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20장. 비밀의 늪(2)
고열은 몸에 남은 수분을 모두 갉아먹으며 전신을 할퀴어댔다.
마치 이 모양으로 몸을 혹사시키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냐고 화를 내는 것 같았다.
레온은 새벽 내내 고열과 오한을 번갈아 겪었다. 불타는 채로 시린 얼음 장벽에 온몸을 내던지는 느낌이었다.
하나 그마저도 더 이상은 열을 쥐어짤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몸은 바싹 말랐고, 숨을 쉴 때마다 체세포들이 당장 물을 내놓으라고 점차 정신을 깨워댔다.
‘물….’
목이 말랐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레온이 겨우 뜨거움을 깨고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파.’
몸에 남아 있는 감각은 통각뿐이었다. 물론 느끼는 고통과 달리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입을 벌리는 데 사용해야 할 근육이 죄다 멍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나, 살아 있는 건가?’
분명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몸을 구성하던 라피스를 모두 소진하고 남아 있는 영혼까지 불의 장작으로 만들었다.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야 정상이지 않을까?
검은 사냥개들의 심장을 찌르고 뼈 곳곳을 갈라내는 동안 레온은 제 몸이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하면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을지 아는 것처럼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댔다.
피의 뜻대로였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었다. 수천 년간 유지했던 분노는 거대한 화염이 되어 놈들을 모두 집어삼켰다.
‘…아직 남아 있어.’
심장의 한가운데에서 라피스가 느껴졌다.
온몸에 뻗어 있던 그 기운은 모든 라피스를 거두어들여 심장 하나만을 단단하게 보호했다.
‘…여긴 어디지?’
레온이 몽롱한 정신을 깨우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런 것 같았는데 잘 모르겠다.
주변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형체 없는 묵직한 공기가 온몸에 들러붙는 기분이었다.
어지러워…. 레온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몸에 남은 감각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릴 때였다.
-검은고리나무숲 근처, 그곳에 불의 냄새가 남아 있네.
흐린 시야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레온을 건져냈다.
눈앞은 여전히 거무죽죽하고 묵직한 공기에 휩싸인 듯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검은 늪지대 근방까지는 확실히 기운이 머물고 있어….
-확실합니까?
-확실해. 불꽃이 타오를 때 내가 직접 그 모든 걸 보았지. 나의 힘은 틀릴 수 없어.
오래된 서적에서 나는 먼지 묻은 종이 냄새가 진동을 했다.
레온은 기둥 거치대에 놓인 횃불이 타오르는 소리와 외벽 틈에 자라난 물 먹은 이끼의 냄새까지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하고 생경한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생각 속을 엿보는 기분….
-내 주술이 깨지지 않는 한, 나는 불꽃 속에서 놈을 찾아낼 수 있을 게야.
고통이 물러가는 만큼 점차 시야가 맑아졌다.
레온은 타닥거리며 작은 소음을 내는 장작불 근처에 두 개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을 확인했다.
시야는 그곳에서 점차 확장되었다.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의 주인을 찾아 낡은 나무 바닥을 헤집었다.
그곳엔 어지럽게 찢어진 종이와 오래된 서적들이 놓여 있었다. 해석할 수 없는 고대 문자로 새겨진 책 표지도 많았다.
-서두르게나. 놈이 깨어나는 순간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이런, 벌써 기운이 물러가는군.
-놈이 깨어났습니까?
-그래… 신선한 용의 기운이 내 주술을 밀어내고 있어… 살아 있는 놈의 기운이….
그들의 발치 근처를 바라보던 레온이 점차 시야를 넓혔다.
오래된 의자 근처엔 붉은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불이 바람에 휩쓸려 움직이는 대로 그 빛도 일렁거렸다.
누군가가 앉아 있다. 걸을 수 없을 것처럼 호리호리하고 긴 다리를 따라 레온이 시선을 옮겼다.
노인이었다. 그는 도톰한 쿠션에 깊게 등을 기대고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그 얼굴은 꼭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죽은 뼈 위에 겨우 가죽을 이어 붙인 것처럼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본 적이 있다. 타티아나의 오래된 기억 속에서 본 자였다.
‘밀라쿠를 되살린 놈이야.’
정말 살아 있는 걸까? 그 기억은 못해도 천 년이 넘은 현실이었다.
인간이, 그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존재할 수 있는 걸까?
확신이 필요했다. 레온이 눈 감은 노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는 순간이었다.
검버섯이 여러 곳에 물든 그가 번쩍, 두 눈을 뜨고 레온을 응시했다.
-놈이 우리를 훔쳐보고 있네! 당장 불을 꺼!
힘없이 쓰러져가던 노인이 몸을 벌떡 일으켜 손을 뻗었다. 장작이 타오르는 곳을 향해서였다.
무엇을 던졌는지 모르겠다. 그것을 눈치채기도 전에 레온이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두 눈을 떴다.
“…헉!”
구겨져 있던 폐 깊숙한 곳으로 축축하고 묵직한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레온은 누군가가 잡아당긴 것처럼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늦은 새벽녘, 선잠에 들었던 일행들이 그 기척에 모두 깨어났다.
“…도, 도련님!”
가장 가까운 곳을 지키고 있던 메리가 제일 먼저 레온의 상태를 확인했다.
검을 쥔 채 앉아 잠든 워렌이 그다음이었고, 지도를 만들다 졸고 있던 브라운은 젖은 낙엽 사이에 고개를 처박기까지 했다.
“세상에 이 땀 좀 봐! 케인, 깨끗한 물 좀요!”
“예, 부인!”
주변엔 굵직한 협곡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물길이 있었다.
케인이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신선한 물을 길어왔다.
“도련님, 어서 물 좀 드세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레온은 뻐근한 심장과 타들어갈 것 같은 입 안에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물을 마셔 넘겼다.
수분을 양분 삼아 몸이 점차 제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다.
잠잠하던 두통이 몰려오고 온몸 곳곳이 근육통으로 저리고 뻐근했다.
레온은 물을 마시는 작은 동작 하나도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얼마나 오랫동안 쓰러져 있었는지 모른다. 크라운 캐슬을 벗어나고도 벌써 삼 일이 지난 후였다.
일행들이 숨조차 쉬지 못하고 레온을 바라볼 때였다.
하늘 위 정체를 알 수 없는 새가 꺽꺽 울어대는 동안 레온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뭐였을까…?’
비록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엿보고 온 것 같긴 했지만.
“…나, 괜찮아.”
그래도 돌아왔으니 괜찮다.
모든 게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레온이 힘없이 메리의 품에 안겼다. 거부할 수 없는 어지러움이 자꾸만 밀려들었다.
***
“무려 삼 일이라구요, 삼 일! 이걸 다 드시기 전까진 저도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슬슬 새벽빛이 밝아왔다.
레온은 검푸른 어둠 속에서 허리에 손을 짚은 메리를 마주해야 했다.
메리는 레온이 다시 정신을 잃고 몸을 보호하는 동안 울창한 숲 곳곳을 뒤져 기력을 회복할 만한 보식을 만들어냈다.
“몸에 열이 많이 남아 있어요. 오리새는 찬 기운이 가득한 놈이니 이걸 좀 뜯으셔야 해요. 열갈퀴 줄기도 빻아서 즙을 냈으니 좀 드시고요. 뭐가 됐든 독소를 중화시켜야 하잖아요?”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환자에게 소금에 팍팍 절인 고기를 먹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메리는 깨끗한 협곡 물에 오리 새와 갖고 있던 몇 가지 약재를 넣어 탕을 끓여냈다.
내키지 않지만 정성을 봐서라도 먹어야만 했다. 레온이 나무 스푼으로 흙빛에 가까운 국물을 떠먹었다.
“윽!”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지독한 쓴맛이었다.
“엄살 부리지 말고 어서 드세요. 다들 못 먹어서 안달인 보약이라니까요?”
그런 사람은 없어 보였지만 메리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다.
“참, 옷을 갈아입히며 가죽으로 몸을 가려놨어요.”
“그래? 어쩐지 답답하더라.”
“아직 도련님 의사를 못 물었잖아요. 일단은 하던 대로 한 거예요.”
“잘했어. 다들 눈치챘어?”
그 말을 하며 레온이 흘긋, 에드먼드의 뒷모습을 살폈다.
케인이야 진즉에 이 비밀을 알고 있었고, 눈치 빠른 브라운도 어쩌면 의심하고 있을지 모른다.
제가 남자든, 여자든 하다못해 사실은 하일 데로니스의 자식이었대도 이해해줄 워렌은 그렇다 치더라도 에드먼드는 좀 다르다.
잭 가문의 후작 영애로 신분을 속이고 잠입하는 주제에 더 큰 비밀이 있었으니 자칫 모든 일을 망칠 수도 있었다.
동맹이 되기로 결정해 놓고 비밀을 숨겼으니, 눈치챘다면 그가 문제 삼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글쎄요. 별다른 말은 없으셨지만 저분은 도련님이 레온 몬데이어란 사실을 알고 계셨어요.”
“알고 있었다고?”
“예, 사실은 아티쿠스 잭이란 분이 반란군이었다지 뭐예요.”
“뭐?”
고요한 숲속에 레온의 비명이 빽 튀어나왔다.
각자 할 일을 하던 일행들이 모두 뒤돌아봤다. 하지만 메리는 별일 아니라고 손을 내저으며 그들의 시선을 치워주었다.
“소리 지르지 마세요. 아직 정돈이 안 끝났다고요.”
뒤늦게 사실을 전해 들은 레온이 혼란스러움에 입을 떡 벌렸다.
그럼 대체 그가 한 말과 행동들은 모두 뭐란 말인가. 연회장을 떠나기 전 나를 붙잡고….
“아름답다고 한 건….”
“예? 뭐가요?”
힘없는 레온을 대신해 옷매무새를 정돈해주던 메리가 가까이서 물었다.
짐승의 가죽에 여린 살이 쓸릴까 싶어 걱정된 마음에 천을 덧대는 작업 중이었다.
자연히 허리를 꽉 끌어안는 그 손길에 레온이 두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참았다.
놈이 매만졌던 허리 근처가 불타는 것 같았다.
“이 개자식!”
감히 다 알면서도 나를 놀려?
레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뒤바뀔 때였다.
뒷짐을 지고 미끄러운 이끼로 뒤덮인 바닥을 잘 골라 밟은 에드먼드가 여유롭게 다가왔다. 입가엔 특유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 불렀어?”
“네가 개자식인 건 잘 알고 있는 모양이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날 뭐라 부르든 네가 부르면 와야지. 안 그래?”
웃음기가 다분한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이미 그에게 매료된 메리는 눈을 반짝이며 낡고 땀에 찌든 옷가지를 거두어갔다. 자리를 비켜주려는 거다.
“가지 마!”
“전 아주 할 일이 많답니다? 우리 벨한테 밥도 줘야 하고.”
“그 녀석 골이 잔뜩 나 있어. 우리 고기를 다 먹어치우기 전에 잘 부탁해, 메리.”
“예, 도련님.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지금 누굴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이리 안 와?”
홍홍홍, 미소 지으며 메리가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다.
거대한 고목에 겨우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레온이 아랫입술을 마구 씹었다.
에드먼드는 다가오며 빛이 좀 더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우거진 나뭇가지를 쳐내어 주었다.
“몸은 좀 괜찮아?”
다정히 묻는 그 목소리에 레온이 그를 노려봤다.
“괜찮아야 할 거야. 우린 아직 추적당하는 중이거든.”
에드먼드는 레온이 가장 궁금했을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덴버그가 어떻게 무너졌고, 작전이 얼마나 성공했는지.
또 탈출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간단하지만 성의 없진 않게 잘 알려주었다.
물론 레온이 폭주하며 성만 한 불길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은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도.”
그가 가까이 다가와 눈높일 맞추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작전을 무사히 수행해 냈다는 것뿐이지.”
끈적한 습기가 온몸에 달라붙어도 에드먼드의 눈빛만큼 떨쳐내긴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 레온?”
마주한 시선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드레스를 입었을 때도, 왕세자의 옷을 걸쳤을 때도.
그의 태도는 늘 변함이 없었다.
에드먼드에겐 내 정체가 아르테미스가 아니라 레온이었대도 아무 상관 없었던 거다.
“아프지 마.”
그는 처음부터 내가 여자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처음 만난 그날처럼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동안 레온은 손바닥 깊이 얼굴을 묻어야만 했다.
“아프지 말라니까.”
다시 지긋지긋한 열이 올랐다. 그것도 아주 지독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