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112화 (112/133)

112화

18장. 처형식(7)

모든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검은 투구를 쓴 데로니스군이 험악하게 브라운을 매단 줄을 잡아끌었다.

“세상에, 정말로 처형을 하시려나 봐요.”

“이런… 디카르테의 죽음을 보게 되다니.”

주인공이 휴고 우딘에서 브라운 디카르테가 되었다는 것만 빼면 그곳에 모인 이들의 목적도 이미 분명했다.

처형을 지켜보는 것.

근 스무 해간 이루어진 적 없는, 하나의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특별한 의식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이곳 광장에 모여 있었다.

다만, 이제 그들의 가슴은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선 아직도 그분의 가르침을 신앙 삼아 살아가세요. 학자 바넷 디카르테 말이에요.”

“세상에 다시없을 성인들을 많이 배출해 낸 가문이니까요. 그런 사람들이 이곳에 아주 많겠죠.”

“이런… 지켜보기가 힘들어지겠군. 이 처형식은 말이야.”

많은 귀족가가 디카르테와 연관이 있었다.

그들은 몬데이어 공작가를 섬기고 따르는 집사 집안이기도 했지만, 걸출한 학자를 많이 배출해내 서대륙 내의 영향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새 왕이 만인 앞에 브라운을 세워두고 그 목을 틀어쥔 것만 해도 상징성이 있다는 증표였다.

“이를 어쩝니까.”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서 반란군이 속삭였다.

곁에 우뚝 서 있는 워렌을 향해서였다.

“에드먼드와는 연락이 닿았습니까?”

“아직…. 특별한 신호가 없는 걸로 봐선 우리가 판단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

워렌이 처형장 아래 서 있는 왕의 호위단을 살폈다.

엇비슷한 덩치들 사이에서 서 있는 폼만 봐도 익숙한 이가 하나 있었다. 바로 케인이었다.

“공자님은 붙잡히지 않았을 겁니다.”

열심히 신호를 주는 케인의 몸짓을 봐도, 또 데로니스군 전반에 퍼져 있는 분위기만 읽어도 놈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단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잡았다면 즉시 처형했을 겁니다. 구출할 시간도, 기회도 주지 않고요.”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오. 부집사의 목숨으로 공자님과 우릴 자극할 속셈이겠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일 데로니스는 아직 레온을 찾아내지 못했다.

레온은 분명 크라운 캐슬 내에서 제 몫을 해내고 있을 것이다.

“이제 어쩌시겠소?”

휴고 우딘은 이제 처형장 아래로 밀려나 데로니스군에게 붙잡혀 있었다.

쓸모없어졌다곤 해도 그 목숨을 살려두진 않을 것이다.

이건 마지막 기회였다. 어딘가로 끌려가기 전에 반드시 구출해야만 했다.

“작전을 변경해야겠습니다.”

워렌이 품 안에 지니고 있던 루시오의 검을 꺼내 들었다.

다이아 스틸로 만든 이 오랜 검은 이제 완전히 혈족의 힘을 되찾은 워렌의 손끝에서 묵직하게 힘을 내뿜고 있었다.

그가 움직이는 것만으로 주변에 무거운 바람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반란군 병사가 짧게 호흡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격이군.”

브라운은 레온의 사람이다.

여기서 잃는다면 레온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감정을 알게 될 것이다.

“반드시 되찾겠습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지.

워렌이 빠르게 군중 사이를 가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 안에선 폭발적인 살기가 들끓고 있었다.

***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끝에 다다르고 나서야 온몸에 긴장이 내려앉았다.

아치형 통로엔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걸 알리는 것처럼 먼지 한 톨 없이 횃불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적어도 에드먼드와 레온, 두 사람이 걸어온 길 외에 이곳을 오갈 수 있는 다른 통로가 있다는 걸 뜻하기도 했다.

“지금부터는 더욱 조심하는 게 좋겠어.”

에드먼드가 주의를 주었다. 레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입씨름이나 하며 미소 지었던 게 벌써 며칠 전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긴장으로 온몸이 뻣뻣해졌다.

“에드먼드, 물소리가 나.”

깊게 나 있는 지하 길을 따라 구불구불 홈이 패여 있었다.

아마도 시신들을 파묻었을, 예전에는 영면소가 자리했을 그곳에 서서히 물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레온은 부디 제가 걷는 바닥 밑에 누군가의 유골이 없기만을 바라며 생각을 지우고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집중했다.

“잊지 않았지? 내가 싸우는 동안 넌 제어소를 파괴해.”

데로니스군의 전투 방식은 이미 오래전에 파악했다.

그게 반란군이 주로 하는 일이었고, 그들과 관련된 정보는 하나도 빠짐없이 에드먼드 안에 있었다.

레온이 고집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과 싸우지 않는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이 가벼운 건 아니었다.

‘그 중요한 제어소를 손쉽게 파괴하도록 만들진 않았겠지.’

그 수로는 하일 데로니스에게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레이트 대협곡의 수위를 조절하는 방어 목적이기도 했으며, 감히 하이 레벨을 넘보지 못하도록 신분의 격차를 드러내는 우월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니 분명 쉽지 않을 거야.’

두 사람이 침착하게 매끄러운 돌바닥을 밟아나갔다.

빈 공간에 억지로 물을 채우며 생긴 결로 현상이 에드먼드의 신발과 작은 마찰음을 내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움직임이 금세 그 소리마저 감추긴 했지만 물 떨어지는 소리 외에 공간을 울리는 소음은 전혀 없었다.

“…아무도 없어.”

레온의 목소리가 복도에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긴장했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아무 소득 없이 손쉽게 영면소 한가운데에 도착했다.

“…….”

“…….”

수로 타워를 통제하는 제어소 역시 그곳에 있었다. 기대와 다를 바 없었다.

크기는 거대했고, 튼튼한 강철로 다섯 영역의 수문과 연결된 고리를 이어와 이곳에서 손쉽게 문을 열고 닫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인간들의 건축이나 시설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는 레온이 봐도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볼 만큼 간단한 구조물이었다.

‘어째서이지?’

에드먼드도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여전히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있어야 할 놈들이 보이지 않는다. 늘 이곳을 지키고 있어야 할 데로니스군이 어째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상해.”

사람이 없는 틈을 타 빠르게 일을 처리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쉽게 가는 길보단 확실한 길을 선호하는 타입이었다.

레온이 신호를 주었다. 주변을 경계할 테니 제어소를 살펴보라는 의미였다.

다행히 에드먼드가 곧바로 알아채곤 조심스럽게 근처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특별한 건 없는데….”

성인 남자 세 사람 정도를 세워놓은 듯한 크기의 제어소 주변엔 덫이랄지 눈에 띄는 의심스러운 함정 따위는 없었다.

폭발물이나 신체를 상하게 할 만한 위험 장치도 없었다.

단단한 강철을 구부러뜨릴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으로선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연결 이음새 부분만 건들 수 있다면 금방 부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건 큰 소리가 나는 일이었다.

에드먼드가 망가뜨려야 할 부분을 정확히 짚어 주면서도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난 저 복도 끝까지 다가가 살펴볼 테니, 아르테미스 넌 이걸 파괴해. 네 검으로 말이야.”

“내 검?”

“좋은 검이잖아?”

그 말을 하며 에드먼드가 레온의 두 눈을 정확히 응시했다.

눈빛 한 번에 손에 쥔 검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뭔가 알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에드먼드는 반란군이었다. 이 서대륙의 가장 많은 정보를 취급하는.

그러니 다이아 스틸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가봐, 에드먼드.”

이곳을 빠져나가면 물어볼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에드먼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횃불이 일렁거리는 복도로 나아갔다.

레온도 허리를 굽혀 제어소 부근에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수문의 개폐를 좌우하는 이음새 부분엔 여러 겹의 강철이 둘러싸여 있었다.

아무리 힘이 좋은 남자가 달려들어도 풀어낼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내 검으로 내려치면 가능할까?’

푸른 검은 여전히 뜨겁고 묵직했다. 몸 안 구석구석을 돌고 있는 인어의 힘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저주받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레온으로선 저릿한 손바닥만 쥐었다 펴며 제 상태를 가늠할 뿐이었다.

‘일단 해보자.’

달리 방법이 없다. 레온이 다이아 스틸로 만들어진 푸른 검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짧게 호흡하자 편안하게 늘어져 있던 몸의 근육들이 촘촘히 자리 잡히는 게 느껴졌다.

레온이 머리 위로 두 손을 들었다. 평소보다 묵직한 검을 그대로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복도 위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빠르게 달려오는 발소리였다.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돌 벽을 메운 자잘한 흙무더기가 조금씩 비처럼 내려앉았다.

“아르테미스!”

상황을 주시하던 에드먼드가 빠르게 되돌아왔다. 그는 이미 검을 빼어들고 있었다.

“내려쳐, 어서!”

곧장 양쪽에서 데로니스군이 밀려들었다. 에드먼드와 놈들이 검을 겨루는 소리가 아주 빠르게 귓가에 닿았다.

레온은 지체 없이 곧바로 검으로 이음새를 내려쳤다.

아무리 단단한 강철이라 하더라도 다이아 스틸을 이겨낼 건 이 세상에 없다.

첫 번째 이음새가 벌어졌다. 레온이 다시 한번 강철로 만들어진 고리를 내려쳤다.

강력한 반동이 그대로 레온의 손에 머물렀다. 어깨가 빠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세 개 남았어!”

빠르게 돌아보니 에드먼드는 잘 싸워주고 있었다. 데로니스군 여럿이 달려들어도 끄떡없는 실력이었다.

그의 몸은 너무 빨라서 마치 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음먹은 대로 벽을 딛고 놈들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순발력이 있었다.

레온이 다시 검을 붙잡았다. 이제 검은 조금 전보다 두 배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고통을 겨우 참으며 레온이 다시 이음새를 내려쳤다. 순간 귓가에 큰 파열음이 들리며 시야가 흐려졌다.

“으, 으윽.”

고통에 겨운 그 소리에 에드먼드가 돌아봤다.

검으로 바닥을 짚고 주저앉은 레온은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아르테미스!”

이상하다. 눈앞에 보여선 안 되는 것들이 보였다.

울렁거리는 시야가 뒤집어지며 순간 바다 한가운데에 있었다.

에드먼드의 외침과 데로니스군의 고함이 찰박거리는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환각과 환청이다. 전에도 한번 경험한 적이 있는 지독한 신경 교란이었다. 이건….

‘독향료…?’

레온이 겨우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 순간에도 몇 번이고 바다에 잠겼다 겨우 숨을 토해내는 듯 주변이 울렁거렸다.

“정신 차려, 아르테미스!”

에드먼드가 빠르게 다가오는 적의 목을 그어냈다.

사방에 피가 튀고 파열음이 정신없이 울려 퍼졌다.

레온은 바다 한가운데서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살기를 끌어올리는.

‘그놈들이다.’

레온이 휘청이며 겨우 주변을 벗어났다. 달려든 데로니스군 전부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에드먼드의 검 끝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레온이 진동하는 피비린내 속으로 다가갔다.

어지러운 시야와 모든 감각이 흐려진 속에서도 다가오는 기운이 느껴졌다.

태어나면서부터 수천 년간 익힌 기운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에드먼드….”

그놈들이 오고 있었다. 검은 투구를 쓴… 사냥개들이.

“지금부턴 내가 해.”

“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복도 양 끝에서 검은 투구단이 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들은 라피스를 지니고 있다. 에드먼드가 상대할 수 있는 힘을 벗어났다.

레온이 곧장 에드먼드를 검으로 밀어냈다. 다이아 스틸에 밀린 에드먼드가 균형을 잡기도 전에 레온이 등불을 손에 쥐었다.

“아르테미스, 너… 뭐 하는 거야?”

“제어소 파괴는 네가 해야 할 것 같다, 에드먼드.”

미약한 유리등을 손으로 깨부수자 그 안에 일렁이던 작은 불이 레온의 손을 타고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할 수 있지?”

대답은 필요치 않다.

레온이 검은 투구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틀어쥔 검 끝에서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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