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18장. 처형식(6)
크라운 캐슬 내 지하 수용소.
물이 맺힌 감옥 벽에 알 수 없는 미끈한 액체가 뒤섞여, 자글자글 걸쭉하게 흘러내렸다.
쿰쿰한 악취와 비좁은 네모 공간 한편에 쌓인 오물은 단 한순간도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다.
‘괜히 왔어! 곧장 처형장으로 돌진할 것을!’
그곳에 붙잡혀 있는 사이먼 우딘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 붙잡힌 지 벌써 몇 시간은 지난 것 같다.
이럴 시간이 없다고 소리쳐 봐도 돌아오는 건 닥치라는 호통뿐이었다.
‘하긴, 부하 놈들을 통하는 것보다야 왕께 직접 고하는 게 더 확실한 것을… 생각이 짧았군.’
사이먼은 레온 몬데이어와 그들 일행이 이곳 크라운 캐슬에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왕이 레온을 찾고 있다. 그에게 이 중요한 소식을 전하고 한자리라도 얻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
‘아버지도 곧 죽을 마당에 가문으로 돌아가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어.’
항상 제 앞날이 잘 풀리기만을 바라던 사이먼이다.
악바리 같은 그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내가 무슨 정보를 알고 있는지 알면 감히 날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수 없을걸!”
도저히 이렇게 시간만 축내고 있을 순 없었다.
참다 참다 사이먼이 빽, 소리를 지를 때였다.
“에스델 님.”
“오셨습니까.”
철창 밖을 지키던 병사들이 딱딱하게 굳는가 싶더니 곧 키가 큰 여인 한 명이 들어섰다.
그녀는 곧장 전쟁에라도 나서는 것처럼 완전 무장을 하고 바른 자세로 나타났다.
“그래, 저놈인가?”
사이먼이 눈을 빛냈다. 드디어 대화가 통할 사람이 나타난 게 분명하다!
“네놈이군, 사이먼 우딘.”
에스델은 그 이름을 발음하면서 조금 더 딱딱한 표정을 유지했다.
처형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만인 앞에 목을 내어줄 이를 뒤바꿔야 하는 상황에 이런 시간이 무척이나 아까웠다.
‘서둘러야 하는데.’
그녀는 붙잡힌 이가 이제 브라운 디카르테라고 특정하고 있었다.
고불거리는 갈색 머리칼에 호리호리한 체형, 바르고 곧은 자세나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눈동자가 그걸 짐작하게 만들었다.
놈은 레온 몬데이어의 부집사였다. 적어도 오늘 처형식에서 목을 매달고 그 죗값을 치러야 할.
“네 가문의 죄는 이미 알고 있겠지. 너도 어차피 죽게 된다.”
“뭐, 뭐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난 가문에서 이미 추방당한 몸이란 말이오!”
“그래, 그렇겠지. 기를 쓰고 네 아버지가 널 지키려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에게 확인할 게 있다.
“아버지가 날 지키다니 그런 적 없소!”
“그럼 여관에서 어떻게 사라진 거지? 네놈 혼자서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놈은 살기 위해서라도 사실을 있는 대로 털어놔야만 했다.
에스델이 짜증스럽게 사이먼을 압박했다.
머릿속으로 허튼 계산을 팽팽 해대는 게 모두 보였다. 그녀가 쾅, 거세게 철창을 내려쳤다.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걸 고해. 그 정도라면 목숨은 살려줄 수도 있겠지. 어쩌면.”
잠시간 당황했던 사이먼이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원하는 게 그런 거라면 목숨도 구하고 거래도 가능할 것 같았다.
“날 살려 주겠다고 확실히 약속해야만 할 겁니다.”
에스델이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확답을 받고 싶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하는 수 없이 사이먼이 끄응, 인상을 찌푸리고 제가 가진 패를 모두 드러냈다.
“이 덴버그에 레온 몬데이어가 있소. 폰네시의 후계자 말이오.”
사이먼이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혼자만 아는 비밀을 털어놓는 건 언제나 짜릿한 일이었다.
“잭 후작가 놈들로 숨어들었죠. 나의 아르테미스를 인질로 삼아서!”
“아르테미스?”
“그렇소! 당신도 봤겠지? 그녀의 아름다움을 말이야!”
그 여인이라면 에스델도 기억하고 있었다.
직접 그녀에게 드레스 수발을 들었으니, 아직 잊기엔 겪은 수모가 제법이었다.
“한데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아냈지? 확실한 정보인가?”
“덴버그로 오기 전 이미 만난 적이 있고, 진작 수상하다고 생각했었소! 게다가 날 납치한 놈들이 나누는 이야기도 직접 들었고.”
“납치한 놈들?”
그들의 단체명이나 저들 스스로 뭐라고 부르는지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놈들이 데로니스군에게 적의를 갖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워렌, 그곳에 기사 워렌이 있었소. 그자는 레온 몬데이어의 호위 기사로 이름이 나 있는 자였지!”
“확실한가?”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소? 목숨이 걸린 판에.”
놈이 꾸며대는 말 중에 거짓은 없었다.
“아르테미스는 내 정혼자요!”
바라는 게 있는 자는 그런 여유 따위 부리지 못할 테니까.
“그녀를 되찾아만 주겠다 약속한다면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두 알려주겠어!”
더는 못 기다린다. 에스델이 철창 안으로 손을 뻗어 사이먼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수작 부리지 말고 말해. 사실을 숨긴다면 당장 네 목을 그어주지.”
거래는 서로 필요한 순간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사람 한 명쯤 죽어 나간다고 해서 알게 될 사실을 모르고 지나가는 일은 없다.
적어도 이 덴버그 내에서 제 예상을 벗어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놈들은 어디 있지?”
목이 조였다. 숨통을 막는 손길에 사이먼이 다급하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가 눈빛을 통해서 느껴졌다.
“말하겠소, 모두!”
아직 죽을 순 없다.
아르테미스와 결혼도 못 했는데 그런 일은 벌어져선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그들이 워렌 그놈과 함께 처형장으로 향했소! 아버지를 구하겠다면서 급습을 노리고 있을 테지!”
겁먹은 눈동자로 사이먼이 엿들은 정보를 헤집어대기 시작했다.
놈들은 분명 아버지를 구출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때를 노리겠다고 이야길 나누었다.
“물… 물이 넘치길 기다리겠다고 했소!”
“물?”
“분명 물이라고 했소! 내 모든 걸 걸고 장담하지!”
“…수로 타워를 무너뜨릴 셈이군. 이런 젠장.”
물이 넘치면 덴버그 내에 모여 있던 병력의 발이 묶이는 것은 물론, 처형식을 보기 위한 인파와 대피하기 위한 인파로 주변을 통제하기가 힘들어진다.
놈들은 그때를 노리고 처형장을 급습할 계획이었다.
휴고 우딘을 구출하고 유유히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그렇게 둘 순 없지.’
에스델이 거칠게 사이먼을 놓아주고 곧장 뒤돌았다.
따라붙는 병사들의 발걸음 뒤로 놈이 고래고래 뭐라 소리 지르는 게 들렸지만 더는 가치가 없는 놈이었다.
“지금 당장 검은 투구단을 지하 제어소로 보내라. 서둘러. 놈들이 그곳에 있다!”
“예!”
감히 내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어? 에스델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며 속도를 높였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제 놈들의 계획을 차근차근 짓밟아줄 생각이었다.
“참, 그리고.”
수용소를 빠져나가기 직전.
에스델이 그곳을 지키는 병사 둘에게 명했다.
“저놈을 훈련장으로 데리고 가. 적당한 때 개들을 풀어주고.”
“모두 풀어줄까요?”
“그래, 다섯 마리 전부.”
가치 없는 놈은 더 이상 필요 없다. 검은 투구단의 신념을 되뇌며 에스델이 사라졌다.
***
“새 시대를 부정하는 이들이 있다.”
연단 위에 서 있는 하일 데로니스가 모여든 귀족과 백성 앞에 목소릴 돋우기 시작했다.
에스델은 왕의 곁을 지켰다. 검은 투구단이 움직이고 있을 테니 이제 곧 레온 몬데이어를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놈은 오늘 밤 이곳에서 브라운 디카르테의 처형 소식도 듣게 되겠지.
“그대들은 이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고 있는가?”
새 왕이 손을 뻗어 무릎 꿇린 휴고 우딘을 가리켰다.
연단 아래서 우뚝 자리를 지키던 케인이 눈동잘 굴렸다.
예상대로라면 곧 브라운이 이곳으로 끌려올 예정이었다.
“이놈은 나의 시대를 거부했다.”
데로니스군 창병들이 번쩍이는 날붙이를 귀족들을 향해 겨누었다.
가장 앞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이들의 눈빛엔 두려움이 어른거렸다.
“감히 나, 하일 데로니스의 성안에 그놈을 끌어들였어. 겁도 없이.”
케인은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낯익은 눈동자를 찾았다.
모르는 이들은 알아보지 못할 테지만 워렌의 정체를 알고 있는 케인에겐 똑똑히 보였다.
용의 혈족이 누리는 푸른 눈동자가.
“레온 몬데이어. 폰네시의 후계자가 붙잡혔다!”
워렌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이라면 누구의 입을 통해서든 소식을 들었겠지만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드디어 전쟁을 끝낼 순간이 왔군.”
에스델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하일 데로니스는 이제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귀족들이 요란스레 술렁거렸다. 주변을 채우던 백성들도 안색이 창백해졌다. 폰네시의 후계자가 잡혔다니.
“내일 밤, 이곳에서 레온 몬데이어를 처형할 것이다.”
“…맙소사.”
“처형이라니!”
그건 기나긴 전쟁의 종지부를 의미하는 일이었고, 새로운 가이아를 꿈꿔온 이들의 바람이 무너지는 일이기도 했다.
“놈들의 욕심으로 더 이상 희생되는 자가 없도록….”
이미 크라운 캐슬은 데로니스군에 의해 장악됐다.
삼 년 전쟁 후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휴전을 벌이며 이 서대륙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더 이상 이 서대륙에 의미 없이 흘리는 피는 만들지 않겠다. 레온 몬데이어를 마지막으로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지!”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전장에서 수많은 군을 이끌고 곳곳을 누비던 때처럼 피로감에 물든 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게 무엇인지 완벽히 파악해냈다.
트레톨라 왕가의 후계자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 드러나지 않는다면.
먹고살기 바쁜 백성의 민심 따위 누가 크라운 캐슬을 차지하든 상관없을 게 분명했다.
“하나, 내게 반기를 든 자는 반드시 죽는다.”
맹수처럼 형형한 그의 눈동자가 처형장 아래 모여 있는 귀족들에게 향했다.
제 배를 불리기 위해 한 번의 기회조차 놓치지 않으려 두 눈을 부릅뜬 그들에게 경고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너희의 헛된 미래를 무너뜨려 주지.”
하일 데로니스가 뒤편에 서 있는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투구단이 묵직한 천을 뒤집어쓴 누군가를 끌고 오는 게 보였다.
“브라운 디카르테. 놈의 심복부터 죽여주마.”
천이 벗겨졌다. 짧은 갈색 머리가 사람들 앞에 드러났다.
디카르테라면 귀족들도 모를 수가 없는 이름 있는 가문이었다.
그 오랜 세월 몬데이어 공작가 곁을 바르게 지켜온 충신의 가문.
‘이런 젠장, 까딱하다간 정말 위험하겠는데?’
케인이 시선을 돌렸다. 워렌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아직 행동하긴 이르다. 케인이 입술을 씹었다. 긴장으로 마른 입술이 곧 찢어질 것처럼 짓이겨졌다.
‘움직이지 마.’
그에게 상황을 설명할 만한 시간은 없었다. 레온이 잡혔는지 안 잡혔는지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헨덱스는 조용했다. 그에게서 신호가 오지 않았단 건 적어도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뜻일 가능성이 컸다.
‘아직은 안 돼.’
케인이 워렌을 향해 눈짓했다.
부디 그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길 바라며.
“지금부터 처형을 시작하지.”
등 뒤에서 끔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인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