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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20화 (120/133)

120화

20장. 비밀의 늪(5)

“…사람이라고요? 정말?”

납작 엎드려 수풀을 지나오느라 녀석의 몸엔 온갖 오물이 묻어 있었다.

질척한 늪 속에도 빠졌었는지 회색빛 진흙은 두껍게 피부 위에 말라붙어 생김새를 가늠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숲속에 아이가 살고 있을 리 없잖아요. 적들이 보낸 민간인일지도 모릅니다.”

아이에게 검을 들이대고 싶진 않지만, 지금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레온의 안위를 챙기는 것이었다.

브라운이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녀석을 자세히 살폈다.

놈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보였으나 그보다는 적개심이 우선이었다.

이를 드러내고 노려보는 표정이 인간보다는 벨과 조금 더 닮아 있었다.

“네 목적이 뭐지?”

레온이 물었다. 녀석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경계를 풀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떠는 것 같진 않다. 잠시 스쳤던 감정은 이미 없고, 놈은 무언가를 찾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레온이 아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설마.

“너, …먹을 게 필요해?”

적의 넘치던 아이가 그 목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반응을 한 것이다.

“있어?!”

납작 엎드렸던 녀석이 몸을 일으켰다. 레온의 가슴팍 정도까지 오는 키를 보아하니 많이 쳐줘봤자 열다섯도 되지 않은 놈이었다.

아이가 다가오려 하자 워렌이 검을 뻗었다. 에드먼드는 일행들을 보호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녀석을 경계했다.

“줘! 먹을 게 필요해!”

아이가 악다구니를 내질렀다.

검도 무섭지 않은지 그 앞에서 움츠러들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레온이 흘끔, 뒤편을 살폈다. 절인 고기와 비상식량을 넣어둔 짐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원한다면 줄 수도 있을 만큼 넉넉한 양이지만.

“우리가 우리 몫의 음식을 네게 주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게다가 넌 위협도 못 돼.”

악밖에 남지 않은 빼빼 마른 아이 한 명쯤, 적으로 여기는 이는 이곳에 단 한 명도 없었다.

레온이 유심히 녀석을 살폈다.

다 낡아빠진 옷하며, 심상치 않은 외관만 보더라도 데로니스가 보낸 민간인 같지는 않았다.

차라리 문명과 단절된 채 이곳에 사는 아이라고 보는 게 맞다.

“너, 이 근처에 사는 것 같은데. 맞아?”

“…….”

“우린 이곳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네가 우리에게 필요한 걸 내어준다면 우리도 네가 필요한 걸 건네줄 수 있겠지.”

“…먹을 걸 준다는 뜻이야?”

“그래, 서로 필요한 걸 교환하는 거지.”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보단 레온이 유추해낸 상황이 맞을 가능성이 더 컸다.

에드먼드가 예민한 감각을 끌어올렸다. 녀석을 제외한 다른 인기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너희가 위험한 놈들인지 확인이 필요하거든.”

녀석의 눈이 전투복을 차려입은 워렌과 케인에게 향했다.

그들의 옷엔 군데군데 피가 얼룩져 있었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다.

뒤편에 서 있는 늙은 노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위협적이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들에게서 나는 피비린내는 감출 수 없었다.

“…….”

이들을 끌어들였다가 이전과 같은 일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물씬 밀려들었다.

다시 붙잡혀가게 되면 그땐 죽음뿐이다.

아니, 어쩌면 죽음이 가장 나을지도 모를 만큼 끔찍한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싫어.”

그런 일은 다시 겪고 싶지 않다.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 큰 어른 여럿이 주는 위압감에 녀석의 손끝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두려움이 물씬 밀려들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등 뒤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어쩌죠? 그냥 두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디카르테에게 중요한 건 오직 몬데이어뿐이다.

브라운은 일행들 중 가장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때론 누구보다 냉철하고 단호하기도 했다.

적에게 쫓기고 있는 판국에 이런 위험한 상황은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게 좋다.

더욱이 상황 판단이 느린 아이라면 자칫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를 무서워하는 것 같으니 이만 자리를 피해주는 게 낫겠어.”

에드먼드도 의견을 보탰다.

하다못해 마다비아 근처였다면 반란군 기지에 데려가 밥이라도 든든히 먹였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케인만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며 메리 역시 측은함에 눈썹을 늘어뜨린 순간이었다.

“적이 옵니다.”

주변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워렌이 순식간에 레온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뻗었다.

레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주 빠른 속도로 날아온 활이 발치에 떨어졌다.

워렌이 검으로 가르지 않았다면 분명 이마 한가운데를 관통했을 것이다.

“에드먼드!”

워렌이 부르기도 전에 에드먼드는 이미 흙투성이 아이의 뒷목을 잡아챘다.

일행들이 곧장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케인이 갑옷에 칭칭 감긴 팔목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쳐냈다.

“개들입니다. 사냥개예요!”

컹컹거리는 소리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베, 벨!”

메리의 품에 안겨 있던 벨이 살기를 끌어올리며 순식간에 튀어 나갔다.

말릴 새도 없었다. 녀석이 수풀 사이로 빠르게 날아 다가오는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르르르!

위협 어린 개의 하울링이 곧이어 고통에 겨운 신음으로 뒤바뀌었다.

벨이 저보다 두 배는 덩치가 큰 사냥개의 목을 물어뜯었다.

두툼한 가죽을 뚫고 살점을 뜯어내는 송곳니는 스노우 울프의 날카로움과 설호의 단단함을 이어받아 그 어떤 짐승보다 우위에 있었다.

“사냥개가 있으니 금방 추적해 올 겁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적들은 개가 달린 방향으로 화살을 겨누었을 뿐이다. 아직 일행들을 발견하진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반드시 붙잡히고 만다.

브라운이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짐을 챙겨 들었다.

“가야 해요, 공자님.”

“이런, 하필이면.”

레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본의 아니게 녀석을 위험에 휘말리게 만들었다.

이곳에 혼자 남아 있다면 데로니스 녀석들에 의해 모진 고초를 겪게 될지도 몰랐다.

“너, 우리랑 같이 가야겠다. 여기 혼자 있으면 분명 위험할 거야.”

싫어도 하는 수 없다. 레온이 녀석의 팔목을 붙잡았다.

“자, 잠깐.”

“시간 없어!”

두려움에 휩싸였던 아이의 눈동자는 이제 다시 날카로움을 되찾으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빠르게 주변을 훑고 돌아온 워렌이 다시 일행 사이에 합류했다.

입가를 붉은 핏빛으로 물들인 벨도 함께였다.

“거긴 안 돼.”

“뭐?”

끌려가던 아이가 레온의 손을 간절히 붙잡았다.

“그쪽으로 가면 발견될 거야. 숨고 싶다면 날 따라와.”

녀석의 깨끗한 눈이 바닥을 가리켰다. 지금 어딜 보는 거야?

레온이 주춤하는 사이 소년이 붙잡은 팔을 놓았다. 그러곤 일행들 옆 깊게 나 있는 늪 속을 향해 있는 힘껏 몸을 내던졌다.

“어서!”

붙잡을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아이가 사라졌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늪은 얼마간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금세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말도 안 돼.”

아이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이.

***

고민은 짧았다. 다른 사냥개가 추적해오는 발소리가 수풀 사이를 헤매고 있는 동안 가장 먼저 레온이 늪 속에 몸을 던졌다.

이 꼴론 어차피 멀리 도망치기도 힘들었다. 나아간 곳에 놈들이 없을 거란 확신도 없었고.

‘윽… 정말 지독하잖아.’

넓고 깊게 고여 있던 늪 속엔 나무에서 뻗어 나온 얇은 뿌리들이 겹겹이 뒤덮여 있었다.

그곳에 막혀 흐르지 못한 숲의 잔해물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썩어가고 있었다.

물과 흙과 알 수 없는 온갖 것들이 모여 묵직함으로 레온의 몸을 강하게 짓눌렀다.

그때, 소년이 레온의 팔목을 붙잡았다. 잡아끄는 힘에 천천히 발을 내딛자 단단한 무언가가 밟혔다.

아마도 늪 속에 빠진 거대한 고목나무 같았다.

‘다들 잘 오고 있는 걸까?’

뒤돌아보고 싶지만 눈을 뜰 수도, 손을 휘저을 수도 없을 만큼 힘에 부쳤다.

레온은 녀석이 잡아끄는 대로 무거운 늪을 가르고 겨우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덩굴이 몸에 휘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뱀처럼 몸 곳곳을 휘감아 작은 압박이 이어졌다.

이대로 죽는 건가?

늪 속에 뛰어든 건 역시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꼬챙이에 꿰인 것처럼 레온은 점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다. 그 순간 녀석이 레온의 팔을 확 잡아끌었다.

겹겹이 무언가가 몸을 바짝 감싸 안는 느낌과 함께 비좁은 틈 사이를 빠져나왔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레온이 번쩍, 두 눈을 떴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늪 속이었는데….

“저건 늪이 아니야. 동굴의 입구일 뿐이지.”

“동굴 입구라고?”

“응, 산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마도 그랬겠지.”

자잘한 나무뿌리가 마치 그물처럼 늪이 새어 들어오는 걸 막고 있었다.

오가는 동안 일부 늪이 출입구에 쌓이기도 했지만, 높은 입구에 층층이 말라붙은 부산물은 층계가 되어 편리함을 보탰을 뿐이다.

“말도 안 돼… 이런 곳이 있었다니.”

숲 아래 이런 거대한 동굴이 존재하는 줄은 몰랐다.

이곳은 세월을 알 수 없는 예전에, 어느 산사태로 만들어진 자연 피난처였다.

레온이 그 압도적인 크기를 가늠하는 동안 등 뒤에서 투둑, 툭! 소리를 내며 일행들이 떨어졌다.

소리만으로 상황을 파악한 브라운이 모두를 이곳에 밀어 넣은 직후였다.

“메리, 괜찮아?”

레온이 가장 먼저 메리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뿐한 발걸음으로 벨이 높은 곳에서 착지했다.

털에 묻은 늪을 탈탈 털어내는 뒷발이 무척이나 신경질적이었다.

“세상에…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별별 경험을 다 하잖아요?”

“…맙소사, 대체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던 거죠? 누가 내 목을 마구 졸랐는데.”

“접니다, 케인. 혼자 한가운데서 가만 있길래 수상 구조법으로 좀 끌고 와봤습니다.”

세 사람이 떠들어대는 동안 에드먼드와 워렌이 자세를 가다듬고 곧장 천장을 살폈다.

찐득한 늪이 얼마 떨어지는가 싶더니 곧 엉겨든 나무뿌리에 가로막혔다.

힘으로 틈을 벌릴 수 있는 인간이 아니고선 저곳을 빠져나올 순 없을 것이다.

“우리가 늪 속에 빠졌단 생각은 아마 못 할 겁니다. 그들이 이곳을 만든 게 아니라면요.”

브라운이 탁탁, 손을 털고 넓은 공간을 살폈다.

그렇게 말했지만 인위적으로 만든 흔적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숲을 뒤진다 하더라도 이곳은 절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일곱 번의 절기가 지나는 동안 아무도 이곳에 오지 않았어. 그러니 안심해.”

혹한과 태양의 절기가 번갈아 세 번씩 지났다.

그러는 동안 아무도 찾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년이 제 영역에 찾아온 어른들을 바라보며 뒤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내 동생이 있어.”

“동생?”

레온의 물음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을 구해야 하는 것 역시 그 이유 때문이었다.

“내 동생은 걷지 못해. 앞도 잘 보지 못하고… 그러니 내가 소개할 때까지 아무 소리도 내지 말아줘.”

만일 이들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유도 모른 채 저 늪 밖에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하염없이 자신만 기다리는 동생 역시 얼마 살아남지 못했을 테고.

“이쪽으로 와.”

그 누구도 이곳에 들인 적 없지만 이들이라면 믿어도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소년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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