온의 행방을 물었었다.
그와 같은 살수가 레온을 뒤쫓는다 생각하니, 헤리스는 쥐고 있는 스푼이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듯 입맛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죽어라 먹고 마시던 데칸도 슬슬 대화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제가 봤을 때 다른 특별한 건 없었지만….”
다시 한번 꿀떡 음식을 삼킨 피타가 반란군 대장 제이드에게 제가 본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자는 분명 검은 투구를 쓰고 있었어요.”
“검은 투구라고?”
“예, 뭐 아는 바가 있기라도 한 겁니까?”
제이드가 턱을 쓸었다.
그의 머릿속엔 그간 숱하게 모아온 서대륙 내의 모든 정보가 모여 있었다.
책장을 넘기듯 그와 관련된 정보를 찾아내던 제이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소문으로만 들어본 적이 있어.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데로니스 쪽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이런, 하필이면.”
“공자께서 덴버그에 계시는데 타이밍이 좋지 않군.”
그가 데로니스 쪽과 연관이 깊은 놈이라면 레온의 행방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곁에 워렌과 반란군이 있다 해도 그 암살자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게까지 최악의 상황은 아니지. 크라운 캐슬 내에도 공자님을 지킬 만한 세력은 많이 있으니까.”
“내부 첩자라도 심어둔 모양이지?”
데칸이 툭 내뱉은 말에 제이드가 즉시 미소 지었다.
보기보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무엇보다 악을 좇는 이가 아니란 점도 마음에 쏙 들었다.
뜻을 함께한다면 좋은 동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접어두며 그가 곧장 헤리스와 피타에게 설명해 주었다.
“은백의 그림자들이라 들어봤나? 헤리스 자네라면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지.”
“루시오가 크라운 캐슬 내에 심어둔 무리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들은 데로니스군 내에 아주 깊숙이 침투해 있는 루시오의 사람들이었다.
“몇 사람을 빼곤 데로니스군이었던 자들이 은백의 그림자가 되길 자처했어. 회유랄 것도 없었지.”
“스스로 은백의 그림자가 되었단 말입니까?”
“그래,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하일 데로니스를 보고 느끼며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걸 체감한 자들로 구성돼 있어.”
미래를 스스로 선택한 자들이 많은 만큼 그들의 충성도나 정체성은 확고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믿을 만한 자에게 이미 이 소식을 전했지.”
반란군의 연락 체계는 삽시간에 퍼지는 구조였다.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직접 전하는 속도를 이길 수 있는 건 없었다. 늘 2인 1조로 움직였기에 쉽게 배반하기도 어려운 구조였다.
“아마 은백의 그림자들이 직접 움직이고 있을 것이네. 공자를 지키기 위해서.”
이미 크라운 캐슬에 이 소식이 전해졌다.
게다가 레온의 곁엔 반란군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가 함께 있었다.
“에드먼드는 태어난 순간부터 복수를 위해 살았어. 또 무엇보다 크라운 캐슬에 대해 잘 알기도 하고….”
“에드먼드?”
소개는 이쯤 해두는 게 좋겠다.
나머지는 직접 돌아온 이들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게 더 와닿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걱정은 좀 내려두고 오늘만큼은 푹 쉬는 게 좋겠군.”
“그래, 그만 떠들고 맛있는 거나 챙겨들 먹으라고. 아주 데로니스에 뭐에 듣기 싫어 죽겠어.”
“하지만….”
“죽고 사는 문제 내일 걱정하면 큰일이라도 나냐고! 좀 쉬어야 머리도 잘 돌아가는 법이야!”
데칸이 툴툴거리는 통에 결국 대화가 강제로 마무리되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 제이드가 다시 헤리스와 피타에게 포도주를 내어주었다.
데칸에겐 귀하디귀한 통통한 오리새의 뒷다리를 건네주었다.
“많이 드시오.”
“이것 참! 이렇게 챙겨주니 배가 불러도 안 먹을 수가 없겠구만!”
여전히 걱정은 남아 있지만 해낼 수 있는 게 없다.
헤리스는 지금 이곳에서 레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골몰하며 잔을 들었다.
목 안을 타고 흐르는 포도주의 뒷맛이 무척이나 씁쓸했다.
***
“수상한 자가 보이면 보고를 생략하고 즉시 생포해라.”
“예!”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너희는 주변을 똑바로 살펴.”
에스델의 앞에 모여 있던 데로니스군이 그녀에게 충직하게 대답을 내뱉곤 뿔뿔이 흩어졌다.
“…슬슬 움직여야겠군.”
킹덤힐 앞의 조각 광장엔 이미 처형장이 마련돼 있었다.
축제 분위기였던 백성들도 이상함을 눈치챘다.
크라운 캐슬에서 일하는 이들 중 연관 없는 자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기에 그날의 사건이 부풀려져 일부 귀에도 흘러 들어간 상태였다.
“와서 재화나 펑펑 써대고 돌아갈 줄 알았더니만.”
“일이 터져도 큰일이 터진 게지. 어딜 감히 왕께 그런 흉측한 짓을.”
스무 해가 넘는 시간이 흐르며 먹고 살기 바빴던 백성들 머릿속엔 이제 가이아가 없었다.
막말로 누가 왕이 되던 그저 사는 곳의 백성들에겐 아무 타격도 없었다.
그들의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만들어주는 건 한 톨도 없었기에 결국 트레톨라 가문이나 데로니스 가문이나 거기서 거기란 소리였다.
“그래도 두 번은 다시없을 구경거리이긴 하지.”
“아무래도요. 처형 집행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데.”
“어디 좋은 곳에 자리나 잡자고. 저쯤이 괜찮으려나?”
백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두근거림 삼아 귀족들이 줄줄이 처형장 앞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그들은 지금껏 화려하게 연회를 즐기다 말고, 미래를 아는 사람들처럼 어두운 표정으로 이곳에 끌려왔다.
왕비의 권유였고, 왕의 명인 데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심에 처형이 궁금하기까지 했다.
휴고 우딘이 붙잡혀 갔단 소식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목숨을 내놓을 이가 내 가족만 아니라면 경쟁자가 줄어드는 것과 다름없었다.
“모두 주변을 통제해라!”
“통제해라!”
여관에 머물며 가족을 기다리던 귀족들도 모두 이곳에 끌려왔다.
덴버그 내에 머무르는 귀족이란 귀족은 싹 잡아 이번 처형을 지켜보게 만들 속셈이었다.
“우선은 내부 움직임을 기다릴 필요가 있어.”
킹덤힐 근처.
반란군 병사가 워렌과 함께 숨죽여 처형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 전부터 이곳에서 처형장의 흐름을 살피고 있었다.
“연락이 닿을 만한 방법은 없는 겁니까?”
“당분간은 신중한 게 좋겠지. 방해가 되면 안 되지 않겠나?”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으니, 우선은 잠자코 지켜보는 게 두 사람을 돕는 길일 것이다.
워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처형장을 살폈다.
그곳엔 데로니스군의 핵심 병력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이 모여 있었다.
확실히 덴버그를 가로지르는 수로가 터진다면 시선을 빼앗을 수도 있다. 자연히 집행은 늦춰질 것이다.
“문제는 시기가 맞는단 보장이 없다는 건데….”
안에서 언제 어느 타이밍에 일이 진행될지 알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다. 에드먼드의 실력이야 믿고 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삼 일 전 급습으로 데로니스군의 독이 바짝 올랐어. 은백의 그림자들이 있다지만 모두가 우리 편은 아닐 테니 쉽지 않겠지.”
“공자께선 해내실 수 있습니다.”
“그리도 믿소? 일이 잘 끝난다면 꼭 이야길 나눠보고 싶군.”
워렌처럼 냉정한 자가 믿는 것을 보면 레온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답이 없는 상황은 아니다.
데로니스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병력은 총 열다섯.
그중 워렌은 지금껏 합을 맞춰보지도, 함께 작전을 나눠보지도 못한 자였다.
하나 실력만큼은 믿을 수 있다.
루시오 공작이 가장 먼저 레온에게 준 기사였고, 헤리스 타린이 자식처럼 돌보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란군이 그에게 거는 기대가 무척이나 컸다.
“워렌 경만 믿겠소.”
레온과 에드먼드가 바라는 시간 내에 수로를 무너뜨리지 못할 시 행 작전은 단 하나였다.
“이곳에서 좀 더 지켜본 후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것 같으면 우리는 곧장 저들에게 달려들 테니.”
“…휴고 우딘 한 사람만큼은 반드시 구출하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 바랄 것도 없지.”
소모전.
오직 휴고 우딘을 구하기 위한 병력 소모전이 그들의 유일한 계획이었다.
반란군 병사들은 이번 작전에 모든 것을 걸 작정이었다.
목숨을 내놓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아니, 상관없었다.
“후작을 구출하면 일행들과 함께 곧장 마다비아로 떠나시오.”
휴고 우딘을 빼앗긴 데로니스군의 시선은 반드시 처형장에 묶이게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레온과 에드먼드도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다.
워렌이 바라는 것 역시 그것 하나뿐이었다.
반란군 병사들과 워렌이 이제 만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 하일 데로니스를 보며 비장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곧 처형이 시작되겠군.”
“…우리의 작전도 시작입니다.”
같은 목표를 가진 그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휴고 우딘을 구출하고, 레온과 에드먼드의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어둠 속 그림자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