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19장. 불의 춤(1)
이런 날이 오기를 아주 오랜 시간 간절히 바랐다.
지켜야 할 인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때마다 항상 바랐던 일이다.
루시오가 그 지경으로 능욕당했을 때도, 폰네시의 영지민들이 모조리 불타 죽어버렸을 때도.
‘절대 살려두지 않아.’
손끝에서 퍼져나간 불은 피를 타고 흐르는 혈족의 힘으로 불씨를 살려냈다.
볼품없이 깨진 유리 조각이 손바닥에 작은 상처를 냈다.
피를 머금은 불꽃은 화마가 되어 공간을 집어삼킬 것처럼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아주 오래전부터 바랐어… 너희를 죽일 수 있길.’
레온이 놈들에게 다가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불이 타올랐다.
그건 꺼질 수 없는 불이었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쌓아온 분노가 불길로 되살아났다.
“나 하나쯤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착각이야.”
통로 안쪽 제어소가 위치한 공간은 이미 불길에 가로막혀 있었다.
놈들은 에드먼드에게 갈 수 없다. 상대할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넘어갈 수 있다면 넘어가 봐. 그 전에 저 불이 너희 몸을 잿더미로 만들겠지만.”
허세가 아니었다. 불길은 지하 공간 전체를 지옥처럼 만들고 있었다.
그 안에 갇혀 있을 에드먼드가 살짝 걱정되었지만 레온은 정신을 집중하기로 했다.
‘곁에 물길이 있으니 탈출은 가능할 거야. 적어도 제어소를 모두 무너뜨린 후에는.’
책임감이 강하고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있을 테니, 에드먼드의 걱정은 뒤로 밀어둘 때였다.
레온이 다시 한 발자국 다가갔다. 뒤편에 서 있던 놈들도 그만큼 레온에게 검을 겨누고 가까이 다가왔다.
좀처럼 멀어지지도 좁혀지지도 않는 간격이었다. 마치 운명처럼.
“모두 계획대로 한다.”
“수로를 이용해 불을 잡는다. 서둘러!”
명 한 번에 검은 투구단이 곧장 레온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렵했다. 등 뒤에 도사리는 불길에도 거침이 없었다.
‘라피스를 믿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이미 펠릭스 왕세자를 통해 혈족의 힘을 모두 엿본 후였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나약한 해주는 이제 없다.
혈족의 힘과 라피스, 그리고 다이아 스틸이 있는 이상 무력하게 잃는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내게서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어.’
이 불길 하나마저도.
레온이 검을 뻗었다. 그러자 가장 앞에 있던 사냥개가 번쩍거리는 검으로 레온을 마주했다.
왜소한 체격에 이런 힘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일격 한 번에 사냥개가 밀려났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담은 다이아 스틸은 전보다 더 강력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다 죽어. 모조리. 전부!’
레온의 검이 가장 앞선 놈의 심장을 찔렀다.
워렌이 일러준 대로 중앙을 기점으로 파고들며 왼편에 강한 힘을 주었다.
사선 방향으로 내리꽂히는 푸른 검에 가장 앞에 있던 사냥개 놈이 단말마도 내지르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레온의 몸은 이미 살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수천 년 묵은 분노와 혈족의 힘이 그 연약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한 사람씩은 안 돼. 한 번에 놈을 제압해라!”
아무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불꽃을 담은 레온의 검이 전부에게 닿았다.
단단한 갑옷도 놈들을 지켜주진 못했다. 그들의 심장에 푸른 불이 박혔다.
다이아 스틸은 그 무엇이라도 뚫을 수 있다. 레온의 몸 안에 날뛰는 라피스와 용의 살기가 그걸 가능하게 해주었다.
‘뜨거워, 너무… 너무 뜨거워.’
폭주의 영향으로 온몸이 불탈 것처럼 뜨거웠다.
그 열기에 제가 먼저 질식할 것처럼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그러기엔 놈들을 마주하고 심장을 갈라내기까지 고대한 시간이 너무도 길었으니까.
고통 따위는 가뿐히 잊고 없앨 수 있을 만큼 이건 레온이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다.
사냥개 놈들의 생명을 모두 거두어 버리는 일.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지난날의 고통이 놈들의 비명으로 터져 나왔다.
“으, 으윽!”
“뒤쪽 먼저 공격해라! 불길 너머에도 적이 있다!”
“불길이 안 잡힙니다. 갈 수 없습니다!”
“이런 젠장!”
용의 피로 만들어진 불은 꺼뜨릴 수 없다.
그들은 레온의 등 뒤에서 일렁이는 불을 보며 원초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살기와 버무려진 불꽃은 인간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것이었다.
자연히 온몸이 굳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얼어붙은 놈들이 사신처럼 다가오는 레온을 바라봤다.
“사, 살려줘….”
새빨간 피를 삼킨 불은 점차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복도 통로를 따라 거대한 불길이 사냥개들을 몰아세웠다.
뒤편에 서 있던 놈들은 이미 불 속에서 재로 남은 지 오래였다.
“모두, 후퇴하라!”
검은 투구단이 맞서기에도 폭주하는 레온의 기세는 감당이 어려웠다.
살기와 뒤섞인 생명의 기운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힘을 앗아갔다.
이길 수 없다. 그들은 고작 작은 라피스 한 조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니 더더욱 그랬다.
“서둘러! 통로를 무너뜨릴 순 없다!”
“킹덤힐로 간다! 모두 대열을 정비해!”
결국 검은 투구단이 대열을 맞춰 뒤돌았다. 이곳은 크라운 캐슬의 지하 전역과 연결돼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로 크라운 캐슬 전부를 무너뜨릴 작정이 아니라면 킹덤힐까지 놈을 끌어들여야 했다.
“하지만 광장엔 폐하께서….”
“폐하의 곁엔 에스델 님과 정예 병단이 있다. 서둘러. 이대로 이곳을 모두 불태울 순 없어!”
아니, 그럴 순 없을걸.
“으윽, 읍!”
레온이 뒤돌아서는 놈들의 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불꽃을 머금은 검은 그대로 사냥개들을 그 자리에 한 사람씩 주저앉혔다.
“아무도 못 도망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이 어둡고 컴컴한 곳에서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게.
너희들이 우리에게 그랬듯, 네놈들이 내 일족을 멸망으로 몰아넣었듯 영원히!
“으아아아아!”
“끄윽! 으!”
레온의 살기가 놈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푸른 불꽃이 곧장 놈들의 심장을 가르고 목숨을 앗아갔다.
툭, 투둑.
놈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원하는 만큼 놈들을 불로 뒤덮고 나서야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레온이 흐린 시야로 지옥이 된 주변을 살폈다.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불의 흔적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어.”
이 길 끝에 킹덤힐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 하일 데로니스가 있었다.
“모조리 불태울 거야….”
아직 끝나지 않았다.
레온이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쥐고 나아갔다.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
“그, 급습이다!”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너도나도 빠져나가기 위해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워렌과 반란군이 때를 놓치지 않고 처형장 근처까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폐하를 보호하라!”
“인질들의 신변도 확보해라. 놓쳐선 안 돼, 반드시!”
에스델이 검을 뽑아 들고 가장 먼저 하일 데로니스의 곁을 지켰다. 그녀의 곁엔 황금 갑옷으로 무장한 왕의 호위단도 함께했다.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이번엔 피하지 않는다. 내 손으로 저놈들의 목숨을 끊어놓겠어!”
왕 역시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가 데로니스의 보검을 꺼내들었다.
지난 연회에서도 한번 선보인 적이 있는 다이아 스틸로 만들어진 검이었다.
“내가 좌측으로 빠지겠소!”
반란군 병사의 외침과 함께 그들이 사전에 약속한 대로 양쪽에서 데로니스군에게 달려들었다.
워렌이 향할 곳은 정면뿐이었고, 그곳에 브라운이 붙잡혀 있었다.
에스델의 날카로운 눈빛이 정확히 워렌을 응시했다.
‘놈을 노리고 있어!’
달려드는 이가 몬데이어 공작가의 호위 기사 놈일 거란 예상은 적중했다.
그가 되찾으려 하는 게 부집사일 거란 예측 역시 확실했다.
에스델이 턱 끝으로 명령했다. 그를 호송해온 검은 투구단 정예병들이 곧바로 브라운의 주변을 가로막았다.
“절대 빼앗기지 마라. 그놈은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죽어야 해!”
난리 통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귀족들에게 다시 불안감을 심어주고 충분한 위협이 되어줄 테니까.
에스델이 양측에서 고전하는 데로니스군과 반란군의 충돌을 살피며 새 왕의 곁을 지킬 때였다.
“끄아아악!”
“물! 물이 밀려든다!”
“도망쳐!
먼 곳에서부터 사람들의 비명이 다시 터져 나왔다.
그건 두려움과 놀라움이 반반 뒤섞인, 처음 듣는 유형의 괴음이었다.
“수로…!”
강력한 폭발음이 연쇄적으로 들렸다. 먼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였다.
오래지 않아 빠른 속도로 밀려오는 물소리가 들렸다.
견고하게 쌓아놓은 수로 타워 곳곳에 물이 거세게 부딪치며 점차 장벽을 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투구단 정예 오십을 보냈는데!’
그들은 체력부터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괴물이었다.
작은 라피스 하나에도 뛰어난 전투 능력을 지니고, 동물적인 반응 속도로 공격에 특화된 놈들이었다.
한데, 어째서!
“폐하! 모시겠습니다!”
왕의 호위단이 모두 하일 데로니스를 보호했다. 수천 번도 넘게 이런 상황에 대비한 몸이었다.
전부 쉬이 뚫을 수 없는 갑옷으로 촘촘히 방어벽을 구축하고 왕을 보호했다.
“저자를 조심해라. 함부로 덤벼들지 마. 반드시 폐하를 보호한다!”
에스델이 이제 코앞까지 달려온 워렌을 바라보며 검을 움켜쥘 때였다.
“이야아압!”
왕의 호위단 중 한 녀석이 검을 뽑아들어 곧장 하일 데로니스를 위협했다.
등 뒤에서 그를 감싸 안고 그의 턱 밑에 날붙이를 들이대었다. 이미 검 끝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지금입니다!”
놈의 외침에 브라운의 곁을 봉쇄하고 있던 검은 투구단이 일시에 하일 데로니스를 향해 검을 들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꼴이 좋구나, 하일 데로니스!”
검은 투구 안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는 에스델도 익히 알고 있는 놈이었다.
“헨덱스, 감히 네놈이!”
“에스델, 왕을 지켜야 하지 않겠나? 이럴 시간 따위 없을 텐데.”
검은 투구단, 아니, 은백의 그림자들이 모두 브라운을 지키고 보호했다.
그의 등 뒤에서 왕의 목을 위협하고 있는 케인은 숨 하나 허투루 쉬지 않았다.
호흡을 정돈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우위를 빼앗길 수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왕의 호위단은 하일 데로니스의 목을 노리고 있는 케인에게 모두 검을 겨누었다.
그 앞에 대치 중인 검은 투구단, 아니, 은백의 그림자들은 에스델과 호위단을 노렸다.
누구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순간, 워렌이 처형장 위를 빠른 속도로 올라섰다.
“지금부턴 내가 하지.”
워렌의 검엔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강력한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다이아 스틸이 데로니스의 턱 밑에서 번쩍거렸다.
“…네놈들이 감히.”
하일 데로니스가 비참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처형대 아래, 먼 곳에서부터 물길이 넘쳐흘렀다. 이 크라운 캐슬을 떠받쳐야 할 덴버그가 그곳에 잠기고 있었다.
수많은 백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가장 높은 킹덤힐, 그리고 이곳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그곳을 통제하는 데로니스군의 검과 창은 백성들을 향해 있었다.
견고하게 쌓아 올린 건물은 무너지고 사람들의 비명은 물길에 떠내려갔다.
‘…이런.’
인파 속에 뒤섞인 귀족들의 경멸 어린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처형대 위에 보호받는 이와 위협당하는 이가 분명했다.
덤벼든 대부분은 죽고 없었지만, 데로니스군의 제압은 방향을 잘못 정했다.
‘누구의 처형대인지 모르겠군.’
하일 데로니스가 꼼짝없이 제가 판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됐다.
“…저기.”
그때껏 꼼짝없이 이 상황을 지켜보던 브라운이 손을 뻗었다.
“푸른 불입니다.”
하일 데로니스의 등 뒤, 모두가 바라보는 정면 앞의 크라운 캐슬 위로 푸른 화마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공자님.”
이곳에서 저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
“레온 공자님입니다!”
은백색 머리칼의 푸른 눈동자.
유일한 몬데이어 레온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