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115화 (115/133)

115화

19장. 불의 춤(3)

크라운 캐슬 내 왕의 접견실.

길라의 영주, 막심 크루네가 그곳에 앉아 주변을 채우는 서대륙의 소식들을 하나씩 새겨들었다.

“그레이트 대협곡으로 달아났다고?”

“물자 호송선을 타고 곧장 방류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놈들이 그곳까지 달아나는 동안 잡을 시간은 충분히 있었을 텐데.”

“군 내 침입한 외부 세력이 막아서 시간을 벌었습니다.”

“루시오의 충직한 개들 말인가?”

“예, 검은 투구단이 투입되어 그들 전부를 몰살했지만… 적들은 이미 떠난 직후였습니다.”

이런 제길!

데로니스 왕가의 왕세자 펠릭스가 분노를 곱씹었다.

접견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받는 통에 막심 크루네도 레온의 상황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공자께서 무사히 빠져나가셨군….’

펠릭스와 그의 시종장이 몇 마디 더 나누는가 싶더니 대화를 마무리 짓고 이내 왕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막심 크루네는 줄곧 서 있던 모습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미래의 왕을 대하는 충직한 모습이었다.

“좀 늦었다. 들었다시피 일이 발생해서.”

펠릭스는 너무도 당연하게 막심 크루네를 아랫사람으로 여겼다.

왕에게 길라의 영지를 증표로 충성을 바치고 영원을 약속했으니 당연히 제가 누려도 될 권리라 생각한 것이다.

“아닙니다. 그보다 폐하께선 괜찮으십니까?”

“심각한 부상은 아니야. 하지만 삶을 많이 소모했으니 회복이 더딜 수밖에 없으시겠지.”

막심은 왕세자가 어쩌면 새 왕보다 왕위를 더욱 간절히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렇게 말하는 펠릭스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하나도 묻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버지가 쓰러지셨으니 왕의 대리인으로서 일을 마무리 짓겠다.”

“예, 펠릭스 저하.”

모든 귀족이 하루 전 습격으로 덴버그를 떠나거나 여관에 몸을 숨겼다.

하나 막심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 아직 영지의 전권을 넘기는 서약이 남아 있었다.

“교류가 있었을 테니 백작도 그놈을 본 적이 있겠어.”

서약서에 서명하며 펠릭스가 흘끔, 막심을 살폈다.

이제 영지의 권한을 결정하는 종이는 다시 막심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레온 몬데이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어렸을 때 몇 번 본 게 다입니다. 근래엔 기회가 없었습니다.”

“흠, 그런가? 다 크고 나선 전혀 본 적이 없었어?”

“예, 공녀의 영면 이후 성문을 걸어 잠갔기에 최근 몇 년간은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음,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겠군.”

막심도 서명을 마쳤다. 이제 길라의 모든 전권은 데로니스 일가에게 넘어갔다.

지난 시간 오래도록 그곳의 주인이었던 크루네 백작가는 더 이상 손에 쥔 것이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몰라본 거겠지. 그놈이 여장을 하고 이 크라운 캐슬에 들어온걸!”

왕세자는 여태껏 레온에게 당한 일을 곱씹고 있었다.

감히 여장을 하고 제게 그런 치욕을 겪게 하다니.

게다가 그런 줄도 모르고 놈을 욕보이려 했으니 도저히 분노가 참아지지 않았다.

“이탈한 가문은 몇이나 되는지 알아냈나?”

분노를 풀어낼 곳이 필요했다.

펠릭스는 막심에게 감히 이 덴버그를 떠난 가문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해 오란 명을 내렸다.

시종들이나 할 만한 가벼운 일을 새파랗게 어린 왕세자에게 보고해야 하는 게 유쾌하진 않았으나 막심은 충실히 따랐다.

“몬데이어 공작가와 연관이 깊은 동부의 소영지 가문 몇이 떠났고, 그 외엔 모두 덴버그에 남아 있습니다.”

“월랜드의 군주도 떠났나?”

“예, 그자와 남부의 밴디록스 백작도 새벽빛이 밝자마자 이곳을 떠났습니다.”

“자력으로 버틸 힘이 있다는 건가? 콧대가 지나치게 높군!”

서대륙 내 최대 규모의 상단 가문인 밴디록스 일가가 등을 돌린 건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속단하긴 이르다.

놈들이 레온을 따르기 위해 배반을 택한 건지, 아니면 안전을 위해 빠져나갔는지는 차차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놈들은 용서할 수 없다.

분노를 곱씹던 펠릭스가 결국 의자를 물리고 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설명 없이 사라지는 그 뒷모습에 막심이 서둘러 서약서를 챙겨들었다.

“어디 가십니까?”

고민은 짧았다.

펠릭스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사냥.”

떠나는 펠릭스의 눈빛엔 분노가 이글거렸다.

***

지난 며칠간 문제의 주 무대였던 홀 내부에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상황 수습을 위해 이곳에 모였거나,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보호를 요청하며 들어온 이들이었다.

“레온 몬데이어… 그자의 모습을 보셨어요?”

문제의 날.

광장 한가운데서 타오르는 레온을 똑똑히 봤던 한 귀족 부인이 부채질을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생각만으로도 여태껏 심장이 벌렁거렸다. 창백한 안색의 그녀가 다시금 레온을 떠올렸다.

“분명… 푸른 불이었어요.”

불꽃 속에서 걸음을 내딛던 레온의 모습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지나온 모든 것을 잿더미 속에 가두고 불의 몸집을 부풀렸다.

등 뒤에서 무너져 내리던 크라운 캐슬에도 레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치 불의 신이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눈속임을 한 게 아니겠소?”

“폐하를 위협하려는 용도였겠죠. 보통 사람이라면 불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게 불가능하잖아요.”

“애초에 푸른 불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직까지도 성 내부 곳곳에 탄내가 진동을 했다.

그중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바로 탈출로와 연결되어 있던 왕의 침실이었다.

하일 데로니스는 중상을 입고도 안식처로 돌아가지 못했다.

왕가의 사저가 전소했기 때문에 왕비나 펠릭스 왕세자의 사정도 좋지 못했다.

한동안 시종과 시녀들이 발바닥에 불이 나게 중요한 물품을 수습하러 돌아다녀야만 했다.

“사기꾼이 아니라 어쩌면 상상 이상의 힘을 가진 특별한 존재일지도 모르죠….”

중앙 귀족 한 사람이 깊은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애초에 술사도 아닌 이상에야 그만한 규모의 거짓 환영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없었다.

게다가 푸른 불꽃이라면….

아주 먼 옛날 그와 관련된 연구를 진행했던 적이 있어 의심되는 정황 몇 가지가 있었다.

“특별한 존재라뇨?”

“뭐, 그자가 신의 계시라도 받았단 말입니까?”

무릇 여러 사람이 모이면 한 가지 주제에도 다양한 의견이 점철돼 부풀려지게 마련이다.

전과 다른 색다른 시각에 귀족들이 궁금증을 나타낼 때였다.

쾅!

맞이할 준비도 마치지 못했는데 넓은 문이 활짝 열리며 왕세자 펠릭스가 빠른 속도로 들어섰다.

그 뒤엔 폰네시의 새 영주 후보로 가장 경계를 받는 길라의 막심 크루네가 있었다.

“모두들 물러서라.”

펠릭스는 당연한 듯 연단 위로 올라섰다.

왕이 자리를 비웠다곤 하나 왕권을 넘겨받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펠릭스는 그런 것 따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놈을 들여와.”

“예, 저하.”

이곳으로 오는 동안 펠릭스는 데로니스군에게 명을 내렸다.

수송용 말 훈련장 내에 감금되어 있는 반역 죄인을 끌고 오라는 명이었다.

“…….”

“…….”

복도 끝에서부터 놈이 두려움에 떤 비명을 내질렀다. 점점 가까이 들리는 그 괴음에 귀족들이 얼어붙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다시 한번 열리고 놈이 목에 줄을 매단 채 끌려왔다.

휴고 우딘의 아들, 사이먼이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저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사이먼이 덜덜 떨며 싹싹 빌었다.

그는 두려움에 돌아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저, 저는 오직 폐하의 충성스러운 일원이 되고자 했을 뿐입니다! 부디 저의 진심을 외면치 마시옵소서!”

그 폐하가 이곳에 없다는 게 중요했다. 무엇보다 휴고 우딘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고.

데로니스군이 목에 매단 줄을 잡아끌었다.

뼈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이먼이 꽥 괴음을 내며 바닥에 늘어졌다. 지켜보는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모두들 이놈이 누구인지 아는가?”

모르는 자는 없겠지.

하지만 펠릭스의 물음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몰라?”

귀족가엔 수도 없이 많은 아이들이 태어난다. 그중 이름을 받기 전에 죽어나간 이들도 있고, 이름을 받았으나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이 시대엔 그저 살아남아 가문의 이름을 잇는 이들만이 중요했다.

진즉에 추방되어 평생을 숨겨진 존재로 살아온 사이먼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만 했다.

“이놈은 휴고 우딘의 아들이다. 추방당했다곤 하나 그놈의 혈육임은 변함없지.”

사이먼이 부들부들 떨며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부채나 고운 손 뒤에 모습을 숨긴 부인들이 저를 흘끔거렸다. 허공을 응시하며 냉랭한 표정을 유지하는 가주들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긴장이 내려앉았다. 연단 위에 여유롭게 서 있는 놈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뭐, 뭔가 잘못됐어. 어째서 내가….’

이다음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예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망상증이 있다곤 하나 사이먼은 지금껏 누구보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온 놈이었다.

제 앞날이 어찌 될지는 뻔했다. 이들 앞에서… 끝을 내려는 거다.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발! 뭐든 하겠습니다. 시키시는 것 모든 걸 다 하겠습니다!”

사이먼이 냅다 몸을 납작하게 엎드려 꿇어앉았다.

번들번들한 이마가 여러 번 바닥에 닿아 푸르게 멍들기 시작했다.

살아야 한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었을 뿐, 그 끝이 죽음일 거라 예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 아르테미스를 드리겠습니다. 저의 아름다운 정혼자를 드리겠습니다. 제발!”

제가 가진 모든 걸 넘겨서라도.

거짓과 망상으로 거머쥔 모든 걸 포기해서라도.

“들여라.”

“예!”

복도 끝에서부터 헐떡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이어졌다.

눈앞의 목표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잔뜩 흥분한 짐승의 소리였다.

귀족 부인들이 몇 발자국 자리에서 멀어졌다. 곧 보게 될 잔악한 미래를 끔찍이 여기며 두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네놈들 전부 똑똑히 봐라!”

펠릭스가 고함쳤다.

컹컹거리며 광분한 개 세 마리가 그 분노에 더 날뛰기 시작했다.

오직 살육을 위해 훈련받은 놈들이 겁먹은 먹잇감의 냄새를 맡고 침을 뚝뚝 흘렸다.

“이놈은 휴고 우딘의 자식이다!”

펠릭스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너희는 이 서대륙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그간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왔어.”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나뉘었다.

누가 무엇으로 부를 얻고 명예를 이뤘는지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아득한 세월 동안 모든 걸 누렸다.

“그러니 너희 피가 가진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야겠지.”

손에 넣을 때도 조건 없이 모든 걸 가졌으니 잃을 때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이 죄를 지으면.”

펠릭스가 신호를 주었다.

사냥개를 붙잡고 있던 데로니스군이 놈들의 철끈을 끊어냈다.

“으, 으아아아아악!”

놈들이 정확히 목표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이먼이 두 눈을 부릅떴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그가 이리저리 뒤흔들렸다.

정말이지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봐야 하는 귀족들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리는 순간.

“끄아아아아아악!”

마지막 단말마와 함께 지독한 탄내 속에 피비린내가 뒤섞였다.

“네놈들의 피를 가진 모든 이가 벌을 나눠 받을 것이다.”

배반에 뒤따르는 결과는 오직 죽음뿐이니까.

“멸문을 원한다면 등을 보여라.”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펠릭스가 공포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주 지독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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