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18장. 처형식(5)
“은백의 그림자들?”
크라운 캐슬 내 지하로 가는 길은 무척 비좁고 어두컴컴했다.
300미터마다 벽면에 켜놓은 등불을 제외하곤 주변을 밝혀줄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마저도 성한 것이 많지 않았다. 미약한 불꽃은 두 사람이 움직이는 바람에도 쉽게 꺼지며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 크라운 캐슬 내에서 움직이는 반 데로니스 세력이야.”
“그런 자들이 있단 말이야?”
“루시오 공작께서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에 세력을 심어두셨어.”
폭이 좁은 돌계단을 한참 밟아 내려가며 에드먼드가 속삭였다.
“정말… 대단하시네.”
그 루시오 몬데이어가 아버지였으니 직접 알려주어 레온 역시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물론 에드먼드는 그 사실을 모른다. 레온은 신기한 사실을 알아챈 듯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어깨를 떨었다.
“은백의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어. 그들이 우리를 도울 거야.”
“어떻게?”
“그레이트 대협곡으로 가는 길목에서 모이기로 뜻을 주고받았어. 데로니스군과 맞서 싸우는 우리 병력이 되어줄 거야.”
수로 타워를 무너뜨리고 난 후 두 사람은 그대로 지하 물길을 따라 탈출할 계획이었다.
수로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금세 하류 구역에 물이 차오르게 된다.
그 규모는 덴버그의 절반을 물속에 가라앉히는 상상 이상의 범위였다.
물난리를 겪은 하류 구역 백성들은 자연히 상류 구역으로 모여들고, 그들을 감시하는 눈길은 배로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노려 그곳까지 합류해야 해. 우리 역할은 그것뿐이야, 아르테미스.”
과연 그 모든 게 생각처럼 쉬이 진행될까?
미신을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쭉 운이 좋았다.
중요한 순간에 일이 틀어질 만한 가능성은 너무도 많았고.
“글쎄.”
수로 타워가 무너졌단 소식을 듣고 나면 새 왕도 곧장 지하부터 뒤질 게 분명했다.
데로니스 병력이 한곳에 모여드는 건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을 상대로 은백의 그림자들이 맞서 싸운다 해도 이기지 못할 가능성 역시 염두에 둬야 한다.
승리가 우리 편이라고 믿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으니까.
“맞서 싸워야 하는 순간이 분명 올 거야.”
그 순간마저도 누군가에게 지켜져야 할 대상이 될 생각은 없다.
“그때가 되면 날 막지 마.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까.”
드레스를 입은 귀족가의 아가씨 역할은 잊었는지 레온이 푸른 검을 움켜쥐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널 막는 일은 없어.”
그렇게 말하며 에드먼드가 가까이 다가왔다. 성큼 좁혀진 거리만큼이나 그의 모든 것이 가까이에서 보였다.
손등 어딘가를 간질이는 옷자락도 생생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정확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안에 비친 제 표정은 바보 같았다. 레온이 얼굴을 숨기기 위해 한 발짝 뒷걸음질 칠 때였다.
에드먼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위험해.”
등 뒤는 계단이다.
발아래 펼쳐진 지하로 가는 길은 아직 반절도 오지 못해 한참이나 깊었다.
에드먼드가 손을 뻗어 레온의 허리를 홱, 끌어안고 반대쪽 손으로 벽을 짚었다.
“지금 뭐 하는…!”
“너무 어둡잖아.”
에드먼드가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곤 뒤편에 걸려 있던 등불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방금 전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장서는 까만 머리칼을 보니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뭐가 됐든 빛이 필요하니까.”
“그래, 어딜 때릴지 고르려면 어두운 것보단 그게 낫겠다.”
“날 때리려고? 힘 빼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너 하나 때린다고 쓰러질 만큼 약해빠지지 않았거든?”
“뭐, 쓰러지면 또 내가 안아주면 될 테니까 상관은 없지.”
“야!”
그가 다시 킥킥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손에 쥔 무기가 다이아 스틸이라 때릴 순 없다. 이걸로 후려치면 기절이 아니라 영면을 맞이할 수도 있을 테니.
“너, 내가 봐준 줄 알아라.”
레온이 투덜거리는 걸 들으며 두 사람이 서둘러 지하로 사라졌다. 이제 목적지는 코앞이었다.
***
“사이먼 우딘을 찾아냈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에스델이 시선을 돌렸다.
이로써 훈련장 안에 잡혀 있는 정체불명의 사내가 적어도 휴고 우딘의 추방당한 자식이 아니란 사실 만큼은 확실해졌다.
그건 제가 의심하고 있는 인물에 한 발 가까워졌다는 것과도 같은 뜻이었다.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지?”
“지하 감옥에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군. 서둘러 움직인다.”
“예!”
처형식은 곧 있으면 시작이다.
오늘의 주인공을 뒤바꿀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신원 불명의 사내가 정말 레온 몬데이어의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본보기가 되어줄 터였다.
값어치 없는 후작 따위와는 비할 바 없이 귀족들의 경각심을 위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놈이 좀 수상합니다.”
“수상하다니?”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도중 부하 사내가 에스델에게 놈의 행동을 보고했다.
“마치 잡히길 기다리던 놈 같았다고?”
“예, 도망쳤던 여관으로 돌아와 그곳에 포진돼 있던 우리 군에게 제 신분을 밝혔습니다.”
“스스로 말이야?”
무슨 꿍꿍이인지 자신이 휴고 우딘의 아들 사이먼 우딘이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데로니스군에게 덤벼들었다.
누가 봐도 붙잡히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이지?’
덴버그 내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어렵지 않게 붙잡게 되리라 기대했다.
하나 사이먼 우딘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반란군 놈들이 손을 쓴 게 분명했다.
“그들이 이상한 지령을 내린 건 아닌지 의심스럽군. 내가 직접 봐야겠어.”
“모시겠습니다.”
사이먼 우딘이 자력으로 병사들을 따돌렸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휴고 우딘의 움직임은 이전부터 주의 깊게 살펴왔고, 그가 발톱을 숨긴 채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에스델 큐어. 그녀의 통찰력은 데로니스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완벽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의 희생양으로 고민 없이 우딘 후작가를 택했고, 하일 데로니스 역시 그녀의 뜻을 전적으로 따랐다.
‘놈들이 사이먼을 통해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해.’
그들의 뿌리 끝까지 전부 긁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반드시 잔당을 처리해야 했다.
덴버그에 몰려든 잔챙이들의 목을 꿰어 왕의 발아래 갖다 바쳐야만 제 면이 살아날 테니.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에스델이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훈련장에 갇혀 있는 신원 불명의 놈. 그자에 대한 관리책은 누가 맡기로 했지?”
“헨덱스 경이 맡기로 했습니다.”
“그래?”
역시 예상대로다.
헨덱스라면 이번 일에 반드시 나서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에스델이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모았지만 입술만은 미소 지었다.
“계획대로 주변을 봉쇄하고 투구단을 배치하여 추가 명령을 기다려라.”
그 무엇도 제 예상 밖을 벗어날 순 없다.
“예!”
에스델 큐어, 하일 데로니스의 충직한 심복이자 검은 투구단의 일원인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귀족들 중 누가 반란에 가담했을지 모르니 조금 더 지켜보라는 폐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빳빳하게 몸을 바로 세운 케인이 의심을 벗어나기 위해 답했다.
“모여 있는 이들 중 이상 행동이 있을 시 곧바로 폐하를 보호할 목적입니다. 왕의 호위단이라 해서 폐하의 곁만 지키지는 않습니다.”
위기였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이 제복을 입었던 이가 왕의 호위단이고, 그들이 하일 데로니스의 직속 기사단이라면 그들과는 다른 독단적인 행동이 가능해진다.
왕의 명령을 왕께 다시 되묻는 것만큼 불필요한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용무 끝나셨으면 돌아가 보겠습니다. 폐하의 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케인이 당황을 감추고 눈앞에 서 있는 데로니스군 상급 병사에게 고했다.
꼼짝없이 이대로 처형장으로 갈 위기였지만 그게 최악은 아니었다.
잘만 빠져나간다면 곧장 브라운이 잡혀 있을 수송용 말 훈련장으로 향할 수도 있게 된다.
케인이 전투모 안에 시선을 감추고 그의 눈동잘 살폈다.
그는 잘 손질한 수염 아래 입술을 감추고 눈썹을 까닥였다. 뭔가 생각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왕은 이미 연단 위에서 귀족들을 향해 오늘 있을 처형식에 대해 설명하고 계신다.”
“그러니 서두르겠다는 말입니다.”
여차하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눈앞의 적은 이미 의심을 품었고, 그를 처리하지 않는 이상 뜻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마음도 없었다.
레온이 수로를 무너뜨렸을 때 브라운이 이곳 크라운 캐슬에 남아 있다면 결국 붙잡힐 가능성만 커지게 될 것이다.
공자의 발목을 잡는 것만큼은 케인도, 브라운도 반드시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홀로 보내도 문제없을 것 같군. 애초에 그러니 이런 역할을 자처한 거겠지만.”
예상 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되묻는 목소리가 참을 새도 없이 케인의 입을 가로질렀다.
“예에?”
검을 뽑아들고 정체를 밝히라고 위협할 줄 알았더니만.
케인이 휘둥그레 눈을 뜨며 그를 응시했다.
검은 제복을 입은 데로니스군 상급 병사, 아니 대위 헨덱스가 케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네놈이 검을 쥐고 발을 내딛는 보폭 하나까지도 동북부의 움직임과 닮아 있다.”
다른 이들의 눈을 속여 넘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매일 위기 속에 살아가는 이의 눈매는 벗어날 수 없다.
헨덱스가 손을 뻗어 케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눈앞에 가까이 끌려온 덩치 큰 순한 기사가 두 눈을 깜빡였다.
망토를 묶어낸 매듭마저도 침묵의 기사단이 주로 쓰는 방식이었다. 들키려고 작정을 했군.
“상황을 벗어나는 순발력은 있지만 세심함은 부족해. 왕의 곁을 지킬 때는 좀 더 주의하는 게 좋지 않겠나?”
“…당신, 혹시… 은백의 그림자들, 입니까?”
“그래, 우리는 어디에나 있지.”
“맙소사.”
케인도 이제 헨덱스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은백의 그림자들이 실재하는지는 소문만 무성했지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폰네시 심처에 적군이 깊숙이 숨어 있었던 것만 봐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공자께선 무사히 탈출로로 진입하셨고, 처형장 주변에선 반란군이 때를 노리고 있어.”
“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공자께서 여기 계시다는 걸요.”
“설명하려면 시간이 부족하지 않겠나. 중요한 건 우리의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것뿐이지.”
은백의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공자가 무사히 목적한 바를 이루도록 데로니스군을 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집사는 오늘 밤 처형당한다.”
“…예?”
“소령이 모든 사실을 눈치챘으니 일을 그렇게 꾸밀 거야.”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부집사가 처형당한다니.
케인은 두 눈이 순식간에 뜨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네가 나서지 않는다면 오늘 이곳에서 목숨을 잃겠지.”
그가 처형장까지 끌려가는 걸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에스델 큐어는 누구보다 똑똑한 자였고, 그녀의 눈을 피해 탈출을 감행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부집사는 반드시 처형장까지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만인 앞에서 레온의 존재를 알리는 산증인이 되어야 했다.
“선택지가 하일 데로니스밖에 없다고 포기하지 않도록.”
아직 그들과 맞서 싸울 구심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전하기 위해서 브라운 디카르테는 그 역할을 해내야 했다.
“하니 왕의 곁으로 가게. 그곳에서 부집사를 구해.”
헨덱스가 틀어쥔 케인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우리 은백의 그림자는, 더 이상 데로니스군으로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레온이 이곳에 왔다.
존재의 이유를 준 이가 세상을 떠나고 남은 몬데이어는 오직 레온뿐이다.
헨덱스가 케인에게 작은 배지를 건넸다. 레온의 머리칼과 같은 은백색 표식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림자로 머무르지 않겠어.”
더는 숨죽여 살지 않으리.
은백의 그림자들은 각오했다. 빛에 불타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더 이상 몸을 숨기지 않겠다고.
“서두르지. 오늘은 모두에게 마지막 밤이 될 테니까.”
케인이 배지를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처형식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