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121화 (121/133)

121화

20장. 비밀의 늪(6)

“린, 먹을 걸 구해왔어.”

동생이 놀라지 않도록 소년이 조심스레 물기 젖은 동굴 벽을 쓸며 다가갔다.

툭, 툭.

걷는 동안 동생이 들을 수 있도록 작은 신호를 주며 천천히 다가가자 구석에 기대앉아 있던 빼빼 마른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제노?”

“그래, 나야. 오래 걸리진 않았지?”

빛 한 번 보지 못한 것처럼 창백한 피부 위엔 여기저기 갈라진 흔적이 머물렀다.

린은 입을 열 때마다 상처가 벌어지는 것 같아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했다.

제노가 단숨에 동생에게 다가가 일행들에게 받아온 음식을 건넸다. 린은 벌써 일주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힘들진 않았어?”

먼 곳에서 그런 두 아이를 지켜보던 레온이 입술을 씹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아이 모두 자라다 만 것처럼 삐쩍 말라 볼품없었다.

누군가가 큰 손으로 있는 힘껏 쥐어짠 것처럼 몸에 영양소라곤 단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린이라고 불린 동생 쪽은 더욱 심했다.

린은 마치 죽은 시체를 그대로 되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다리는… 괜찮아?”

제노가 조심스레 동생의 다리를 주물렀다.

습하고 더운 공간 속에서도 린은 더러운 모포를 덮고 있었는데, 그 끝에 삐져나온 발의 각도가 이상했다.

일부러라도 할 수 없는 기이한 형태로 발은 납작하게 바닥에 붙어 있었다.

“똑같지 뭐… 그나저나, 제노.”

린이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오십 보 정도는 더 먼 곳에 있는, 정확히 일행들이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손님들이 온 거야?”

“…어떻게 알았어?”

린이 방긋, 미소 지었다. 제노가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들렸거든.”

일행들 중 소리를 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는 동안 대화하는 걸 들었던 걸까?

의아했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레온이 가장 먼저 두 남매에게 다가갔다.

“안녕, 린.”

이유야 어찌 되었건 두 사람이 머무는 곳에 들어왔으니 미안한 마음이 컸다.

만일 데로니스 놈들이 주변에서 머무른 흔적을 발견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걸 보기라도 했다면 아이들의 안식처를 빼앗는 꼴이 될 테니까 말이다.

“반짝반짝 빛나….”

“…응?”

“저기가, 물빛으로 빛나….”

린이 작은 손을 뻗어 레온을 가리켰다.

아주 예쁘고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꼭 손에 넣고 싶을 만큼 반짝이는 빛이 레온에게서 느껴졌다.

하지만 다가갈 수가 없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예쁜… 사람이야.”

린이 손을 뻗은 상태 그대로 점차 잠에 빠져들었다.

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린.”

제노가 재빨리 동생의 곁을 지켰다. 넘어가려는 고개를 품에 안고 어깨를 토닥이자 린이 금세 잠들고 말았다.

“괜찮은 거야?”

“잠든 것뿐이야. …일단은.”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항상 있었다.

제노가 그녀를 잘 뉘여 놓았다.

모포를 다시 덮어주기 위해 들었을 때, 레온은 그 아래 뻗어난 린의 두 다리가 마치 나무뿌리처럼 엉겨들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경계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워렌과 에드먼드를 제외하곤 모두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제노가 곤히 잠든 동생을 한참 바라보다가 겨우 묻어둔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리우에서 태어났어.”

“리우라면 동대륙에 있는 우드로드의 도시군요.”

“…여긴 동대륙이 아니야?”

“예, 엔드해를 사이에 둔 서대륙입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셨던 거예요?”

브라운이 이끼가 자라난 돌바닥에 대략적인 지도를 그려주었다.

제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처음 알게 된 듯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한참이나 눈을 깜빡거렸다.

“몰랐어. 사실 우린… 납치되었거든. 어느 날 갑자기.”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어. 내가 살던 곳엔 그런 비가 아주 자주 왔거든. 분명 짧게 오고 그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틀인가 삼 일인가 내내 쏟아져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동대륙의 우드로드.

우거진 수풀 우림으로 이루어진 열대 지역에선 그처럼 짧고 굵은 비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쏟아지곤 했다.

“린은 그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어머니가 폭우로 무너진 집을 정돈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납치됐어.”

남매가 살던 리우는 우드로드 중에서도 바다의 합류 구간인 워터로드와 가까운 도시였다.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물이 범람했고, 그 영향으로 마을엔 물난리가 났었다.

나무로 만든 집이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곧 떠내려갈지도 모른단 두려움에 어머니는 집을 보강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그 틈에 누군가가 린을 납치했다.

제노가 보지 못했다면 그저 물난리에 잃은 거라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내가 놈들의 뒤를 밟았는데, 큰 바다 앞에서 나도 붙잡혔어.”

배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노는 어린 린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그 후부터는 악몽이었다.

몇 날 며칠 울렁거리는 뱃멀미에 나가떨어지는 동안 린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먹을 수 있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어린 제노도 무엇을 먹여야 할지 몰라 되는대로 뭐든 씹어 동생에게 먹였다.

“…그리고 어딘가에 끌려갔는데 그때부턴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도 모두 남아 있지만, 그곳에서 겪은 일들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주 어렴풋하게 매일 울며 제발 죽여 달라고 빌었던 것만 빼면.

“적어도 절기가 열 번은 넘게 뒤바뀌었어. 자세히는 기억 안 나지만.”

“아마 그때 서대륙으로 온 모양입니다만… 이상하네요. 납치야 흔한 일이지만 인력으로 사용한 것도 아니라면요.”

브라운이 의아해했다.

오랜 전쟁으로 이 서대륙에서도 이미 사람들을 사고파는 범죄가 들끓었다.

업자들은 경각심 없이 아이를 물건 팔듯 사고 찾으며 집안의 가신을 늘리거나 필요에 의해 원하는 대로 써먹었다.

그런 납치였다면 아이들도 오래지 않아 새로운 가문에 들어가거나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린 탈출했어.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기회는 정말 잘 잡거든.”

어둠 속에서도 제노가 환히 웃고 있다는 게 다 보였다.

“그래, 그런 것 같다. 우릴 찾은 것도 기회라면 기회니까.”

죽음의 땅이라 불리는 이 늪지대에 사람이 찾아올 일은 많지 않다.

일행들이 지나는 길에 마침 제노가 나타난 건 정말 잘된 일이었다.

“사실은 린이 나가보라고 한 거지만.”

“린이 그랬다고?”

“응, 희한한 일이야. 별로 말이 없거든, 내 동생은.”

레온이 잠든 린을 살폈다.

그때 불쑥, 벨이 레온의 무릎 위에 튀어 올랐다.

그러곤 이제는 제법 커진 몸으로 레온의 어깨 위에 두 발을 올리고 눈을 맞추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벨?”

갑작스러운 행동에 레온이 뒤로 밀려났다. 브라운과 케인은 깜짝 놀라 뒤편을 살폈다.

기척을 느낄 줄 아는 예민한 짐승이니 누군가가 다가오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들을 수 있다.

“응?”

“예, 공자님?”

“아, 아니….”

벨이 홱, 케인을 노려보곤 으르렁거렸다.

대화에 끼어든 그에게 여차하면 달려들 태세라 레온이 털 뭉치를 꽉 끌어안고 눈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말을 들을 수 있다니? 린이?’

-그래! 설호처럼 말할 수 있다. 나도 보인다, 목소리가!

‘너한테 말을 걸었다고? 네가 하는 방식으로?’

벨이 용맹한 표정으로 앙! 하고 소리를 냈다.

“뭔가…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죠?”

“그럴 린 없겠지만.”

브라운과 메리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레온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동안 뒤편에서 워렌과 에드먼드가 나타났다.

빠르게 다가온 그들의 표정은 조금 상기되어 보였다.

“공자님, 뒤편으로 길이 더 나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늪 밖과 비교했을 때 우리가 가려던 동선과 일치하는 것 같아.”

“정말인가요?”

어쩌면 안전하게 이동이 가능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브라운이 눈을 번쩍였다.

길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볼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그때 유심히 대화를 경청하던 제노가 툭툭, 레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응?”

“실망시키고 싶진 않지만 저기로 나가봤자 산에 가로막혀 있어.”

“산이 있다고?”

그 규모는 하늘을 뒤덮을 것처럼 압도적이고, 인간 따위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도 쓰레기로 뒤덮인.”

비록, 그곳이 바로 일행들이 찾던 곳이었지만.

***

일행들은 이곳에서 하룻밤 푹 잔 뒤 체력을 보충해 출발하기로 했다.

“잘된 일이지요, 도련님? 요 며칠 제대로 주무시질 못해 많이 힘드셨잖아요.”

“그래, 삼 일 정도만 더 가면 마다비아가 나올 테니 걱정도 덜었어.”

레온이 멀리 떨어진 곳, 동굴 구석에 자리 잡은 두 남매를 바라봤다.

녀석들은 언제 다시 또 같은 고통을 겪을까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쓰레기 산 근처를 뒤지며 먹을 것을 해결하고 있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해를 보고 빛 속에서 자라나야 할 아이들에겐 너무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저… 주제 넘는 부탁일 수도 있겠지만요, 도련님.”

마음 약한 메리가 몇 번이나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뗐다.

“저 아이들도 데려가면 안 될까요? …이곳에 남는다면 얼마 가지 않아 큰일을 치르게 될 거예요.”

상태가 좋지 않은 린을 보고 있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미래였다.

레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다비아까지 가는 길도 알아냈고, 적들의 위협을 걱정할 시간도 줄였다.

데리고 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두려움이란 타인이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억지로 이곳에서 끌고 갈 수도 없었다.

“선택은 저 아이들 몫이지.”

원치 않는 아이들에게 강요할 문제가 아니란 뜻이었다.

레온과 메리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녀석들을 바라볼 때였다.

주변 정찰과 짐 정비를 모두 마치고 돌아온 케인이 머뭇거리며 레온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 공자님….”

붉은 머리의 이 마음 약한 기사가 무슨 소리를 할지는 이미 예상이 가능했다.

레온이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케인은 역시나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두 남매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 아이들….”

“그래, 케인.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지.”

“예? 예, 공자님. 어른들의 도움이 절실한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원치 않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건 저 아이들 입장에서 납치가 아닐까?”

케인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유독 약자에게 약했다.

어리고, 여리고, 지키고 보듬어야 할 존재를 만나면 그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게 케인의 단점이자 유일한 흠이었다.

“하지만 우린 어른이니까 설득해볼 수 있겠지.”

“…설득이요?”

“뭐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중요한 거니까.”

하나 레온은 이제 그런 케인의 진심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케인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비밀을 온 힘을 다해 지켜주려 하는 것일 테니까.

“가서 설득해 봐, 케인.”

“…그래도 될까요?”

“얼마든지.”

시무룩한 케인이 금세 활짝 미소 짓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붙잡힐세라 재빠르게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하여간… 착해 빠졌다니까.”

0