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19장. 불의 춤(2)
지하에서 시작된 불은 왕가의 사저를 모두 집어삼켰다.
크라운 캐슬 내 가장 깊은 곳부터 드래곤의 불이 점차 번져가고 있었다.
“…….”
“…….”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레온의 등장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불씨가 길을 내주었다. 레온의 몸엔 작은 흠집 하나 머무르지 않았다.
모두가 거짓 같은 상황에 입을 틀어막았다.
불길 속에서도 자유로운 모습은 오래된 신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자님.”
브라운이 레온을 살폈다.
이미 소하에서의 일로 용의 혈족이 불속에서 자유롭단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세한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레온 역시 그 피를 이어받았으니 다치지 않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공자의 상태가 이상했다.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는 탁하게 물들었고, 안색은 평소보다 창백했다.
무엇보다 멈추지 않았다. 검 끝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멈출 기미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이곳 전부가 불타고 말 거야.’
단 한 사람만으로도 수천, 수만의 목숨을 탈할 수 있는 힘은 제어되지 않는 폭발적인 살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대로라면 이곳에 모인 전부가 그 힘에 질식해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힘을 사용하는 레온에게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공자를 구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시선을 돌려야 한다.
“폰네시는 잃었지만!”
브라운이 군중을 향해 돌아섰다.
시선을 빼앗겼던 모두가 브라운의 말에 귀 기울였다. 검을 겨누고 있는 적들도 모두.
“우리의 몬데이어는 아직 여기 있습니다.”
폰네시가 주는 상징성이나 그들의 행보를 생각해 본다면 이는 중요한 가치였다.
다른 대안이나 선택지가 없어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
“몬데이어가 살아 있는 한, 그 어느 곳이라도 폰네시가 될 수 있습니다.”
폰네시는 이미 영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선대 몬데이어는 다섯 영지를 하나의 영역으로 모아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수많은 이들이 몬데이어의 뜻 아래 긴 시간 동안 평화를 누렸다.
서대륙도 다시 그렇게 될 수 있다. 몬데이어의 힘 아래 흩어졌던 세력을 하나로 모아 더 큰 발전을 이룰 수도 있었다.
그건 사람들을 버티게 하는 희망이 되었다.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브라운의 외침 끝에 귀족들이 흘긋거리며 서로를 살폈다.
지난 며칠간 보여줬던 하일 데로니스의 위압적인 자세는 무척이나 불쾌하고 따르기 어려웠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만인 위에 군림하려는 왕의 모습은 각지의 영주들로서, 영향력 있는 귀족들로서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폰네시를 다섯으로 다시 나눈댔지? 누구의 허락도 없이.”
“최측근인 슐츠와 이그리아의 대영주들에게 동북부 진출을 허용할 셈이겠죠.”
“…결국엔 우리의 모든 걸 빼앗기게 될 거야.”
“가진 것 전부. 내 식구들까지 모조리!”
이제 귀족들 사이에선 서슴없이 분노가 터져 나왔다.
새 왕의 손에 이 서대륙이 넘어가면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이란 불안과 두려움이 치를 떨게 만들었다.
“우릴 구해주지도 않았어….”
“내 집이 저기 떠밀려 가는데.”
“왕이 만든 저 수로 때문에!”
백성들도 동요했다.
물난리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에게 중요한 건 왕권 따위가 아니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게,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게 크라운 캐슬의 새 왕이라면 그에 대한 충성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이 주변을 통제하는 데로니스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귀족들도 더 이상은 참지 않았다.
덴버그 내에 대기하고 있던 그들의 개인 병력이 주인을 구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순식간에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에스델! 언제까지 허튼소리를 떠들게 내버려 둘 셈인가!”
하일 데로니스가 격분하여 검을 움켜쥐었다.
더 이상 몬데이어 놈이 왕의 영역에서 설치고 있는 꼴은 두고 볼 수 없다.
누구도 용서할 수 없었다. 이곳에 모인 전부를!
“대응하라, 가치 없는 자들이다!”
그의 엄포 아래 검은 투구단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에스델도 제 보검을 들고 케인을 노렸다. 왕의 목을 겨누고 있는 워렌은 그를 돕지 못한다.
에스델이 온 힘을 다해 케인을 노리는 순간, 하일 데로니스가 워렌의 검을 밀어냈다.
거대한 몸집으로 완벽하게 몸을 뒤틀어 워렌의 검을 피해 그와 맞섰다.
다이아 스틸끼리 충돌했다.
워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의 검에서도 지독한 살기가 방출됐다.
‘혈족의 힘을 얻었어. 용의 심장인가!’
워렌은 손끝으로 전해지는 그의 힘을 느꼈다.
몸에 흐르는 기운은 용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같다고도 볼 수 없었다.
‘이게 무슨 힘이든 상관없어.’
워렌은 그의 강한 완력과 엇비슷한 수준의 살기, 미래를 내다보는 듯한 재빠른 움직임에도 데로니스를 놓아주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 잡으면 된다.
하일 데로니스만 죽일 수 있다면 모든 걸 끝낼 수도 있으리라.
“공자님!”
그때 브라운이 저를 보호하는 은백의 그림자들 사이에서 소리쳤다.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이제 그 주변을 메운 푸른 불길은 레온의 모습을 감춰 보여주지도 않았다.
이대로 두면 레온은 죽는다. 브라운이 앞뒤 가릴 것 없이 레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은백의 그림자들이 검은 투구단과 맞부딪쳤다.
“놈을 놓치지 마라!”
“내 검이 시시한 모양이지? 집중하지 않으면 다치게 된다고!”
“으, 윽!”
시선을 돌린 에스델을 향해 케인이 검을 내뻗었다.
오른 어깨 깊은 곳을 베어내고 나서야 에스델이 그를 바라봤다.
적을 눈앞에 두고 다른 곳을 신경 쓰는 건 옳지 않은 일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폐하께선 모든 걸 잃게 될 거야.’
왕의 호위단과 검은 투구단, 그리고 데로니스군 전부가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외부에서 반란군이 진을 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력을 이곳에 집중시키는 건 한 번에 전부를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 끝날 수도 있어!’
에스델이 케인의 묵직한 검을 받아내며 겨우 주변을 살폈다.
왕의 앞을 가로막고 그와 검을 겨루고 있는 워렌이 가장 걸림돌이었다.
그의 힘은 제 손이 떨릴 정도였다. 다크탄이라면 모를까, 놈의 실력을 당해낼 수 있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왕이 죽게 된다.
모든 걸 걸고 지켜온 전부를 잃게 될지도 몰랐다.
제 세상의 전부를!
“폐하!”
결국 에스델이 케인에게 등을 내보였다.
케인의 검이 때를 놓치지 않고 벌어진 갑옷 사이에 곧장 내리박혔다.
“으윽!”
신경까지 끊어진 것처럼 순간 눈앞이 새하얘졌다. 하지만 이대로 쓰러질 순 없다.
에스델이 이를 악물고 하일 데로니스의 곁으로 달렸다.
처형대 아래는 이미 놈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불길에 병사들은 접근조차 못 하고, 귀족들은 상황을 나 몰라라 하며 모두 그곳을 떠났다.
남아 있는 백성들만이 반란군을 도와 데로니스군과 대치하고 있을 뿐이다.
‘이대로는 안 돼. 절대!’
왕의 호위단과 검은 투구단 열셋이 워렌의 검을 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하일 데로니스가 은백의 그림자들을 무참히 베어냈다.
죽음의 공포를 머금은 검무는 처형대 위의 왕을 미치광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폐하! 안 됩니다!”
뒤쫓아 오는 케인의 검을 다시 한번 막아내고서야 에스델이 몸을 내던졌다.
“부디 용서하세요!”
“에, 에스델…! 크읍!”
왕에게 달려간 그녀가 누구도 몰래 데로니스의 허리춤을 깊게 찔렀다.
주요 장기와 근육을 피했다 하더라도 그 깊이가 엄청났다.
왕이 울컥, 피를 토하며 무릎을 접었다. 주저앉은 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에스델을 살폈다.
“지금은 이 방법뿐입니다. 부디 저를 믿으세요, 폐하.”
온몸이 뜨거웠다. 눈앞에 벌어진 불꽃이 이제는 성을 전부 뒤덮을 것처럼 덩치를 부풀리고 있었다.
덴버그는 지옥 그 자체였다. 죽어서도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에스델이 소리쳤다.
“놈이 왕좌를 노린다!”
이 모든 상황에서 이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에스델이 눈 감은 하일 데로니스를 끌어안고 소리쳤다.
“몬데이어 공작가의… 반역이다!”
***
몸을 타고 흐르는 건 하나도 남김없이 끓어올랐다.
화염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걸 불태우고 의식을 전부 앗아가기 시작했다.
레온은 빈껍데기만 남은 공간 속에서 흐린 시야 밖을 살폈다.
“…….”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검과 창이, 날카로운 그것들이 사람들의 몸을 헤집는 게 보였다.
끝났다. 영원한 생명을 지닌 인어도 아닌 주제에 이처럼 날뛰었으니 더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레온은 더 이상 힘을 내지 않았다.
털썩, 다리부터 잿더미 속으로 가라앉았다.
기운을 내 살아야 할 이유가 지금 당장엔 아무것도 없었다.
“공자님!”
불길을 가르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래봤자 이 불 속에 몸을 내던질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공자님, 모두 끝났습니다. 다 끝났어요.”
목이 뜨거운 공기에 메말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입 안을 축이고 원하는 대답을 할 만큼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레온이 간신히 눈꺼풀을 느릿하게 떴다. 피 묻은 워렌의 턱이 단단해지는 게 보였다.
“워렌 경! 공자님의 상태는….”
“괜찮아, 부집사.”
워렌이 레온을 안아 들고 불꽃 밖으로 나서며 답했다.
피어오른 매캐한 연기가 사람들의 얼굴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레온은 의식이 꺼져가는 순간 속에서도 일행들을 찾았다.
‘모두 돌아왔구나.’
워렌의 품에 안겨 걱정 어린 브라운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의 뒤엔 반란군의 보호를 받고 있는 메리가 벨을 안고 있었다.
케인도 주변을 경계하며 대열에 합류했다. 적과 겨루느라 어깨 한쪽에 부상을 입긴 했지만 걷고 뛰는 덴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모든 물이 방류되어 협곡까지 가는 길이 생겼어. 준비한 배를 타고 상류 초입까지만 빠르게 진입하면 될 거야.”
에드먼드가 반란군과 은백의 그림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검은 머리칼은 짙은 재를 여기저기 묻히고도 티 내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볼 때에야 공중에 흩날렸을 뿐이다.
“아르… 아니, 레온.”
레온의 머리칼은 이제 본래의 것으로 드러나 있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크라운 캐슬을 누비던 아르테미스는 이제 없었지만, 레온은 해명할 의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불이 가림막이 되어 주겠지만 곧 있으면 주변이 가라앉을 거예요.”
불을 터뜨려대던 레온이 힘을 잃었으니 더 이상 꺼지지 않고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게 아무리 드래곤의 힘이라 하더라도.
게다가 덴버그의 절반은 이미 물에 잠겨 있었다. 불만 믿고 있기엔 환경이 좋지 않았다.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브라운과 에드먼드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나섰다.
이번 습격으로 크라운 캐슬의 중심부가 모두 전소됐고, 덴버그 절반이 물속에 가라앉았다.
드래곤의 불길은 지금도 남아 있는 데로니스군과 맞서고 있었다.
비록 그들의 손에 반란군 열넷 중 네 명을 제외한 열이 목숨을 잃었지만 모두 각오한 일이었다.
“우린 이곳에 남아 시간을 벌겠소.”
이제 절반밖에 남지 않은 은백의 그림자들이 멈추어 섰다.
등 뒤에선 빠르게 따라붙는 적들의 말발굽 소리가 이어졌다.
이대로 모두가 이곳을 빠져나가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일행들이 안전하게 떠나기 위해선 맞서 싸울 이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공작께선 구제 불능인 내 인생을 구원했지. 난 그분께 평생의 명예를 바쳤소.”
헨덱스가 은색 배지를 그러쥐고 쓰러진 공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 이젠 내가 그분이 지키려던 공자님을 구원하겠소.”
부디 다시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비아로 오시오. 그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내 반드시 찾아가지!”
살아남아 온 힘을 다해 긍지를 지킬 것이다.
헨덱스가 레온의 손등에 숨을 불어넣고 곧장 뒤돌았다.
그들이 점점 꺼져가는 불길 속으로 나아갔다.
“출발한다!”
에드먼드의 외침에 일행들이 서둘러 덴버그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은백의 그림자들과는 반대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