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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16화 (116/133)

116화

20장. 비밀의 늪(1)

덴버그를 가로지르는 수로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고, 끝에서 끝을 오가는 물자 호송선의 크기도 그만큼과 비례했다.

일행들이 모두 타고도 남을 만큼 여유가 있는 데다, 그 안엔 간단한 생필품과 절인 고기 등 비상식량이 있었다.

“도대체 어느 누가 호송선에 이런 술을.”

반란군 병사가 물자를 체크하며 입을 떡 벌렸다.

군용 물품을 옮기는 곳에 독한 포도주 두 병이 놓여 있다니? 이건 완벽한 횡재였다.

“들키지 않으려고 숨겨놓은 걸 보니 정신이 똑바로 박힌 놈이 가져다둔 모양이야.”

“우리만 노났지. 자, 한 잔씩 돌리자고.”

반란군 병사 둘이 부상당한 다리를 이끌고 고요한 일행들을 돌아봤다.

코앞에서 죽음에 가까운 일을 겪어서 그런지 모두 넋이 나가 있었다.

직접적인 전투로 체력 회복이 더딘 워렌과 케인은 내내 말이 없었고, 쭉 불안에 떨어댄 늙은 유모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몬데이어 공자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소?”

끓는 듯한 열에 파묻혀 쓰러져 있는 레온의 상황이 가장 나빴다.

병사가 브라운에게 잔을 건네며 물었다. 이후 루트에 대해 짜고 있던 브라운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전 괜찮습니다. 생각할 게 많아서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때도 있는 법이라오.”

“충고 감사합니다.”

“충고는… 경험이지. 나도 동료들을 수없이 잃어봤다오.”

“…그러십니까?”

“버티기가 조금 쉬워질 거야. …자.”

결국 브라운이 포도주를 받아들었다. 단숨에 독한 술을 넘기고 나자 가슴이 타는 듯이 쓰렸다.

“…….”

은백의 그림자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건 진작 예상했다.

덴버그 한복판, 그것도 악에 바친 적들에게 붙잡힐 게 빤한 상황에 자비를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죽기 위해 돌아서는 동료를 두고 왔으니 속이 오죽할까?

“슬슬 물살이 거세지는군….”

“예, 곧 있으면 급류 지역이니까요.”

브라운이 바깥을 살폈다.

수로를 벗어나 그레이트 대협곡의 초입까지 도착하고도 계속 이 배에 머물렀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다. 좁고 가파른 협곡의 바닥을 버티기엔 호송선의 규모가 부담스러웠다.

또 곧 있으면 마주하게 될 폭포를 타고 내려갈 방법도 없었다. 이제 수상 이동은 불가능했다.

“슬슬 내릴 준비를 해야겠네.”

길을 잡던 에드먼드도 대화에 합류했다.

“내려서가 문제이지만….”

“남아 있는 유일한 호송선을 타고 왔으니 곧바로 따라잡진 못할 거예요.”

방류의 여파로 운용 가능한 배는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게다가 은백의 그림자들이 시간을 벌어 주었으니 지금 당장 데로니스군의 추적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날이 저물었으니 최대한 달아나야 해. 그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지금 거리를 벌려놔야지.”

에드먼드의 말대로 지금이 도망치기에 가장 적기였다.

이대로 좀 더 격차를 벌린다면 아예 데로니스의 추적을 따돌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쪽엔 부상병이 너무 많았다.

그들이 속도를 내지 못하는 이상 데로니스와의 격차는 줄어들 게 빤했다.

“…….”

“…….”

삐그덕, 하는 물을 타는 선체의 소리만 내부에 가득했다.

비상한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마땅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브라운이 곱실거리는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릴 때였다.

“우리는 따로 마다비아로 갈 테니, 그쪽에서 다시 만납시다.”

젊은이들 뒤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휴고 우딘이 결정을 내렸다.

그들 일가와 후작가의 개인병들은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미끼가 되려는 거다. 에드먼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기껏 구해냈는데 그냥 내버려둘 순 없다.

“후작께서 희생하실 필요 없습니다.”

“희생이라니. 우리가 둘로 나뉜다면 적들의 추적을 따돌리기도 훨씬 쉬워질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모두 같이 살아야지. 더는 편을 잃어선 안 돼.”

게다가 쪼개진 무리는 자취를 숨기는 것도 간단한 일이 된다.

부상 입은 후작 부인을 돌보기에도 이쪽이 훨씬 알맞았다.

“우리는 협곡 우측으로 가겠어. 그편이 부상병들을 이끌고 가기가 훨씬 수월하겠지.”

“그곳에서 마다비아까지 가는 길은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제 넷밖에 남지 않은, 후작을 구출하기 위해 애썼던 반란군 병사들이 힘을 보태고 나섰다.

그레이트 대협곡은 반란군의 주 무대이다. 그들이 돕는다면 수월하게 이동하는 게 가능했다.

“에드먼드, 넌 공자님을 마다비아까지 잘 모시고 가도록 해.”

제법 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반란군이 결단을 내렸다.

적은 수로 움직이는 것이 이 싸움에서 유리하단 걸 여기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번 작전 리더는 나야. 결정권은 내게 있다는 걸 모르는 거야?”

“네가 우리 의견을 무시할 수 없는 놈이란 건 아주 잘 알지!”

게다가 에드먼드와 워렌, 케인의 힘이라면 적은 인원으로도 무리 없이 마다비아까지 갈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안 그래?”

“…정말이지 제멋대로들이군.”

“으하하하! 네놈 뒤치다꺼리하기 싫어서 도망치는 거다.”

반란군 병사가 에드먼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쯤에서 갈라지는 게 낫다. 이건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선택이었다.

“널 위하는 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단 사실을 알고 있겠지?”

알고 있다.

“…그래.”

결국 호송선이 멈추어 섰다. 협곡 좌측에 레온 일행과 에드먼드를 내려주기 위해서였다.

“자! 다들 준비하라고!”

급류 한복판에 세우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워낙 튼튼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진 배라 버틸 힘이 충분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들여다봐도 이게 최선이란 건 브라운이 가장 먼저 눈치챘다.

일행들은 브라운의 결정에 군말 없이 떠날 준비를 마쳤다.

레온이 쓰러진 이상 그의 결정이 일행의 뜻이었다.

“공자님은 제가 맡겠습니다.”

워렌이 레온을 업었고, 케인은 벨을 안아들었다.

에드먼드는 몇 번이나 머뭇거리다 메리의 두툼한 손을 잡고 결국 호송선에서 내렸다.

“마다비아에서 만나자고.”

대협곡의 좌측 부근은 길이 험하긴 해도 숲이 울창해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많았다.

게다가 길라와 월랜드로 통하는 길도 곳곳에 있어 위급 상황 시 빠져나갈 루트가 아주 많았다.

“몸조심해.”

“내 걱정은 마.”

불에도 끄떡없는 신과 같은 이들이 둘이나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비록 그중 한 명은 정신을 잃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에드먼드가 걱정을 뒤로하고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

하늘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울창한 숲속은 습기가 대단했다.

귀를 찢어버릴 것 같은 거대한 폭포가 가는 길 내내 펼쳐져 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세요, 워렌.”

레온을 등에 업고 있는 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덥지근하고 습한 공기와 더불어 레온의 체온 탓에 워렌은 홀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꼭 불로 만들어진 사람 같았다.

“벨, 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응? 여긴 늪지대가 곳곳에 있다고.”

아르르르!

“그래, 거기 빠지면 널 구해야 하는 인간 오라버니들이 고생 좀 하지 않겠니?”

“그래도 인력이 하나 더 늘어서 부담은 없습니다. 양심이 있으면 구출은 저들이 해주겠죠.”

“그런가요? 호호호! 우리 벨이 가만히만 있으면 고생들을 안 하실 텐데!”

가장 뒤편에서 케인과 메리가 떠들어댔다.

무거운 분위기를 가벼운 분위기로 풀어내려는 노력에 브라운이 미소 지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던 겁니까? 아르테미스 아가씨가… 공자님이란 사실을요.”

브라운이 에드먼드에게 물었다.

“루시오 공작을 되찾기 위해 따라왔거든. 그때부터.”

에드먼드가 잭 후작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티쿠스가 반란군이며 사이먼의 등장으로 예측이 가능했단 사실을 말이다.

“이 숲속에 묻어드려야 할 거야.”

“예, …공자님께서 인사만 하실 수 있다면 언제든요.”

두 사람이 에드먼드의 등 뒤 상자를 흘긋 살폈다. 그곳엔 루시오의 머리가 있었다.

보존제 안에 담겨 있다곤 해도 부패를 막긴 어려운 일이다.

이 기온에, 이 환경에 붙잡고 있는 건 더 이상 욕심이었다.

“영주님의 비밀은 진즉에 알고 계셨던 겁니까? 반란군 전체가?”

에드먼드는 레온이 푸른 불꽃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니 비밀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브라운의 질문에 에드먼드가 가슴 안쪽에 넣어둔 종잇조각을 꺼냈다.

“부집사가 이걸 흘리지 않았다면 나도 못 믿었을걸.”

“이건!”

“그때 끌려가는 길에 버리는 걸 봤어. 마침 그 근처를 지나던 중이었거든.”

가볍게 말하고 말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모든 일이 엉망이 될 뻔한 실수였다.

브라운은 에스델에게 끌려가기 직전 휴고 우딘에게 전해 받은 메모를 연못에 버렸다.

바로 몬데이어 공작가와 관련된 혈통의 비밀이었다.

“루시오 공작께서 후작에게 비밀을 공유하셨던 거야. 중요한 문제이니 우리에게 알리려 했을 테고.”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혼자만 알고 있기엔 너무 큰 비밀이었다.

레온의 힘은, 용의 혈족의 힘은 반란군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를 무기였다.

“그랬군요.”

“불 속에서 다치지 않을 거란 건 알았지만… 불 그 자체가 될 줄이야. 그건 나도 놀랐어.”

“용의 혈족에 대해 좀 알고 계신 게 있습니까?”

모든 정보를 취급하는 반란군이니 어쩌면 알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브라운이 에드먼드에게 물었다. 그 뒤를 바짝 따르고 있는 워렌도 귀를 기울였다.

“반란군이라고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니야.”

기대와 다른 대답이 흘러나왔다.

에드먼드가 길게 늘어진 수풀을 검으로 내려쳤다. 후들거리는 나뭇가지가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자 시야가 확 트였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드러내야 할 필요도 있는 법.

“하지만.”

에드먼드가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브라운과 워렌이 그의 흑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우리 가문에 전해져오는 정보는 알고 있지.”

가문?

브라운이 멈추어 서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좁고 뾰족한 턱에 크림색 피부. 새카만 머리칼 군데군데엔 빛바랜 듯 붉게 타버린 빛깔이 뒤섞여 있었다.

대지의 여신이 욕심낸 태양의 흔적.

“가문이라면….”

“가지고 있는 기록이 있어.”

비록 그 이야길 직접 전해줄 가족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가문의 비밀은 찾아냈다.

아주 먼 옛날 드래곤의 힘을 얻어 이 서대륙을 통치했던 시절의 비밀을.

“내 소개가 늦었어.”

에드먼드가 브라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에드먼드 트레톨라.”

“……!”

에드먼드 트레톨라라면 가이아 제국의 마지막 왕세자였다.

“누구도 내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지.”

“저, 정말… 트레톨라… 가문이시라고요? 그… 왕가의….”

“그래, 마지막 혈통이지. 아직까지는.”

“…맙소사.”

마지막 왕가의 혈육이 살아 있었다니.

왕세자가 오래도록 자식을 보지 못해 전운이 감돌았단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은 그냥 반란군일 뿐이야. 너희와 똑같이 하일 데로니스를 죽이고 싶은.”

에드먼드가 미리 선을 그었다.

환경도, 상황도 보통이 아닌 판에 관계까지 불편해진다면 이 여정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레온이니까.”

에드먼드가 여전히 쓰러져 있는 레온의 열 오른 얼굴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으니 이만 쉬어가는 게 좋겠어.”

아직은 드러나선 안 되는 이야기였다.

브라운이 에드먼드의 의사를 받아들이곤 짐을 내려놓았다.

“제가 주변을 정찰하고 오겠습니다!”

“전 도련님을 돌볼게요.”

케인과 메리가 각자 역할을 찾아내는 동안 워렌이 비교적 마른땅 위에 레온을 눕혔다.

“…….”

어서 일어나야 할 텐데. 일행들이 모두 분주한 순간 속에서도 레온은 눈 뜨지 않았다.

마치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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