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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18화 (118/133)

118화

20장. 비밀의 늪(3)

“누군가가 나를 엿볼 수 있는 것 같아.”

아직 회복이 더뎠지만 그대로 한자리에 오래 머물 수도 없는 일.

일행들은 이제 그레이트 우림의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레온이 발밑을 주의하며 설명했다. 지난 새벽 정신을 잃은 제 머릿속을 마음대로 헤집은 자가 존재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불 속에 있으면 날 확인할 수 있는 것 같아.”

그놈은 밀라쿠를 되살린 늙은 술사였다.

라피스를 가지고 있으며, 용의 심장을 찾아 헤매는 자.

“그자가 내 무의식에 침투했어. 우리가 검은고리나무숲 근처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는 이 사실을 다른 이에게 알려주었다.

예상컨대 일행들의 위치를 찾고 있을 데로니스 놈들일 가능성이 컸다. 그게 아니라면.

“날 추적하는 암살자에게 알려 주었거나….”

“아, 암살자라뇨, 공자님?”

차분하게 레온의 말을 곱씹던 브라운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떠 보였다.

벨의 강직한 털도 곤두섰다. 일행들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을 느낀 것이리라.

“폰네시에서 암살자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어.”

이제 개인의 위험은 일행 전체의 위협이 되고 만다.

해주의 영혼이나 인어족의 오랜 아픔 등을 공유할 수는 없겠지만, 제 곁에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정도는 알려주어야 했다.

레온이 지난 탄일 주간 일어났던 습격과 암살자의 정체, 그리고 데로니스 놈들의 비밀 무기에 대해 설명했다.

“그놈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이 다이아 스틸이 유일하고.”

믿음직한 인간들이지만 아직 라피스에 대한 정보를 낱낱이 공유할 수는 없었다.

인어족의 적은 사냥개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레온이 생각을 정돈하고 일행들 앞에 다시 한번 푸른 검을 보여주었다.

놈들의 인간을 뛰어넘는 전투 능력과 특출 난 체력도 용의 살기는 이겨낼 수 없었다.

“날 노리는 자가 누구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들이 내 위치를 비교적 자세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어느 쪽이든 적이 등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브라운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구름이 이동하는 방향과 햇빛이 드는 기울기만으로 시간의 흐름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레이트 우림 내 검은고리나무숲은 몸을 숨기며 이동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우거진 커다란 잎은 일행들의 모습을 감춰주었고, 단단한 나무뿌리는 이동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되도록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는데….

하나 동선을 들켰다면 무용지물이다. 이 편리함은 쫓아오는 적들의 발도 가볍게 해줄 테니까.

“역시 늪지대로 가야겠습니다.”

그의 결단에 에드먼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피해 가는 곳일 만큼 이곳 늪지대는 최악의 명성을 자랑했다.

“어차피 발치에 백골이 채이고 채여서 요즘은 나다니기 쉽다고 소문이 났는걸요.”

“뜬소문입니다. 악취는 좀 나겠지만 숨도 쉴 수 있고 길도 나 있어요.”

“가본 것도 아니면서 부집사님이 어떻게 알아요?”

“관련 서적을 모두 읽었으니 케인보다는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연구 가치가 없어 발길이 닿지 않을 뿐이지, 생명도 살 수 있는 땅이랬어요.”

“죽음의 땅이 아니고?”

비록 이 숲의 모든 것이 고일대로 고여 더욱 힘겹긴 하겠으나 가보지 않고는 결국 모르는 법이다.

“물론 이대로 들키지 않고 이 숲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굳이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까지 근처에서 느껴지는 별다른 위협은 없었다.

큰 짐승의 울음소리를 제외하고 숲속에서 다른 사람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어떻게 할까요, 공자님?”

브라운이 레온을 바라봤다.

늘 그렇듯 제안은 제 몫이나 결정은 몬데이어의 것이었다.

“늪으로 가자.”

쉽고 어려운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 무엇도 아닌 완주할 수 있는 길이어야만 한다.

“놈들이 어디까지 날 엿봤는지 모르잖아. 능력을 얕보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돼.”

항상 최악을 예상해야 한다.

“늪지대라면 우리만큼 추적자 놈들에게도 불편하겠지.”

단 몇 초라도 그들의 발을 묶어둘 수 있다면 충분했다.

맞서 싸우는 건 자신 있다. 워렌과 에드먼드, 그리고 케인의 힘이라면 정찰병들의 목을 꺾어버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게 가능할 테니까.

“안쪽까지 가본 적은 없지만 늪지대를 조사한 적이 있어. 내가 도움이 될 거야.”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서적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지도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래, 내가 도울게.”

에드먼드와 브라운이 재빨리 작업에 착수하는 동안 나머지 일행들도 제 역할을 찾아냈다.

“전 벨을 잘 단속해야겠네요.”

“이번엔 제가 업어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워렌 경이라도 여태껏 공자님을 모셨으니 체력 소모가 컸을 거예요.”

메리가 번쩍 무거워진 벨을 들어 올렸고, 케인은 소매를 걷어붙였다.

품에 안긴 벨의 푸른 눈동자가 레온과 워렌을 번갈아 살폈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자님.”

벨의 귀가 쫑긋거렸다.

낮은 저음의 그 목소리가 레온을 부른 순간 레온은 숨을 참았다.

“전… 공작 저하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일행들이 그 대화에 시선을 돌렸다.

바닥 한쪽, 루시오가 잠들어 있을 나무 상자가 보였다.

레온도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워렌.”

이 이상은 안 된다.

루시오를 죽음의 땅에 끌어들일 순 없을 테니까.

“묻어드리자.”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레온이 천천히 상자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가볍디가벼운 상자를 들자마자 뜨거움이 왈칵, 눈에서 쏟아져 내렸다.

***

“놈들은 처형을 공개적으로 진행했어.”

사실 처형이랄 것도 없었다.

“전장에서 이미 목숨을 잃은 후였기 때문에 더 자극적인 모습이 필요했을지도 모르지.”

에드먼드가 곁에 서 있는 케인에게 그날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이미 죽은 분을 그렇게 만든 거군요. 데로니스 놈들이.”

“그래, 정말이지 잔악무도한 자들이야.”

폰네시가 습격당했단 소식을 접한 후, 인근에 위치해 있던 반란군은 루시오를 돕기 위해 그곳까지 갔다.

하다못해 공작 한 사람만이라도 구출하기 위해서.

하지만 폰네시에 도착한 반란군은 끔찍한 광경을 봐야만 했다.

“레온의 거취를 아는 자가 나올 때까지 공작의 몸을… 나누었지. 계속해서.”

죽은 이의 몸을 함부로 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죽은 자는 자유롭다. 서대륙인들이 시신을 엔드해에 떠나보내는 것 역시 그런 의미였다.

“사냥개가 물어간 신체를 회수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어.”

그의 목이 데로니스 놈의 손아귀에 넘어갔단 소식을 들었을 땐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들끓었다.

케인이 탄식과 함께 저 멀찍이 떨어진 곳, 절벽 위 레온과 워렌을 살폈다.

두 사람은 루시오 공작과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

레온이 푸른 천에 뒤덮인 루시오를 빤히 바라봤다.

워렌의 망토로 감싼 그의 머리는 너무 닳고 한없이 손상되어 그 크기가 얇은 허벅지의 반도 되지 않았다.

‘어쩌면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레온이 생각에 잠겼다.

루시오가 용의 혈족이었고, 심장을 노리는 이들을 피해 대비 중이었다면 어느 정도 라피스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헤리스 타린을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만 루시오는 모든 일을 몇 수나 내다보는 능력을 가졌다.

아마 그가 대비하지 않은 일은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방비책은 언제나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내 영혼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몰라.’

레브 몬데이어가 정신을 잃은 후 연달아 진짜 레온 몬데이어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 순간에도 루시오는 대가를 치른 것이라며 자식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목숨을 담보로 다시 목숨을 되찾은 것일까? 그가 말한 대가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

비록 그 답을 내어줄 이는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 해답 역시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루시오라면.

“폰네시의 맞은편이에요.”

레온이 깎아지른 높은 절벽 너머를 바라봤다.

저곳 너머엔 한평생 루시오가 머물렀던 폰네시가 있다.

“비록 지금은 이곳에 묻지만… 언젠간 엔드해에 보내 드릴게요.”

모든 일이 끝난 후 루시오를 되찾으러 올 것이다.

레온이 한참이나 그와 함께 폰네시를 바라봤다.

모든 것이 시작된 땅이자 모든 것이 끝났다 이야기되는 그곳을.

“…제가 꼭 되찾을게요.”

그가 지켜내려 한 모든 것을 돌려받을 것이다. 혈족의 비밀도, 루시오의 명예도.

레온이 푸른 천을 쓰다듬었다.

태양의 절기가 다가오고 있다. 위태로웠던 동행은 여기까지다.

“공자님.”

곁을 지키던 워렌이 공자를 바라봤다. 한참이나 주춤하던 레온이 결국 그에게 푸른 천을 건넸다.

“…….”

워렌은 말없이 루시오의 머리를 받아들고 깊이 파둔 흙 근처로 다가갔다.

폰네시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며, 주변에 새하얀 잎을 늘어뜨린 고목이 위치해 있었다.

마치 은백색 머리칼을 보는 듯 빛나는 나무였다. 언젠가 다시 되찾으러 오는 날 알아볼 수 있단 확신이 들었다.

“묻겠습니다.”

레온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에서 뜻을 읽은 워렌이 푸른 천 위로 투둑, 마른 흙을 뒤덮기 시작했다.

하늘엔 태양이 있었고, 음지를 벗어나 밝은 빛만 내리쬐는 주변은 두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주신 검으로 당신이 지키려 했던 모든 것을 지켜내겠습니다.’

그가 무엇을 위해 저주와 맞서 싸우면서까지 제게 이 검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켜야 할 것은 눈앞에 있다. 그가 준 기회가, 살아야 할 이유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제 곁에 있다는 것 역시 분명했다.

“…….”

지켜야 할 것을 지킨다.

언젠가 그를 향해 바쳤던 명예는 이제 제 삶의 목적이 되어 숨을 멈추지 않을 이유가 되어주었다.

‘워렌의 삶을 잊지 않고 라일리로서의 삶을 되찾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본래의 이름으로 마주 서게 될 것이다.

워렌이 마지막 흙을 뒤덮으며 그곳에 검을 내려두었다.

“…꽃을 좀 꺾어왔어요. 흔적이 될지도 모르지만….”

먼 곳에서 지켜보던 메리가 용기를 내서 다가왔다.

자취를 숨기고 도망쳐야 하는 순간에 이런 의식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평생 좋은 주인이었던 이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게 영 마음 쓰였다.

“괜찮아, 잠시라도 놓아두자.”

“예, 도련님.”

레온도 그녀의 마음을 모두 알았다. 메리가 잠시 미소를 머금고 워렌의 검 옆에 들꽃을 놓아두었다.

검과 꽃이 아니라면 분별할 수 없을 것이다.

레온이 마른 흙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건 금세 루시오를 잊게 만드는 세상처럼 야속하게 보였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브라운도 마지막 인사를 위해 그곳을 찾았다. 그는 손바닥만 한 넙적한 돌을 들고 왔다.

그곳엔 얇은 나뭇가지에 물을 묻혀 적어낸 기도문과 루시오의 삶을 기리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의 신념 아래 이 세상은 오래도록 푸르렀다.

해가 뜨고 시간이 지나면 점차 사라지고 없겠지만.

“…이제 출발하자.”

새로운 시작을 위한 끝은 언제나 있는 법이었다.

레온이 뜨거움을 삼켜내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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