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20장. 비밀의 늪(4)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곳을 지나가려니 난항이 예상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행들은 검은 늪지대 외곽 부근을 지나 협곡 하류를 향해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신발 안이 축축해서 미칠 것 같습니다. 뭐가 들어온 것 같다구요.”
“그래도 맨발로 걸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어디 씻을 곳도 없고….”
“벨은 제가 안을게요…. 안겨 있는 게 고역이긴 하겠지만.”
“많이 덥니, 벨? 그래도 버둥거리면 안 돼.”
케인과 메리, 그리고 벨이 푹푹 찌는 기온에 숨을 헐떡거렸다.
벨은 그릉거릴 기운도 없어 선홍빛 혀를 쭉 내밀고 케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북부 지역의 털 많은 짐승이 습기 가득한 우림 속을 지나려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공자님, 여기 죽은 나무의 뿌리가 있습니다. 이건 딛지 마세요.”
브라운이 거무죽죽한 뿌리를 콱, 밟아내자 수분감 없이 마른 나무가 부스러져 곧장 잔해가 되었다.
자칫 잘못 디디면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갈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일행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
게다가 늪지대를 뒤덮은 키 작은 덩굴나무가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 레온이 워렌이나 케인의 등에 업힌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레온, 괜찮아?”
행렬 한가운데서 앞서 길을 잡는 브라운과 워렌을 따라잡기엔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에드먼드가 손을 뻗어 휘청거리는 레온을 붙잡아 주었다.
느린 발걸음에 덩달아 뒤를 지키던 케인과 메리의 속도도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쉬었다 가자.”
일행들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지만 이대로 강행하다간 더 큰 문제를 일으킬 것 같았다.
레온이 결국 멈추어 섰다. 에드먼드가 그나마 물기 없는 나무를 골라 그곳까지 부축해 주었다.
“주변 정찰을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쉬고 계세요.”
빽빽한 나무줄기로 하늘도 잘 보이지 않았다.
초행길인 데다 방향을 잡기가 어려워 브라운이 정찰을 자처했다.
그동안 레온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줄 셈이었다.
“물을 찾아오겠습니다.”
식수가 다 떨어져 간다. 끈적한 땀과 후덥지근한 공기가 일행들의 목을 움켜쥐기 전에 맑은 물을 찾아내야만 했다.
워렌이 브라운을 뒤따라 길을 나섰고, 메리와 케인도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에드먼드는 허리춤에 넣어둔 검을 집어 들었다. 만일에 대비해 일행들을 지키는 건 그의 몫이었다.
“벨, 이리 와.”
쉬는 동안만이라도 케인의 짐을 덜어주어야 했다.
벨이 조용히 케인과 메리, 두 사람의 무릎을 밟아 곧장 레온에게 다가갔다.
더위에 기운도 없고 체력도 잃었지만 레온의 말은 잘만 듣는 털 뭉치였다.
“가는 길이 좀 험하긴 하겠지만 확실히 늪지대를 통하면 마다비아 근처까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
반란군의 거점이 된 마다비아는 동부 구석 엔드해와 맞닿아 있는 해안 도시였다.
마다비아의 초입은 협곡을 따라 서대륙 전역에서 모인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곳은 진동하는 악취와 인간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엄청난 규모에 천연 요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우리 조사에 따르면 늪지대 하류와 그곳이 연결돼 있다 추측돼.”
고난이 예상되기는 하지만 잘만 하면 시간을 반으로 줄일 수도 있는 경로였다.
“개척자가 될 수도 있겠군요.”
“그래, 케인.”
“만일 위험하다면 돌아갈 길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레온이 물었다.
손가락 사이에 엉겨드는 빳빳한 벨의 털이 잠시간 불안을 잠재워 주었다.
하지만 걱정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레온이 희끗한 메리의 머리칼을 빤히 바라봤다.
‘메리에겐 몇 배로 더 힘든 여정이 될 거야.’
힘들어서가 아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겁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뿐인 가족을 잃을까 두려운 마음은 참을 길이 없었다.
“우회할 수 있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있어. 혼자 슐츠로 넘어가 배라도 구해올 테니 걱정 마, 레온.”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떠안기엔 이미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거웠다.
에드먼드의 농담에 메리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당겼다.
눈치 빠르고 걱정 많은 그녀는 이미 알아챘을 게 분명했다.
자신 때문에 레온이 항상 대안을 준비한다는 걸 말이다.
“오랜 삶을 살았지만, 그곳은 소문으로밖에 접해보지 못했어요.”
메리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에드먼드에게 물었다.
“마다비아에선 여인들도 모두 자유를 누린다면서요? 복장도 편히 하고요.”
“그래, 원한다면 뭐든 할 수 있지. 머리칼을 짧게 자른 여인들도 많고.”
그 문장에 반응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레온이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 모여 앉은 모두가 비밀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죽기 전에 그런 곳에 갈 수 있어 다행이네요. 자유로운 만큼 할 수 있는 게 많을 거예요.”
메리가 미소 지으며 레온의 손등을 토닥였다.
“기대되죠, 도련님?”
“…그래.”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메리의 기대감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레온이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
“…….”
알 수 없는 날벌레가 주변을 정신없이 날아들었다.
눈 감은 채로 세모난 귀만 팔락거리던 벨이 결국 레온의 옆구리에 고개를 파묻었다.
공처럼 몸을 말고 더 깊숙이 파고든 녀석은 무척 지쳤는지 곧 단잠에 빠져들었다.
서로 어깨에 기댄 채 코를 골고 있는 케인과 메리도 마찬가지였다.
“너도 눈 좀 붙이지그래.”
레온이 여전히 서 있는 에드먼드에게 말했다.
그는 서서 주변에 사소한 기척 하나에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에드먼드는 크라운 캐슬 습격부터 줄곧 강행군을 펼쳐왔다.
“난 네가 싫다 해도 여기서 마다비아까지 널 안고 갈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넘치니까 걱정하지 마.”
기어가는 한이 있다 해도 그럴 일은 없다.
레온이 대꾸하지 않자 에드먼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헤리스 타린을 찾고 있다고 했지?”
일행들은 마다비아까지 동행한 뒤 그곳에서 반란군의 도움을 받아 슐츠로 향할 생각이었다.
헤리스는 이미 마다비아에 있었지만, 반란군과 소식이 끊긴 지 오래라 아직 일행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응, 그자가 아버지의 마지막을 알고 있을 테니까. …혈족의 비밀에 대해서도.”
“…이야기 들었지?”
그 목소리가 워낙 조심스러워 꼭 잘못을 용서받는 사람 같았다.
레온이 벨의 머리통을 쓰다듬다 고개를 들었다.
에드먼드의 조금 젖은 흙빛 머리칼이 매끄럽게 빛났다. 제 색을 잃은 나풀거리는 셔츠도 레온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네가 트레톨라 왕가의 마지막 남은 후계자란 사실 말이야?”
“음, 그렇게 말하니까 숨긴 보람이 없긴 하지만.”
“알고 있어. 브라운은 내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거든.”
정신이 돌아온 직후 브라운은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빠짐없이 보고했다.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싶은 작은 정보도 모두 포함이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에드먼드의 정체였다.
레온이 다시 에드먼드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
해주가 알고 있던 바다의 운명과는 너무 달랐다.
트레톨라 왕가는 모두 죽었다.
몬데이어 공작이 가이아 왕조 복위에 힘썼으나 그것도 그들의 마지막 왕세자비 가문을 통해서였다.
그는 원래대로라면 살아 있어선 안 되는 인물이었다.
“뭘 그렇게 봐. 말도 없이.”
“…그냥 좀 생각했어.”
“남들이 보기에 오해할 수도 있으니 너무 뚫어져라 보진 마.”
“뭘?”
“마다비아에선 남자끼리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
“…너,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농담이야. 당연히 농담이지.”
애초에 레온이 여인이니 성립될 수 없는 문제였다.
레온이 짓궂은 에드먼드를 한참 노려보았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에드먼드가 레온의 관심을 돌렸다.
“네 혈족에 대해 우리 가문에 기록된 정보가 좀 있어.”
“…알려줄 수 있겠어?”
“네가 원한다면 뭐든.”
벨이 뒤척이는 동안 레온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목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서였다.
“용의 혈족이란 아주 오래전, 어떤 신비한 힘으로 인간의 모습을 얻게 된 드래곤들을 일컫는다고 해.”
말하자면 용의 힘을 가진 인간이었다. 다만, 현존하는 가장 고귀한 생명체에게 인간족과 같은 모습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들은 그때부터 용의 혈족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전쟁이었다.
“그때는 드래곤들이 이 세상을 거머쥐었을 때니까, 아마 힘을 나눠 갖기는 싫었을 거야.”
하지만 드래곤의 힘은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레온의 몸 안에 남아 있는 폭발적인 살기도 그런 힘 중 하나였다.
“드래곤을 피해 아무리 숨어도 용의 혈족들은 결국 붙잡혔어. 그리고 끔찍하게 사냥당했지.”
아무리 같은 힘을 지녔다 하더라도 신체적 우위는 드래곤에게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드래곤은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없었다.
피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숨어야 한 용의 혈족들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인간들 틈에 뒤섞이는 것이었다.
“인간과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만이 피의 힘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대.”
말하자면 피를 중화한 셈이었다.
트레톨라 왕가는 용의 혈족인 선대 몬데이어를 인간 세상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을 내치지 않고 서대륙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땅을 내주었다. 그게 바로 모두가 알고 있는 폰네시였다.
“분명 가문의 기록을 좀 더 살펴보면 관련된 내용이 몇 가지 더 있을 거야.”
점차 퍼즐이 맞춰지고 있다. 마다비아에 가야 할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레온은 헤리스 타린을 통해 적들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그들에게서 지켜낼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낼 참이었다.
“그곳에서 슐츠까지는 어떻….”
“레온, 쉿!”
그때 에드먼드가 그대로 레온을 보호하며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었다.
먼 곳에서부터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낯선 발소리에 워렌이 달려오는 소리였다.
‘적인가?!’
아주 집중해서 귀를 기울여야만 느껴질 정도로 작은 기척이었다.
레온이 잠든 메리와 케인을 깨우고 손짓하는 동안, 워렌과 에드먼드가 주변을 경계했다.
사색이 되어 달려온 브라운도 일행 사이에 합류했다.
그는 가쁜 숨을 참느라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보였다.
“…….”
“…….”
워렌과 에드먼드가 어디를 맡을지 시선을 교환하는 동안 성인의 허리춤까지 올라온 이름 모를 야생 잡초가 파스스 흔들렸다.
누군가가 긴장으로 과호흡이 온 게 분명하다. 유독 크게 들리는 숨소리에 레온이 인상을 찌푸릴 무렵 잡초 사이에서 불쑥,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으, 으악!”
으르르르!
케인이 짧은 비명을 내질렀고 품에 안겨 있던 벨은 짐승의 발톱을 드러냈다.
지독한 악취와 함께 늪을 가르고 나타난 건 온몸이 회색빛으로 물든 네 발 짐승, 아니.
“…어, 어린애?”
전신이 오물로 뒤덮여 눈의 흰자만 새하얀 녀석의 모습은 흡사 작은 괴물 같았다. 믿기지 않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